포스터는 그 자체로 한편의 이야기다 박시영

영화 포스터 디자인계의 다크호스로 2007년 월간 <디자인> 1월호 ‘올해를 빛낼 디자이너’로 선정되기도 한 패기 넘치던 ‘빛나는’ 디자이너는 이제 관록과 연륜이 묻어나는 선배가 되었다.

포스터는 그 자체로 한편의 이야기다 박시영
박시영
1977년생. 영화 포스터 디자인 스튜디오 ‘빛나는’ 대표. ‘빛나는’이라는 이름은 그가 참여한 영화 <빛나는 거짓>에서 따온 것으로 술을 먹다가 즉흥적으로 지었다고 한다. 인디 포럼, 소규모 페스티벌 등의 전단지와 포스터를 디자인하면서 업계에 입문해 <저수지에 건진 치타> <은하해방전선> 등 독립영화 포스터 디자인부터 서울아트시네마, 퀴어 영화제, 제 8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 리얼판타스틱영화제, 시네마디지털서울 총괄 디자인 및 아트 디렉터까지, 영화 관련 디자인을 다양하게 섭렵했다. 이후 <미쓰 홍당무> <추격자> <다찌마와리> <마더> <하녀> <아저씨> <건축학개론> <늑대소년> <돈의 맛> <관상> <동주> <곡성> <우리들> <문라이트>등 대규모 블럭버스터부터 다양성 영화까지, 여러 장르의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bitnaneun.com

영화 포스터 디자인 스튜디오 ‘빛나는’은 올해로 생긴 지 10년이 되었다. 한남동의 스튜디오에서 만난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 박시영은 ‘이 바닥에서 10년 버텼으면 상 줘야 한다’며 웃었다. ‘빛나는’은 작년 한 해만 20여 편의 상업 영화와 10여 편의 다양성 영화의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이는 곧 우리가 이 스튜디오에서 만든 영화 포스터를 한 달에 평균 두 편 이상은 접했다는 얘기다. 인터뷰 당시에도 그는 외화 <문라이트> 포스터 디자인, 한국 영화 <불한당> 포스터 촬영 준비를 하면서 4월부터 시작하는 뮤지컬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전체 브랜딩 프로젝트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영화 포스터 디자인계의 다크호스로 2007년 월간 <디자인> 1월호 ‘올해를 빛낼 디자이너’로 선정되기도 한 패기 넘치던 ‘빛나는’ 디자이너는 이제 관록과 연륜이 묻어나는 선배가 되었다. 인터뷰: 전은경 편집장, 글·정리: 오상희 기자, 사진: 장덕화

EK 2007년에 제가 인터뷰했잖아요. 여러 디자이너의 추천을 받아 디자이너 박시영을 알게 됐어요. <짝패>와 부천판타스틱영화제 포스터로 막 유명해져 있었지만 그야말로 갑자기 등장한 것처럼 느껴졌어요.

SY 디자인 전공자도 아니었고, 소규모 영화제나 인디 포럼 영화제 포스터를 만들다가 바로 류승완 감독의 <짝패>(2004)로 상업 영화에 데뷔했으니까요. 소위 말해 ‘갑자기 툭 튀어나온 놈’이었죠.

EK 잠시 미대를 다니고 사회학도 공부했지요? 디자인 전공은 아니라고 했지만.

SY 고등학교까지 고향(구미)에서 다녔는데 노는 거 좋아하고 오토바이 타고 다니고 그랬어요. 빨리 집을 벗어나고 싶어서 서울에 올라와 가스 배달을 했는데, 그래도 어딘가 소속은 되어 있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미술 전문학교를 다녔지요. 실기 시험 없이도 들어갈 수 있는 학교가 있었거든요. 근데 돈을 벌어야 해서 수업은 계속 빠지고, 솔직히 강의를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고요.(웃음) 계속 F 학점 맞다가 1학년 2학기때 재적당했어요.

EK 그럼 사회학과는 어떤 계기로 들어가게 된 건가요?

SY 군대를 다녀오니 영화 잡지 <키노>로 대변되는 컬처 붐이 일고 있었어요. 독립 영화제와 인디 포럼이 태동하고 거리에서 크고 작은 예술제가 열리던 시기였지요. 사당동 시네마테크나 충무로에 있는 영상센터 오재미동에 들락거리고 홍대 클럽 펑크 밴드 공연을 보러 다녔어요. 공부 좀 하면 그 문화를 더 이해할 수 있을까 해서 들어갔는데, 거기도 결국 2학년 1학기 때 재적당했어요. 결과적으론 고졸이에요. 그보다는 홍대에서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좋았어요. 지금 만나는 친구들이 다 그때 알게된 친구들이에요.

EK 그렇다면 디자인과는 연이 없었던 것 같은데 처음 포스터 디자인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뭐예요?

