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가 읽어야 할 책, 장식 편
장식에 대한 세 권의 책
모더니스트들은 어째서 장식을 범죄라고 낙인찍었을까? 그 출발점은 아돌프 로스의 <장식과 범죄>에 있다. <장식과 범죄> 그리고 그 밖에 장식을 언급하는 여러 책을 통해 장식의 의미를 되짚어 보자.
장식은 모더니스트들의 절대 악이자 적이었다. 그들은 왜 장식을 증오했을까? 장식은 인류가 미적 감각을 표현한 최초의 그래픽이라 할 수 있는 동굴 벽화부터 오늘날의 스마트폰 케이스에 이르기까지 생명력이 가장 긴 표현물이다. 아마도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장식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식은 인간의 본질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장식을 모더니스트들은 왜 범죄라고 낙인찍었을까? 그 출발점은 아돌프 로스의 <장식과 범죄>에 있다. 이 책에서 장식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자. 그 밖에 장식에 대해 언급한 여러 책을 통해 장식의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장식은 왜 죄인가?
<장식과 범죄>, 아돌프 로스 지음, 현미정 옮김, 소오건축 펴냄
〈장식과 범죄〉는 아돌프 로스가 각종 매체에 기고한 수십 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글은 1897년에 썼고 마지막 글은 1929년에 쓴 것이다. 한 권의 책에 무려 32년간 쓴 글이 수록된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글이 1908년에 발표한 ‘장식과 범죄’다. 수많은 주제의 글이 있지만 대체로 건축과 디자인에 대한 일관된 사상이 흐른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필요를 충족시킨 디자인의 충만함, 과시와 낭비적 디자인의 허구성, 소비주의에 대한 경고, 새로운 기술과 재료 이용에 대한 권장 등이 그것이다. 그의 주장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는 대단히 급진적인 것이었다. ‘장식과 범죄’라는 제목은 한 챕터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책 전체의 주제를 압축한다.
귀족의 과시 욕구에서 탄생한 가구
로스가 장식을 혐오한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과시적이라는 데 있다. 사람들은 왜 과시적인 물건을 좋아할까?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우는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가구는 모두 궁이나 귀족의 집 안에 놓여 있던 것인데, 주로 귀족들이 사용한 그런 물건은 칭송받고 후대까지 살아남아 가구의 본보기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구는 과시용이다. 즉 ‘부와 화려함, 예술 애호, 안목에 대한 증빙서류’라고나 할까? 로스는 이런 가구는 대개 ‘풍부한 장식으로 무장한 베짱이’ 같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귀족의 가구는 의심의 여지 없이 당연히 보존되고 모든 박물관의 자랑이자 기쁨으로 추앙받게 된 것이다. 반면 소박한 서민의 가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완전히 닳아빠질 때까지 사용되고 마침내는 땔감으로 아궁이에 들어가는 신세’가 됐다. 당연히 우리 눈에 띄는 것이 없으므로 가구의 본보기로서의 역할도 하지 못한다. 어찌 보면 서민의 가구는 그것을 사용한 사람들의 운명처럼 이름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귀족이 쓰던 가구는 위대한가? 로스는 그런 장식적 가구를 졸부 근성의 기호로 읽는다. 그리고 이런 가구의 차별과 기호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장식보다 형태와 재료
로스는 1898년에 발표한 ‘공예 전망 1’이라는 글에서 새로운 장식 예술의 방향을 제시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새로운 형태가 아니라 가장 좋은 형태를 완성할 것’. 책 전반에 걸쳐 로스는 미국과 영국의 공예를 우월한 것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공예를 저열한 것으로 평가한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공예는 화려함과 장식성으로 우쭐대고 속물적인 허식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본다.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이 추구하는 장식이란 체면과 유행을 좇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공예가 가르쳐준 것은 무엇인가? ‘올바른 형태, 견고한 재료, 정확한 제작’이다. 이런 비평은 그가 20대의 젊은 나이에 미국 시카고에서 겪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 당시 시카고는 이른바 ‘시카고학파’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건축양식이 탄생하고 있었다. 반면에 오스트리아로 돌아오자 그곳은 실용과는 거리가 먼 분리파(Secession), 즉 아르누보라는 화려한 양식이 지배하고 있었다.
