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디자인 & 마케팅 최소현 부문장
질문하는 디자이너
디자이너는 흔히 솔루션, 달리 말해 답을 찾는 사람으로 여겨지곤 했다. 클라이언트나 브랜드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디자이너를 설명하는 필요충분조건인지는 미지수다. 특히 테크놀로지가 신속하게 답을 찾아주는 세상에선 이런 의구심이 증폭된다. 어쩌면 오늘날 디자이너의 역할은 답을 찾는 사람이 아닌, 질문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20년간 이끌던 크리에이티브 컨설팅 그룹 퍼셉션을 뒤로하고 네이버에 합류한 최소현 부문장은 여기에 ‘예스’라고 답한다.
20년 만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다
20년간 이끌던 퍼셉션 대표 자리를 내려놓고 지난해 말 네이버의 디자인 & 마케팅 부문장으로 합류했습니다.
시작은 지난해 1월이었습니다. 벤처 캐피털 TBT의 이람 대표(*)가 점심 식사 자리를 제안했어요. 이런저런 근황을 나누다 대뜸 “사업이 뭐라고 생각해요?”라고 묻더군요. 사실 그게 제가 제일 어려워하는 질문이거든요. 디자인을 하거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꽤 자신이 있는데 사업은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꾸준하게 성과를 내고, 수익률을 높이고, 구성원을 성장시키는 것, 이 부분에서 늘 ‘내가 과연 좋은 사업가인가?’라는 회의가 있었어요. 그다음 질문이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요?”였습니다. 순간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 들더군요. 대기업 전사 경력·신입 교육을 맡아 개인의 브랜딩과 삶의 방향과 지향점, 커리어에 대한 특강을 수없이 했으면서 정작 자신에겐 그 질문을 한 적이 없었던 거예요. 그냥 주어진 하루를 열심히 살던 사람이었으니까. 순간 멍해 있던 제게 자리를 제안하면서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더군요. 사실 제안을 받고 열 달 정도 도망 다녔던 것 같아요.(웃음) 그만큼 어려운 결정이었죠.
(*)국내 서비스 기획자로 입지전적 인물이다. 싸이월드 미니홈피, 네이버 블로그, 카페 등 네이버의 대표 서비스를 기획했고 캠프모바일 대표를 지냈다.
확실히 한 회사의 수장이 아닌 조직의 일원으로 합류할 때는 꽤 큰 용단이 필요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퍼셉션이 좀 더 건강한 조직으로 남길 바랐습니다. 창업자가 기력이 떨어지면 회사가 함께 사라지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드러나는 회사, 내가 없어지면 같이 사그라드는 회사보단 탄탄한 프로세스와 방법론이 견인해 롱런하는 회사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제 이직은 실제 이러한 이상이 작동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이를 위해 지난해 4월부터 퍼셉션의 실장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저와 조직을 분리하는 준비를 했죠. 퍼셉션뿐 아니라 제게도 전환점이 필요했어요. 저는 늘 성장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더 잘하고 싶고, 더 배우고 싶어 하죠. 네이버는 제 성장을 위해 적절한 조직이라고 생각했어요. 현재 네이버는 AI, 로봇, 클라우드 등 융합 기술을 필두로 격변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젊은 경영진을 주축으로 진화하는 네이버에 내가 뭔가 기여할 게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합류 후 1년이 조금 안 된 현시점에서 하나둘 가시적 결과물이 나오고 있는 것 같은데요.
얼마 전 PC 화면 개편을 마쳤고 현재는 앱 개편을 순차적으로 진행 중입니다. 거의 전 국민이 사용하는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다 보니 한번에 모든 것을 바꾸는 것에는 무리가 있어요. 여러 측면에서 진화된 방향으로 모색 중인데 내년 상반기에는 의미 있는 변화를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대화를 통해 답변을 찾아주는 네이버의 AI 검색 ‘Cue:’, 쇼트폼 서비스 ‘클립’ 등 새롭게 선보이는 서비스는 브랜드 담당 구성원들과 네이밍부터 함께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제겐 중앙 조직 차원에서 전략을 짜고 디자인을 책임지는 것만큼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현재 네이버에 근무하는 디자이너만 580여 명이고, 분야 또한 다양합니다. UX·UI뿐 아니라 브랜드, 로봇을 비롯한 다양한 하드웨어, 공간과 건축 등을 맡고 있는 디자이너도 있죠. 각 분야를 훌륭히 리드하고 있는 디자인 디렉터가 여럿 있고요. 따라서 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일종의 허브가 되어 자칫 약해질 수 있는 서비스 간 연결 고리를 단단하게 엮어주는 것입니다.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협의해 조율하고 사용성을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죠. 또 발목을 잡는 규제나 구속이 아닌, 각 서비스의 디자이너들이 좀 더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주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도 제 일입니다.