SY 군대에서 워드는 칠 줄 알아야 한다고 선임이 한글 97을 가르쳐줬는데 곧잘 했단 말이죠. 제대하고 ‘문화학교 서울’에 다니면서 독립 영화나 인디 영화제에 참여했어요. 포스터를 만들어야 하는데, 미술 전문학교에 잠깐 다녔다는 이유로 제가 그냥 한글 97로 뚝딱뚝딱 만들었어요. 홍대 클럽에서 파티하면 수작업으로 전단지도 만들고. <할 수 있다 포토샵 4.0>이나 < 디자이너를 위한 포토샵 실무 무작정 따라 하기 > 같은 책을 보고 독학했어요. 책 살 돈도 없어서 아는 누나한테 빌렸죠. 근데 재미가 있었고 꽤 빨리 습득했던 것 같아요 포토샵을 할 줄 아니까 일러스트레이터는 더 쉽더라고요. 그때까지 살면서 ‘잘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어봤어요. 전 착하다거나 공부 잘한다거나 하는, 뭔가 칭찬이라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내가 만든 포스터로 칭찬을 받으니까 ‘내가 하고 있는 게 뭐지’라는 자각을 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디자인인가?’

그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건 제8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 포스터(2004)를 만들면서부터다. 잘 알던 독립 영화 프로그래머의 부탁으로 작은 영화제 홈페이지를 제작했다. 이를 계기로 추천을 받아 부천판타스틱영화제 포스터까지 만들게 되었다. 싸구려 만화, 엽기적인 동화에서 프릭 쇼(freak show) 콘셉트를 가져오고, 영화제 로고인 깨비를 형상화해 소시지 형제를 만들어 기괴하게 변주했다. 이 강렬한 이미지는 이전의 딱딱한 관내 행사 포스터 느낌에서 벗어난 컬트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비주얼로 화제가 되었다. 상업 영화 데뷔작인 류승완 감독의 <짝패>(2004)는 관객들이 포스터를 계속 떼어가는 바람에 품절 사태를 빚기도 했다. <짝패> 이전에 맡은 리얼판타스틱영화제(2005)는 포스터 시리즈와 홈페이지, 영상 제작까지 전체 아트 디렉팅을 맡았다. 다람쥐와 흑인 소년, 포니2 자동차와 유인원이 이질적으로 얽힌 독창적인 홈페이지는 지금 봐도 흥미롭다.

<고산자, 대동여지도>(2016). 사계절 한국의 풍경을 담은 서정적인 포스터.
EK 영화를 좋아해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나요? 임순례 감독의 <세 친구>를 보고 방황을 멈추었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SY 좋아하긴 하죠. <세 친구> <파이란> <와이키키 브라더스> 같은, 내 젊은 시절의 경험과 매치되는 현실적이면서도 축축한 영화를 선호해요. 그런데 꼭 영화를 좋아해서 이 일을 한 건 아니에요. 굳이 말하자면 시나 소설을 더 좋하죠. 솔직히 일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었다거나 ‘너무 하고 싶어서’ 한다는 건 좀 오버 아니에요? 이건 직업이자 생계 수단이고 또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해요. 거기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약간의 가오도 있고 폼 잡기도 좋잖아요.(웃음)

EK 본인 말대로 비전공자에 고졸임에도(웃음) 일을 잘했다는 얘기네요.

SY 지금 생각해도 내가 좀 잘했던 것 같아요.(웃음) 나는 ‘뒷발로 때려잡았다’고 표현하는데 편집 문법을 아예 모르니까 오히려 사람들이 신선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조형미나 조화, 레이아웃 같은 것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죠. ‘예쁘다, 안 예쁘다’에 대한 개념이 없으니까 그냥 특징적인 캐릭터를 잡아나가는 형태로 작업했어요.

EK 그래도 한국 사회에서 학연은 무시할 수 없을 텐데, 일하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SY 특정 울타리에 속하지 않으면 일감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힘들어요. 자극이 되건 조언이 되건 따라 하건 학연이나 지연이 있어야 공유가 되는데 나는 매번 혼자 풀어야 할 숙제만 있었던 거죠. 나 같은 선례가 없으니까 맨땅에 헤딩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다른 방식으로 일거리를 찾다 보니 영화 포스터 디자인 쪽으로 온 것일 수도 있고요.

그는 특히 굵직한 액션이나 스릴러에서 빛을 발했다. 디테일을 걷어내고 한 컷에 담을 수 있는 영화의 가장 강력한 색채와 이미지를 담아내는 데 탁월하다. 류승완 감독은 <다찌마와 리>의 해외판 포스터를 홈페이지에 소개하며 극찬했고(포스터를 마구 퍼 가시라고 독려했다), 2015년 <트라이브>는 국내 심의에서는 유해성 판정을 받았으나 토론토 국제영화제 공식 트위터에 ‘주목할 만한 포스터’로 소개되는가 하면,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 주간 당시 칸 영화제 공식 트위터에서 ‘아름다운 포스터’라는 찬사를 받았다. 2013년에는 <관상>, 2014년에는 <거인>이 51명의 마케터가 뽑은 ‘올해의 영화 포스터’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나는 상업 영화, 다른 하나는 저예산 독립 영화다. 박시영은 장르를 아우르며 자신의 스타일을 보여주기보다는 영화 자체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디자인이 글을 쓰는 것 같다고 했다. 컬러나 도형은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펜인 셈이다. 작년에 디자인한 <우리들> 포스터는 시나리오를 토대로 영화의 뒷이야기를 상상해 담았다. 그는 <우리들> 포스터 디자인을 “오글거림을 참으면서 내 안에 있을지도 모를 소녀적 감성을 최대한 끌어내 작업했다”고 했다.