장식은 양식을 낳고 양식은 폭군이 된다
1898년에 발표한 ‘로툰데의 인테리어’는 장식과 양식, 취향에 대해 언급한 글이다. 고전 양식, 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양식이라 하는 그 양식은 무엇인가? 많은 정의가 있겠지만 로스가 보기에는 당대 건축가와 디자이너에게 양식이란 단지 장식이다. 예를 들면 한 방에 있는 모든 가구에 사자 머리 장식이 있으면 그 방은 양식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은 불쌍한 소유주를 폭군처럼 휘두른다”라는 표현은 소유주가 양식의 통일에 강박증을 갖게 되고 정신적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디자이너가 소유주에게 제안한 집 안의 양식은 소유주로 하여금 끊임없이 의식적으로 조화를 추구하도록 강요한다. 양식은 무거운 짐이 되고 폭군처럼 군림하게 된다. 양식이 있는 방의 정신적 주인은 그 방을 구상한 건축가와 디자이너이고, 주인은 가엾게도 양식의 노예가 된다.
반면 양식을 모르는 몰취향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들의 방은 조화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식이 있는 방에는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가족의 내밀함이다. “가구마다, 물건마다, 모든 사물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집은 완성된 적이 없었다. 그 집은 우리와 함께 컸고 우리는 그 안에서 성장했다. 확실히 그 안에는 어떤 양식이 없었다. 즉 낯설거나 지나간 양식이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양식이 있었다. 그 거주인의 양식, 그 가족의 양식이.” 로스는 건축가의 양식 강요에 맞서 자신의 양식을 찾으라고 권유한다. “똑같은 사자 머리로 만들어진 양식이 아니라 어떤 취향으로 만들어진 양식. 한 인간의 몰취향이면 어떠하랴. 한 가족에 의해 좌우되고, 또 그에 따라 형성되는 양식 말이다.”
양식을 대표하는 것은 장식이 아니다. 장식 말고도 다른 요인이 있다. 문제는 가짜 건축가와 디자이너, 왕과 귀족을 흉내 내고 싶어 안달하는 졸부에게는 양식이 장식으로 인식된다. 장식은 취향을 낳는다. 취향은 욕구를 만들어낸다. 장식이라는 양식의 취향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폭군에게 휘둘리게 되는 것이다. 폭군은 다름 아닌 건축가와 디자이너의 과잉 의지가 낳은 것이다. 로스가 지목한 건축가는 바로 오토 바그너와 그의 제자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그리고 요제프 호프만이다. 그들은 모두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아르누보라고 할 수 있는 분리파 소속 건축가다. 분리파도 당시에는 매우 앞선 디자인 운동이었다. 하지만 로스는 분리파조차 극복해야 할 운동으로 볼 정도로 급진적인 건축가이자 이론가였다.
장식은 범죄다
이제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글 ‘장식과 범죄’를 살펴보자. 19세기 말부터 장식을 집중 공격한 로스는 1908년에 쓴 이 글에서 장식을 아예 범죄로까지 깎아내린다. 그는 장식을 모욕하려고 그것을 야만과 배설, 에로틱과 관련시킨다. 장식이란 파푸아인들이 얼굴과 피부에 하는 문신이다. 유럽의 문명인은 문신을 하지 않는다. 문신, 즉 장식은 야만의 기호다. 문명인의 문신은 대개 감옥에 있는 범죄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 범죄자가 아닌데 문신을 한 경우는 인격 파탄의 귀족이다. 장식을 에로틱과 연관 짓는 대목은 흥미롭다. 인류의 첫 번째 예술 행위는 자신의 배설물을 벽에 발라 남녀의 성관계를 묘사했다는 것이다. 장식이란 에로틱의 표현으로 발생했다. 장식에 대한 이런 해석은 약간 억지스럽다. 사실 이 해석에는 어떤 논리적 개연성도 없다. 단지 장식에 대한 로스의 극단적인 혐오를 드러낼 뿐이다. 아무튼 이렇게 결론짓고 싶었던 모양이다. “문화의 진화는 일상용품에서 장식을 멀리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초반부의 장식 비평은 다소 격앙된 어조를 띠지만, 그다음부터는 좀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댄다. 장식은 ‘인간의 노동, 돈, 그리고 재료를 망쳐버리는 국민경제에 대한 범죄’라는 것이다. 단순하고도 명징한 논리로써 장식을 하는 만큼 인간의 노동력과 재료가 낭비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장식을 하지 않으면 노동 시간과 저렴한 가격 등 다양한 이익을 낳는다.