AI시대 속 네이버 디자인의 화두
디지털 환경은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죠. 이런 변화 속에서 현재 네이버가 디자인 측면에서 가장 주력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AI 시대를 마주하고 있는 디자이너의 고민은 크게 둘로 나눠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사용자의 서비스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또 하나는 디자이너의 일이 어떻게 바뀔지입니다. 후자는 인간 디자이너의 새로운 역할, 책임과 결부된 문제죠. 어찌 보면 지금도 고민의 과정에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담론화하고 메시지를 모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조직에는 시나리오만 쓰는 디자이너도 있는데, 지금과 다른 형태로 일하게 될 환경에서 어떻게 네이버가 디자인 리더십을 가져갈 수 있을지 내부적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8월에 열린 콘퍼런스 ‘DAN 23’도 같은 고민의 산물인가요?
‘DAN 23’은 네이버에 합류하자마자 제게 떨어진 큰 숙제였습니다. 이전에도 개발자 중심의 콘퍼런스 ‘DEVIEW’, 디자인 조직들이 주축이 된 디자인 콜로키움 등 다양한 콘퍼런스를 기획하고 선보였지만 사업, 기술, 디자인을 한데 엮은 통합 콘퍼런스는 창사 이래 처음이었습니다. 네이버는 단순한 포털 서비스가 아닌 ‘모두를 위한 기술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죠. 우리가 앉아서 이야기 나누고 있는 이곳 네이버 1784(제2 사옥)에도 이러한 생각이 반영되어 있고요. 네이버는 선도적으로 많은 실험을 해왔는데 이걸 다양한 사람들에게 충분히 알리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DAN 23’을 열게 된 배경입니다. 창업자가 DNA와 토양을 만든다면 바통을 이어받는 경영진은 시대마다 근육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구성원이 혈류를 만들고요. 한 몸으로서 팀 네이버의 동력 전체를 하나의 메시지로 집결시켜 힘 있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브랜드 경험 설계 전문가인 만큼 콘퍼런스의 기획 역시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청중이 누구인지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투자자부터 각종 파트너사, 네이버 입사를 희망하는 구직자, 내부 구성원까지. ‘네이버와 무언가 함께 해보고 싶은 사람들’이라는 공통 분모가 있지만 타깃을 하나로 좁히는 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1500명을 수용하는 메인 스테이지 외에 투자자 라운지, 광고주 대상 파트너 라운지, AI 얼라이언스 기업 및 스타트업 라운지 등 다양한 팀들이 네트워킹할 수 있는 장소를 함께 제공했어요. 또한 추진 배경과 맞물려 팀 네이버 전체의 힘을 온·오프라인상에서 어떻게 전달할지에도 초점을 맞췄습니다. 현장을 찾은 이들에게 물리적 실재감으로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고, 굿즈 하나를 만들어도 타당한 이유 없이 만들지 않았어요. 또 종료와 함께 휘발되는 행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콘퍼런스 경험 설계를 행사 전, 중, 후로 나눠 각 이해관계자의 고객 여정을 디자인했죠. 행사를 티징하는 콘텐츠나 심지어 주주 서한에도 이런 생각과 고민이 녹아 있습니다.
요즘 익스터널 브랜딩 못지않게 인터널 브랜딩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콘퍼런스를 통해 외부인뿐 아니라 구성원에게도 팀 네이버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을 것 같은데요.
구성원들은 대부분 온라인 생방송으로 콘퍼런스 시청을 했는데, 사전 공지는 물론 사내 커뮤니케이션을 맡은 팀이 행사 중간중간 이벤트를 통해 관심을 유도했습니다. 콘퍼런스 이후에는 전사 대상의 사내 소통 행사인 컴패니언 데이를 통해 경영진과 구성원이 그날 나누었던 주제에 관해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가졌고요. 준비하면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행사 기획 당사자뿐 아니라 조직 전체에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어떤 동기를 마련해준 것 같습니다.
올바른 균형 감각을 요구하는 현대의 디자인
직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죠. 과거 디자인센터장, 디자인 총괄 등으로 불린 자리이죠. 흥미로운 것은 디자인과 마케팅을 아우른다는 것입니다. 이걸 디자인 속성의 변화로 보아도 무방할까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고 해야겠네요. 저는 사실 학부생 시절부터 마케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마 당시 디자인과 학생 중 저만큼 경영학과의 마케팅 수업을 열심히 들은 사람도 없었을 거예요.(웃음) 저는 디자인은 태생부터 마케팅, 비즈니스와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문화로서의 디자인도 간과해선 안 되지만. 분명한 건 디자인을 바라보는 시각에 어떠한 변화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산업에 도움을 주는 동력으로서 용도의 미를 추구하는 무언가 정도로 여겼지만, 이제는 조형성을 넘어 우리 삶 전반에 녹아 있는 것으로 넓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등장했죠. 아직 이런 인식이 보편화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런 사람들도 생겼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죠. 어찌 됐거나 오늘날 디자인에 대한 해석은 천차만별입니다. 누군가는 디자이너를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문제 해결자라고 말하죠. 여전히 기준과 해석이 분분하지만 저는 그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디자인의 특정 부분을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봅니다. 똑같이 디자이너라고 불러도 개인의 성향이나 기질, 경험에 따라 성장하는 곡선은 다 달라지는 것 같아요.