EK 박시영의 디자인은 표현 방식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질적인 요소를 섞는다는지, 색다른 컬러 조합을 시도한다든지.

SY 나는 어떤 요소들이 서로 조화롭고 또 안 어울리는지 몰라요. 시각적으로 대부분의 사물이 뉴트럴해 보인다고 할까? 책의 컬러가 노랑이건 빨강이건, 지갑 형태가 원이건 네모건 특별한 감흥이 없어요. 그래서 전혀 다른 요소들을 섞는 데 대한 거부감도 없어요. 예를 들어 1960~1970년대 포드 자동차와 코카콜라 광고를 보면 빈티지한 라벤더 컬러가 떠올라요. 그런데 1969년에 미국이 최초로 달나라에 갔단 말이죠. 그러면 나는 달나라 우주선의 실버 컬러와 빈티지한 라벤더 컬러를 조합하는 식으로 디자인해요.

EK 직관적 선택이나 감각이 아닌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는 건가요?

SY 그럼요. 리얼판타스틱영화제 포스터를 만들 때도 그랬어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을 워낙 좋아하거든요. 히치콕 감독의 <사이코>에 나오는 캐릭터와 모텔을 모티브로 삼고 국방색과 어두운 녹갈색과 주황색을 썼어요. 히치콕 감독은 1950~1960년대 후반부터 냉전 시대에 활발히 활동했고, 냉전 시대의 상징은 소련이죠. 소련의 국기 색은 빨강과 주황이고. 이런 식의 논리를 만드는 거예요. 1960년대는 히피가 대세였지만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났잖아요. TV를 보면 아침에는 드라마가 나오다가 저녁엔 뉴스에서 베트남 전쟁 이야기가 나왔어요. 이건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수용 가능한 것이란 얘기거든요. 그럼 또 군복 색깔의 빈티지한 스텐실 문양에 우드 스탁의 이미지가 주는 애시드한 컬러를 섞어버리는거죠. 그런 식으로 작업하다 보면 완전히 새로운 게 나오는 거예요.

EK 디자인할 때 참고하거나 영향을 받은 것은 뭔가요?

SY 예전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건 헌책방에서 보던 <화성침공> 같은 펄프 소설 표지였죠. 소설이나 TV 드라마, 뉴스 자료 화면도 많이 봤고요. 개인적으로는 소설책을 보거나 대중문화, 역사 공부를 해요. 소설가 중에는 <질식>의 척 팔라닉이나 <고래>의 천명관 같은 특이한 문체를 쓰는 작가를 좋아해요.

EK 영화 관련 비주얼 하면 포스터 디자인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작업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요?

SY 정확한 명칭은 키아트 디자이너예요. 영화와 관련된 전단지, 시나리오 북, 보도 자료 북, 기타 굿즈까지 만들어요. 영화가 개봉되기 전 우리가 보는 시각적 광고물의 디자인과 아트 디렉팅 전부를 포괄하죠.

EK 포스터 디자인은 영화 제작의 어느 단계에서 시작하나요?

SY 보통 프리 프로덕션 때부터 투입돼요. 임상수 감독의 <하녀>를 예로 들면 캐스팅 작업 즈음에 포스터 디자인 의뢰가 들어와요. 영화를 찍는 동안 우리는 시나리오를 읽고 포스터 기획을 하죠. 이미지는 경우에 따라 영화 스틸 컷을 쓰기도 하고 촬영을 하기도 하는데 <하녀>는 촬영을 했어요. 포토그래퍼를 누구로 할지, 어디서 찍을지, 어떤 옷을 입힐지, 메이크업은 어떻게 할지, 배우에게 어떤 디렉션을 줄지도 다 생각해요. <하녀> 포스터는 클로즈업한 전도연의 묘한 표정이 이슈가 되기도 했는데, ‘오르가슴인지 슬픈 건지 모호한 표정을 지어달라’ 뭐 이런 디렉션을 줬죠. “오르가슴?!” 하고 놀라서 눈이 동그래지던데요?(웃음) 결과물이 정말 잘 나온 촬영이었어요.

EK 작업할 때 오로지 시나리오에만 의존하나요? 필름을 일부라도 보지는 않나요?