‘장식과 범죄’에서 로스가 말한 ‘장식은 곧 범죄’라는 비평은 특수한 환경, 즉 20세기 초 아르누보가 유행한 오스트리아 빈이라는 시간적, 지역적 맥락 아래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가 비판한 것은 장식 행위 자체라기보다 장식을 과시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귀족과 졸부, 그리고 그들의 욕망을 이용해 자신의 건축적 야망을 실현하려는 건축가의 허영으로 가득 찬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천박한 정신세계를 장식이라는 상징으로 압축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들 모두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요구와 새로운 기술, 그리고 로스가 디자인의 본질이라고 여긴 형태와 구조, 기능, 재료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사람들이었다. 로스는 장식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합목적성, 기능성, 재료의 정직성이라고 하는 모더니즘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장식은 볼품없는 품질의 가면
<오늘날의 장식 예술>, 르코르뷔지에 지음, 이관석 옮김, 동녁 펴냄
르코르뷔지에는 아돌프 로스의 후예다. 로스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장식을 맹렬히 공격했다면 모더니즘이 본격화된 1920년대에 장식이라는 우상을 파괴한 전사가 바로 르코르뷔지에다. 르코르뷔지에는 1925년에 출간한 〈오늘날의 장식 예술〉에서 장식을 ‘성상 숭배’라 정의한다. 이는 암처럼 전염성이 강한 병이다. 그는 새로운 세대의 건축가는 이 성상 파괴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르코르뷔지에는 로스가 지적하지 않은 장식의 범죄에 대해 언급한다. 그것은 장식이 물건의 결점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가상의 사업가가 한 고백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정말로 나는 겨우 조건에 맞는 가격으로 싸구려 물건만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장식이 나를 구원할 것이다. 모든 것을 장식으로 덮자. 이 싸구려 물건을 장식 아래에 숨기자. 장식은 결함을, 흠을, 모든 단점을 감춰준다.”
르코르뷔지에는 로스의 주장과 반대로 장식은 제품의 가격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싸구려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업 기계가 장식을 싸게 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장식된 물품이 드물고 비쌌다. 오늘날 그것은 흔하고 값싸다.” 로스에게 장식이 과시적 자랑이라면 르코르뷔지에에게 장식은 형편없는 품질의 변장술이다. 만약 장식이 없는 물건이라면 그 물건의 형태와 구조, 재료에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다. “고급스러운 물품은 잘 만들어지고, 적절하고 깨끗하며, 순수하고 건강하고, 벌거벗음으로써 잘 제조되었음을 드러낸다.” 르코르뷔지에는 장식이라는 위장술을 버리고, 즉 구조로부터 장식을 분리하고 재료 자체의 성질을 드러내고 당당하게 단순함으로 나아가라고 당대 건축가들에게 조언한다.
참을 수 없는 장식의 유혹
<바이 디자인>, 데얀 수직 지음, 이재경 옮김, 홍시 펴냄
런던 디자인 미술관 관장 데얀 수직은 현대 디자이너들이 장식을 대하는 이중적 태도에 대해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다. 수공예 시대의 장식은 공예가의 사인과도 같았다. 자신만의 특별한 장식으로 개성이라는 흔적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계 생산은 제품과 공예가가 맺는 그런 개인적 표현의 연결을 끊어버렸다. 20세기에 이르러 모더니스트들은 장식의 의미를 더욱 밀어붙여 아예 장식의 제거를 개인의 흔적으로 여겼다. 나는 장식하지 않기 때문에 급진적이며 현대적인 디자이너라는 식이다. 아돌프 로스와 르코르뷔지에의 유산이다. 하지만 장식을 완전히 지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예를 들어 리처드 로저스와 렌초 피아노가 디자인한 퐁피두 미술관은 배관 파이프가 건물 밖으로 노출되어 있다. 이 파이프는 화려하게 채색되는데, 이는 장식처럼 보인다. 이를 숨기려고 그들은 채색의 기능주의적 변명을 부여했다. “두 사람은 엔지니어링에서 관행적으로 쓰는 렌더링 원칙을 응용했다. 수도관은 초록색, 전선은 노란색 등등. 덕트와 파이프를 이런 식으로 칠해봐야 실용적인 효과는 전혀 없다. 파이프에 꽃이나 구름을 그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고의적 덧붙임이다.” 기능주의적 구실을 부여하고 변명해봐야 결국 이 채색은 장식이라는 뜻이다.
로스는 장식이 사라지려면 수천 년이 걸릴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런데 오늘날 스마트폰을 비롯해 거의 모든 제품이 아무런 패턴 없이 출시되는 걸 보면 그의 꿈은 이루어진 듯 보인다. 하지만 소비자는 장식 없이 매끈한 표면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오늘날 전 세계에 수많은 장식 케이스가 존재하고 엄청난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어디 그뿐인가. 문명인은 문신하지 않는다는 로스의 견해와 달리 요즘 유럽의 문명인은 야만인처럼 몸에 문신하는 걸 즐긴다. 게다가 자신의 책상과 자동차 안, 가방을 온갖 장식물로 도배하다시피 한다. “몸뿐 아니라 소유물에도 문신하는 셈이다. 이 현상은 장식에 대한 인간의 마르지 않는 갈증을 보여준다. 소유물과 주변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것, 그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보다.” 장식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