테크 기업이 바라보는 디자인이란?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바꿔보죠. 빅테크 기업을 꿈꾸는 네이버가 바라보는 디자인은 무엇인가요?
어느 기업이나 고유의 기술과 제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사용자와 직접 만나지 않아요. 다시 말해 기술과 사용자의 중간에서 다양한 경험 접점을 만들어주는 것이 디자인과 마케팅이라고 봅니다. 제가 두 역할을 함께 감당하는 이유에 대한 답일 수도 있겠네요. 결국 디자인과 마케팅의 공통점은 기획부터 관여해 사용자가 기술과 서비스를 더 잘 인지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연결자 내지 촉진자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관점은 최소현 부문장 본인의 기질과도 맞닿아 있다고 보입니다.
맞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과제를 할 때도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 않았어요. 말과 글로 생각이 정리되면서 동시에 그림이 그려지더군요. 이런 성향이 회사로 반영된 게 퍼셉션이었습니다. 단어 그대로 그림을 활용하든 글을 활용하든 누군가의 인식(perception)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은 이름이죠. 각기 다른 크리에이티브를 가진 장인들이 모여 디자인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긍정적 기여를 하는 곳이 바로 퍼셉션이었습니다. 방식은 다양합니다. 못생긴 걸 아름답게 바꿔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지만, 복잡한 프로세스를 간소화하는 것 자체가 솔루션이 되기도 하죠.
이야기를 들어보니 굉장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으로 디자인에 접근한다고 느껴지네요. 디자인을 창작과 영감의 선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썩 달갑지 않은 생각 같은데요?(웃음)
글쎄요. 사람은 우뇌와 좌뇌가 함께 움직이죠. 감성과 논리 어느 한쪽으로만 디자인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예전에 작가 활동을 하는 친구의 전시 오프닝에 초대된 적이 있는데, 그때 속없이 “너는 좋겠다. 클라이언트 없이 네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면 되니까”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친구가 뭐라고 답했는지 아세요? “너는 내가 내 방에 걸어두려고 그림을 그리는 줄 아니?” 라고 하더군요.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순수 예술 작가도 자신의 그림을 사줄 사람을 살피고, 분석하고, 그러면서 너무 자본의 논리로만 움직이지 않으려고 균형점도 찾고 그런다는 것이죠. 디자인은 오롯이 번뜩이는 영감으로만 완성될 것 같지만 사실 디자이너들도 모두 예전부터 어떤 데이터를 살펴봤다고 생각해요. 그때는 지금처럼 데이터 기술이 고도화되지 않았을 뿐이죠.
하지만 저는 반대로 지나치게 데이터에 의존하는 현상 또한 위험한 것 같습니다.
이해는 합니다. 디자인 영역에 한 가지 답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소신 있게 디자인했어도 뒤집히는 경우가 너무 많죠. 의사 결정 체계도 이러한 경향을 일정 부분 부추깁니다. 전문가든 비전문가든 무언가를 선택할 때 어느 정도는 자기 취향이 발동할 수밖에 없기에 정작 가장 많이 고민한 디자이너의 안이 선택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거든요. 그런데 데이터를 가져가면 많은 경우 통과가 되니까. 디자이너 본인에게도 심리적 보험이 되고요. 하지만 이게 과해져 데이터를 맹신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 같아요. 저 같은 청개구리들은 ‘그래서 다 똑같은 디자인이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오늘날 UX·UI의 스탠더드가 마련되었죠. 그런데 데이터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어제의 것일 수밖에 없잖아요? 데이터를 들여다볼 필요는 있지만 여기에 지나치게 매여 있다 보면 내일의 디자인을 만들 수가 없죠.
터널 비전을 방지하는 방법은?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요?
결국 내가 무엇을 알고 싶은지 자각하고 있어야 해요. 질문의 가치는 여기서도 발동합니다. 데이터 설계자 옆에 붙어서 내가 진짜 궁금한 것을 물어봐야 하죠. 자기가 궁금한 걸 얻어내는 경험이 부재하다 보니 데이터에 의존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저 진짜 질문 성애자거든요.(웃음) 자꾸 이상한 질문을 던져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특히 디지털 기반의 디자이너들은 화면 안에 갇히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늘 사용자를 위해 디자인한다고 말해요. 그런데 사용자는 몸이라는 물성을 갖고 물리적 환경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자신이 하는 일에 드라이브를 걸지 않으면 숫자와 화면에 매몰되어서 진짜 삶과 유리되어버립니다.