SY 완성본은 거의 볼 수가 없죠. 영화 후반 작업을 할 때 이미 마케팅이 시작되니까요. 편집 필름을 본다 해도 한 20% 분량 정도 볼 수 있을까? 그래서 기본적으로 영화에 대한 촉이 굉장히 좋아야하죠. 이제 시나리오를 보면 머릿속에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지긴 해요. 포스터의 전체적인 콘셉트는 대부분 장르로 결정되니까요. 아, 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좀 달랐어요. 시나리오상으로는 분명 스릴러였는데, 봉준호 감독이 그렇게 찍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모정(母情)이라는 심리적인 풍경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더란 말이죠. 시나리오랑 결말도 달랐어요.

EK 포스터 콘셉트를 감독과 상의하나요? 주로 누구와 이야기해요?

SY 마케터들하고 더 많이 얘기해요. 여기에도 장단점이 있는데 저는 장점이 더 많다고 봐요. 우리가 영화에 투입되는 시간은 길면 6개월인데 감독들은 3~5년을 준비하거든요. 그래서 자신의 영화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할 때도 있어요. 감독이 생각하는 핵심 장면이 포스터에 담을 만한 메시지가 아닌 때도 있거든요.

EK 감독, 마케터, 영화 제작사의 의견이 다를 때도 많을 것 같아요.

SY 우리는 제작사, 배급사, 투자사, 감독, 배우, 마케터 사이에서 일하잖아요. ‘포스터 컬러를 어둡고 하얗게’, ‘사진 느낌은 클래식하면서 모던하게’ 이런 식으로 나와요. 그럼 머리가 복잡해지는 거죠. 후반 작업을 할 때도 한쪽에서는 배우 얼굴을 키워달라 하고 다른 쪽에서는 줄여달라 해요. 그럴 땐 포스터 디자이너가 영화의 본질이나 메시지를 잘 꿰뚫고 객관적으로 이야기해줄 수 있어야 해요. 디자인을 잘하는 건 다음 문제죠. 빛나는 직원 중에는 디자인 툴도 모르고 들어온 친구도 있어요.

EK 포스터가 잘되어 흥행이 되었다거나 오히려 반대인 경우도 있나요?

SY 포스터 때문에 망하지는 않겠지만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로서 책임감은 느끼죠. 포스터는 영화 개봉 전에 가장 함축적으로 영화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니까요.

EK 기억나는 영화 포스터 작업을 꼽아본다면요?

SY <관상> 포스터는 모두가 만족한 결과물이었어요. 세밀한 한국화 기법을 배우의 얼굴에 적용한 독특한 포스터였죠. 유명한 배우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들어갔으니 제작사에서도 만족했고요. <관상>이라는 영화의 정체성도 잘 보여줬고. 아쉬웠던 건 강우석 감독의 <고산자 , 대동여지도>예요. 디자이너의 만족과 흥행은 별개 문제인 것 같아요. 산과 바다 등 한국적 풍경에 차승원이 서 있는, 수묵화 같은 멋진 포스터였어요. 비주얼로는 아름다웠는데사람들이 그걸 영화 포스터로 인식하지 않는 게 문제였죠.

EK 한국 영화 시장이 커지면서 영화 포스터 디자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어요. 디자이너 중에서 영화 포스터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이도 많고. 하지만 이 업계는 진입 장벽이 워낙 높다고 들었어요.

SY 일단 포스터 디자인을 하겠다고 뛰어든 사람들이 끝까지 버티지를 못해요. 포스터를 비롯해 영화와 관련된 시각 광고물은 영화 개봉 두 달 전부터 집약적으로 노출되거든요. 온라인, 버스, TV, 지면에 동시다발적인 물량공세를 펼치죠. 거기에 드는 비용은 또 얼마나 어마어마한대요. 짧은 기간에 많은 비용을 써가며 물량을 소화하는데 잘못 컨트롤하면 큰일나는 거예요. 우리 역할도 무척 복합적이에요.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도 하고 시나리오 분석도 해야 하고요. 포스터 촬영도 전체 과정을 다 컨트롤해야 하죠.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하는 일이 전부가 아니에요.

EK 그래서인지 현재 영화 포스터를 전문적으로 하는 곳은 10군데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SY 한국 영화가 1년에 80편에서 많게는 120편이 나오는데, 상업 영화만 놓고 보자면 주로 작업하는 곳이 스푸트니크, 꽃피는봄이오면, 나무, 그림, 빛나는, 프로파간다 이렇게 6군데예요. 영화는 새롭고 독창적인 작품을 만드는 예술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자본이 들어가는 비즈니스 영역이에요. 그래서 모험을 하려 하지 않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죠. 가능한 한 위험 요소는 피하려고 해요. 그러니 포스터 디자인까지 선뜻 새로운 디자이너와 합을 맞춰가며 일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요. 이미 알려져 있고 경험이 많은 스튜디오랑 일하죠. 영화업계가 대부분 그래요. 영화 마케터들도 10~20년째 하던 사람들이 계속 일하고.

EK 그렇다면 영화 포스터 디자인 시장은 산업이라 할 만큼 규모가 있는 시장인가요?

SY 빛나는 같은 상업 영화 포스터 디자인 스튜디오는 시장이 작든 크든 일단 영화 포스터 디자인만으로도 먹고살 수는 있어요. 한번 커진 영화 시장이 쉽게 축소되지는 않거든요. 경제적 불황기에도 엔터테인먼트 시장은 성장하기도 해요. 솔직히 진입 장벽을 높인 건 우리 같은 디자인 스튜디오 잘못도 있어요. 이미 형성된 시스템 안에서 일이 계속 들어오니까 굳이 우리 파이를 공유하거나 노하우를 전수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죠. 폐쇄성이 강해지는 거예요. 최근에는 다양성 영화 시장이 커지면서 독립 영화, 비주류 영화를 찾는 관객도 많아지고 피그말리온, 스테디, 다이버스 같은 신생 업체도 많이 생겼어요. 언젠가 ‘상업 영화만 하는 이유는 다양성 영화 포스터 디자인 영역에 가서 밥그릇 빼앗기 싫어서’라고 말한 적이 있었어요.
우리 같은 스튜디오가 상업 영화에서 돈은 돈대로 벌고, 그러면서 다양성 영화도 하고 싶다고 그 영역에 가서 단가 낮춰서 일하는 건 탐욕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영화 포스터 디자인 시장 전체의 단가가 떨어져요. 디자인 퀄리티는 물론이고요. 이건 결국 제 살 깎아먹기밖에 안 되는 거죠. 우리 같은 중견 업체가 동종 업계 디자이너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는 단가를 지키는 거예요. 저도 다양성 영화 작업을 하지만 단가는 절대 안 낮춰요. 우리가 비싸면 다른 스튜디오로 가겠죠. 다른 스튜디오에는 계속 일거리가 들어가는 거고요. 업계끼리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어요. 몇 군데와는 이 기준을 지키자고 공유하고 있어요. 솔직히 상업 영화 포스터 시장에는 5개 스튜디오 정도는 더 들어와도 돼요. 업체 수가 많다고 나눠 먹을 파이가 적어지지는 않아요. 단가 후려치는 게 문제지 시장에 들어오는 게 문제는 아닌 거죠.

박시영은 2007년부터 지금까지 홍대 상상마당에서 개최하는 ‘대단한 단편 영화제’ 아트 디렉터도 맡고 있다. 인디와 스트리트 컬처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란 그에게 홍대는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가 만드는 ‘대단한 단편 영화제’ 포스터에는 홍대의 오래된 당구장이나 탁구장을 배경으로 하는 등 그 시대의 정서를 담아내려 한 모습이 보인다.
2011년부터는 디자이너들이 단편 경쟁 섹션에 오른 영화의 포스터를 제작해주는 ‘대단한 디자인 프로젝트’도 제안해 진행하고 있다. 작년에는 빛나는, 스푸트니크를 비롯해 다이버스와 프로파간다, 일러스트레이터 신모래, 그래픽 디자이너 이천성 등이 함께했다. 영화 포스터라는, 가장 많은 대중에게 노출되는 친숙한 매체를 통해 디자이너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목적이다. 박시영은 ‘운이 좋아’ 영화 포스터 디자인 시장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기회를 독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대단한 디자인 프로젝트’를 통해 다른 후배, 동료들에게도 기회가 생기고 또 이를 통해 영화 포스터 디자인 시장도 풍성해지기를 바란다.

EK 영화 포스터는 이전의 매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영화 산업 시장의 변화의 영향도 있겠죠? VR이나 모바일 등 영화를 미리 접할 수 있는 수단도 많아졌고요.

SY 우리가 한창 영화를 볼 때 영화는 단순히 감상이 아니라 문화였어요. 좀 허세도 있었겠지만 괜히 아트 시네마 가고, 옆구리에 <키노> 끼고 다니고 그랬잖아요. 지금 영화는 킬링 타임 역할이 커요. 20~30대가 데이트용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자주 보는 소비층인데 그마저도 점점 줄어들고 있고요.

EK 그래도 영화 포스터 자체의 매력은 분명히 있잖아요. 여전히 사람들은 영화를 포스터로 기억하니까요.

SY 예를 들어 블록버스터급 상업 영화가 1000개 관에서 개봉한다고 해요. 그만한 자본을 투입했으면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위해 500만 명 이상은 봐야 해요. 그럼 남녀노소가 다 좋아할 만한 포스터를 만들어야 해요. 거기다 한국 관객들은, 특히 상업 영화의 경우에는 포스터가 조금만 특이해도 영화가 어렵다고 생각해요.

EK 영화 포스터 디자인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지만 동시에 가장 친숙하고 대중화된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동시에 대중성과 작품성 사이를 오가는 일이고요.

SY 대규모 상업 영화와 소규모 영화는 소비층도 확실히 달라요. 포스터의 역할도 그에 따라 마케팅 툴로 보는 경우와 영화 전체를 상징하는 메시지로 보는 경우에 따라서 다르고요.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에 대한 정보나 이미지를 가장 강력히 전달하는 매체가 포스터라고 한다면 사실 작년에 개봉한 <마스터> 같은 영화는 포스터가 뭐 굳이 필요하겠어요. 배우가 이병헌, 강동원, 김우빈인데. 포스터보다 ‘누구 나온다’ 하면 되는 거죠. 영화의 시장성에만 주목한다면 포스터의 과도한 실험성 같은 건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하죠.

EK 대규모 자본이 들어가는 영화의 경우 디자인도 보수적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드나요?

SY 그런 모순은 모든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숙제예요. 예술적 측면에서 도전 정신은 있지만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만큼 안전하게 가고 싶기도 한 거죠. 저만 해도 새롭게 하고 싶으면서도 안전하게 하고 싶어요. 반면에 욕심내고 설득하면 또 수용이 안 될 것도 없어요. 단순히 클라이언트가 뭐라고 했다는 핑계는 무의미해요. 더 냉정하게 얘기하면 저를 포함해서 지금 포스터 업계 자체의 잘못이 크다고 봐요. 적어도 이 업계에서 디자인을 하고 있다면 원하는 비주얼을 설득하며 밀고 갈 힘은 있는데 우리가 노력을 안 하는 거죠. 경쟁자도 없으니 굳이 피곤하게 일할 필요도 없고요. 그게 한국 영화 포스터 시장을 고루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EK 그럼에도 포스터 디자인은 더 다양해져야 하나요?

SY 디자인만 놓고 보자면 영화 포스터가 대중적인 매체이기 때문에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발전 측면에서 더 다양해져야 하죠. 영화 포스터만큼 한글을 꾸준히 쓰는 디자인은 드물어요. 한글 타입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고 심지어 이를 이미지랑 결합시켜야 하잖아요. 한글은 디자인 면에서 까다로운 문자예요. 오히려 영어는 낱글자이고 볼륨감이 있어서 디자인하기 쉽죠. 영화 제목은 대부분 짧은데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그게 작업하기가 더 힘들어요. 타이포그래피는 잘 나왔는데 이미지에 올리면 안 어울리기도 하고. 굉장히 다양한 테크닉이 필요해요. 그래도 <고지전>에서 사용한 고딕체를 비롯해 스텐실 캘리그래피, 레터링 등 한글이 영화 포스터에서 다양하게 변주된 덕분에 한글 타이포 디자인이 풍부해졌다고 생각해요.

EK 그렇다면 포스터가 사람들의 미감이나 안목을 높이는 매체가 될 수 있겠네요?

SY 그럼요. 더 다양한 디자인이 나올 수 있죠. 다양한 디자인이 나올수록 더 수준 높은 디자인을 누릴 수 있는 거고요. 영화 포스터는 대중이 많이 접하는 시각 디자인물로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어요.

EK 포스터 디자이너는 영화 포스터를 포함해 영화와 관련된 시각 디자인물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고 보나요?

SY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역할인 것 같아요. 영화의 방향성을 담은 포스터 안에는 아이덴티티도 있고, 그래픽도 있죠. 작품을 제대로 브랜딩해서 이를 대중에게 처음 보여주는 사람이라 할 수 있어요.

인터뷰 이후 설경구, 임시완 주연의 <불한당> 포스터 촬영을 위해 파주 아트서비스 스튜디오에 가 있는 박시영을 다시 만났다. 보통 포스터 촬영은 12시간 정도 소요된다. 개별 캐릭터 컷, 단체 컷, 티저 포스터 컷, 메인 포스터 컷 등의 촬영을 위해 스토리북, 캐릭터 북부터 포즈 디렉션, 메이크업과 스타일링까지 기획한 두꺼운 콘티가 만들어진다. 박시영은 포토그래퍼와 함께 세트와 조명을 체크하고, 누군가에게 맞은 듯한 분장을 한 배우 임시완을 보더니 피멍의 넓이와 컬러까지 꼼꼼하게 체크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고 그의 오케이를 받고 나서야 촬영이 시작된다. 포토그래퍼팀, 스타일링팀, 메이크업팀부터 각 배우들의 매니저와 스태프들까지, 한 컷 한 컷에 수십 명의 스태프가 집중한다.

<카페 뤼미에르>(2005). 국내판과 해외판을 통일시키고 싶다는 해외 세일즈사의 요청으로 B컷이 되었다.
EK 지금까지 해온 일을 영화 장르에 비유한다면 무슨 장르일까요?

SY 절대 멜로나 휴먼 코미디는 아니겠죠. 굳이 장르로 치면 액션 누아르 정도? 영화 포스터 디자인은 무척 집약적인 작업이거든요. 두 달은 치열하게 매달리는 거예요. 일하는 현장도 거칠죠. 싸우기도 하고요. 진짜 죽어라고 수정하고. 죽어라고 욕하고.

EK 예전에 영화 수정 작업에 대한 스트레스를 분출하듯 SNS에 쓴 글을 본 적이 있어요.

SY 자조와 스트레스, 반항이 다 섞여 있었죠. 폭발시킬 데가 없었나 봐요.(웃음) 콧구멍 크기 하나로도 수정이 몇 번씩 오가거든요. 그래도 그때는 오히려 잘하고 싶은 욕망이 컸어요. 오히려 이름이 알려지고 일도 안정적으로 들어오고 나서부터 자포자기하기도 하고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어요. 그럴 때 돌파구로 디자인 공부를 해볼까 생각도 했었어요.

EK 다시 학교를 가거나 유학을 가겠다는 생각이었나요?

SY 디자인을 배우지 않았다는 데 대한 열등감이나 약간의 패배감도 같은 건 늘 있었어요. 음반이나 페스티벌 아트 디렉팅 하면서 프로필 올릴 때 좀 주눅 들기도 했고요. 디자이너 모임이나 디자인 관련 행사에서 동문끼리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 소외감도 느끼고. 더치 디자인 나왔을 때 ‘저건 뭐지?’ 싶기도 했고요. 30대 초·중반까지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지금은 많이 없어졌어요.

EK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SY 과거에 나를 방해하고 괴롭히던 것들이 지금의 좌절의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자기 연민이 문제였지. 사실 그동안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공포가 있었어요. 타이포는 포스터 디자인할 때 가장 빨리 만들고 또 제일 오래 만들어요. 근데 매번 너무 어려워서 미칠 것 같아요. 그런데 올해 들어 마음이 좀 편해졌어요. 사실 그동안 몰래몰래 더치 디자인 스타일도 따라 해보고 폰트 개발도 해보고 그랬거든요.(웃음) 그냥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새로운 게 툭툭 나오더라고요. <문라이트> 포스터에 야광 인쇄를 시도한 것처럼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발상을 하게 됬어요. 일을 시작한 지 10년쯤 되니까 이제 편집과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자신감과 여유가 좀 생긴 것 같아요. 최근에는 방송(SBS <미운 우리 새끼>)에도 출연하고 게이 매거진 <뒤로>(DUIRO) 1호 화보 아트 디렉팅도 했어요. <뒤로> 2호에는 인터뷰이로 참여했고요. 방송은 그냥 놀러 가자고 해서 가봤더니 방송이었고요(웃음), <뒤로>는 특정 이슈에 대해 다루는 의미 있는 콘텐츠라고 생각했어요.

EK 지금 커밍아웃이나 성 소수자와 관련된 이슈를 제기하는 건 중요한 일이긴 해요.

SY 디자인 분야가 다른 영역에 비해 개방적인 편이라고 해도 자유롭게 말해도 될 만큼 아직 인식이 자유롭지는 않아요. 그래서 굳이 먼저 말하지는 않죠. 커밍아웃을 하는 순간부터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에게는 필터가 씌워지거든요. 괜히 그 필터를 통해 사람을 판단하게 되잖아요. 그렇다고 숨기지도 않아요. 이런 과정을 겪어왔고, 어느 정도 능숙하게 헤쳐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다음 누군가는 적어도 힘든 경험을 하지 않도록 내 위치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을 할 거예요. 해가 떠서 출근하고 밤샘도 잦은 이 일을 10년째 해오고 있는 그는 (그가 SNS에 써놓은 표현을 빌리자면) 올해 에누리 없는 마흔이 되었다. 어느 시점부터 ‘충분히 열심히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올해 빛나는 10주년을 맞아 전 직원에게 2달씩 유급 휴가를 줄 예정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고 출근하는 평범한 일상도 누리지 못하고 일에만 매달려온 지 10년, 이제야 자신감과 여유를 찾았다. 그리고 이제 조금씩 그 일상을 살고 있다고 했다.

EK 요즘 무슨 생각해요? 보통 일을 하면 3년, 5년, 10년 주기가 있다고 하죠. 커리어에서 뭐가 필요한지,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해야 할지 같은 생각을 하는 주기가 그렇게 오기도 해요.

SY 디자이너로서 변명하지 말자는 생각을 해요. 그동안 거짓말과 변명으로 점철된 삶을 산 것 같아요.(웃음) 사실 디자인 비전공이라는 이력으로 덕 본 것도 많아요. 열등감이나 약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용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 주목받은 거니까요. 스스로 비전공자라는 사실을 이용해서 온갖 핑계와 변명거리를 만들었거든요. ‘배우지 않았으니까 내 식대로 할 거다’라거나 ‘어설퍼도 나는 잘 모르니까 그냥 넘어가자’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나는 디자이너지만 동시에 ‘쌈마이’라 생각하고 중요한 순간에 쓱 빠지기도 했고요. 사실 영화 포스터 디자인을 1년에 평균 10편 정도 했다고 하면 10년 동안 100편을 한 건데, 자기 복제도 많이 했죠.

EK 일종의 자기 고백인가요?(웃음)

SY 액션이나 누아르 영화는 톤이나 레이아웃이 비슷한 게 굉장히 많고요. 다 지난 일이니까 말하는 거지만 교묘하게 따라 한 적도 있어요. <돈의 맛> 포스터에 나온 백윤식 포즈도 사실 레퍼런스를 거의 똑같이 따라 한 거예요. 나이 든 사람이 남 탓하고 변명하는 것만큼 없어 보이는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냥 솔직히 인정하는 거예요.

EK 좋은 영화 포스터는 뭐라고 생각해요?

SY 좋은 포스터가 무엇일까 하는 고민은 계속해요. 영상물로 소비되는 시대에 포스터가 생명력을 가지기란 쉽지 않아요. 그래도 내 경험치를 살펴보면 포스터가 누군가의 한 시절, 그

시대를 떠올리는 지표가 되었으면 해요. <E.T> 영화의 포스터를 보는 순간 <E.T>를 봤을 때의 추억과 경험이 소환되는 거죠. 포스터는 가장 먼저 영화를 소개하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대중에게는 추억의 매개체로도 기능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요. 떼어 가서 방에 붙여놓고 싶은, 내 마음에 남는 영화 포스터 하나는 있어야죠. 가끔 포스터 보면 헤어진 애인 생각에 욱하기도 하고.

EK 어느새 중견 디자이너가 됐는데 앞으로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나요? 직접 영화를 찍어보거나 다른 일을 해볼 생각은 없나요?

SY 사람은 각자 나이와 경력에 맞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일단 그 나이에 맞는 꼰대가 되어야하죠. 나름대로 연륜과 경험은 생겼지만 이젠 젊지도 세련되지도 않아요. 후배들에게 ‘힘들겠다. 이해해, 니 마음 알아’ 이런 착한 척도 하고 싶지 않아요. 꼰대로서 잔소리, 쓴소리 해주고 싶어요. 나에게 그런 선배나 동료가 없었던 데 대한 아쉬움일 수도 있어요. 지금 젊은 디자이너들을 보면 선배가 없는 것 같아요. 소위 선배라는 작자들이 다들 자기 살기 바빠요. 욕심도 많고. 아, 얼마 전에 뮤직비디오 감독 제안이 들어왔는데 아마 하게 될 것 같아요. 영화도 잘 찍을 자신은 있어요. 아직 할 생각은 없지만.

디자이너 박시영이 추천하는 ‘디자이너가 봐야 할 영화 5’

1. 도널드 오 코너(Donald O’Connor)의 뮤지컬 영화들. 그중 <애니싱 고우즈(Anything Goes>(1956) 감독 : 로버트 루이스
2. 카르멘 미란다(Carmen Miranda)의 모든 영화들. 그중 <갱스 올 히어(The Gang’s All Here>(1943) 감독 : 버스비 버클리
이 두 영화를 보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이나 아이젠 하워의 그 부유한 아메리카 시대와 같은 배경은 몰라도 된다. 뮤지컬 영화 특유의 과장된 낙관주의와 화려한 색감도 유심히 볼 필요 없다. 남미의 섹스 폭탄이나 이국적인 여가수의 선정적인 몸짓, 이런 것도 잠시 잊어라. 힘들어하는 모든 디자이너들에게 이미지가 얼마나 즐거운지, 즐거움 자체가 얼마나 훌륭한 이미지인지 상기시킨다는 것만으로 이 두 영화는 볼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가 하는 일련의 행위가 즐거울 수 있다는, 그 말도 안 되는 낙관에 잠시 동화되는 것도 의미있지 않을까?(tip 유튜브는 위대하다!)
3. <데몰리션(Demolition)>(2015) 감독 : 장 마크 발레
디자이너 혹은 한 개인으로 살기에도 혹독한 시기인 것 같다. 관용은 사치가 되었고 우리의 슬럼프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아마추어의 태도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디자이너의 일은 매 순간 슬럼프와 패배감과 열등감과 상실감을 마주하는 일이다. 잘하고 싶은 마음, 성취하고 싶은 마음이 허물어지고 난 후에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더라도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그 시간을 혼자 견디며 마우스를 클릭해 새 창을 열어야 하는 이들에게 위로가 될 거다. 나 역시 그랬고.
4. <문라이트(Moonlight)>(2016) 감독 : 배리 젠킨슨
색은 그 자체로 중립적이지 않다. 모든 것이 뽀샤시한 인스타그램 시대에 색이 이미지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새삼스럽게 알려주는 영화다. 영화 자체로도 아름답고 훌륭하지만 이 영화에서 사용된 푸른색의 역할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기능적으로 사용하는 색이 얼마나 수많은 감정과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5. 모든 무성 영화, 나치 시대의 선동 영화
무성 영화 시대의 모든 영화가 어떻게 화면 하나로, 구성 요소의 배치만으로 대사의 역할을 대신하는지를 보면 미장센 혹은 이미지가 단순한 장면이 아니라 복잡하게 계산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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