아무래도 리더 역할은 실무보다는 조직의 방향성을 알맞게 제시하고, 조직 문화를 형성하는 데에 있다고 봅니다. 최소현 부문장 부임 후 리디자인한 조직 문화가 있나요?
합류 후 디자이너들을 관찰하니 정말 다 모범생이더군요.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또 없을 겁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모범생이기에 오답을 두려워한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주변을 배려해 엉뚱하고 다소 어리석어 보이는 질문은 되도록 자제하는 것 같았고요. 저는 이걸 좀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더 많이 묻고, 더 편하게 틀려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싶어요. 디자인의 역할은 양질의 서비스와 프로덕트를 설계하는 데에만 있지 않아요. 아이데오의 워크숍처럼 여러 비즈니스 영역에서 혹은 조직 문화 안에서 동력을 생산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산하고, 시나리오를 그릴 수 있는 것이 디자인이죠. 그런 문화를 만드는 단계에 있다고 봐주세요.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줄 수 있나요?
저는 네이버가 국내에서 인터널 브랜딩을 정말 진심으로 잘하는 회사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회사의 철학을 체화하는 게 인터널 브랜딩의 목적인데 제가 오기 전부터 이미 조직의 철학과 지향점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내부 구성원들과 소통하고 있었어요. 이게 정말 대단한 건데 역시나 모범생답게 자기 입으로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웃음) 저는 이런 것을 밖으로 꺼내어 보여주려고 노력 중입니다. 잘한 것을 잘했다고 인정해주는 문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실제로 네이버 코드 (code.naver.com)라는 플랫폼에 접속해보면 다양한 부서에서 활동 중인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데 그 자체가 일종의 동기부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밖에 코드데이라는 내부 행사를 통해 신입, 리더, 임원 할 것 없이 모두가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해 스스로 문제를 정의해보는 열린 조직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디자인 리더의 소양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네요.
저는 리더의 역할과 소양을 굳이 한 가지로 국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너럴리스트가 될 수도, 스페셜리스트가 될 수도, 퍼실리테이터가 될 수도 있죠. 어떤 역할을 지향하는지는 개인의 선택에 달렸어요.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관통하는 한 가지 소양은 있다고 봅니다. 제가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읽은 건데 ‘lead’라는 단어가 인도유럽어인 ‘leith’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우리말로 ‘문지방을 넘는다’는 뜻입니다. 즉 리더는 문턱(경계)을 넘어갈 힘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른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용감하게 앞서 나아가야 하죠.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도 용기라고 보고요. 무엇보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다고 말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요즘 리더 혹은 관리자 사이에서 마이크로 매니징이 이슈인데 그 자체가 나쁜 게 아닙니다. 마이크로 매니징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게 문제이죠.
하지만 문제는 많은 리더들이 그걸 구분 못 한다는 데에 있지 않나요?(웃음)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도, 구성원에게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과 목표가 뭐지?’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맞나?’ 이런 것들을 점검해야 하죠. 질문은 전체적 맥락을 판단할 힘을 줍니다.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언제나 투명하고 솔직한 소통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시아 최대 규모 데이터센터의 정체
화제를 바꿔보죠. 11월 중에 세종시에 아시아 최대 규모의 데이터센터를 오픈한다고 들었습니다.
일명 ‘각’이라고 부릅니다. 10년 전 춘천 구봉산 자락에 ‘각 춘천’을 오픈한 데 이어 올해에는 ‘각 세종’이 완공을 앞두고 있죠. 여기서 ‘각’은 장경각에서 따왔는데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우리 건축의 사에서 영감을 받아 고객들의 데이터와 수없이 많은 유산을 기록하고 보관하며 미래를 만들자는 취지가 담겨 있습니다. 장경각이 유구한 세월 동안 〈팔만대장경〉을 보존하도록 하기 위해 건축양식이나 통풍 등을 감안해 설계했듯이 자연의 지혜를 기술을 통해 자연스럽게 건축에 녹여냈습니다. 네이버의 모든 건물이 국제적인 친환경 건축 인증 제도인 LEED의 플래티넘 등급을 받았는데 오픈을 앞둔 각 세종 역시 그에 준하는 친환경 건축물입니다.
네이버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리고 디자인계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네이버는 국내 디자인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미쳐왔습니다. 그 영향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군요.
1990년대 후반 서비스를 시작한 네이버는 2000년대 중반 통합적 디자인 전략과 브랜딩으로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었습니다. 게다가 거의 전 국민이 쓰는 서비스이다 보니 영향력은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에 들어 네이버는 조형성보다 서비스의 본질에 좀 더 집중하게 됐습니다. 얼핏 보기에 예전보다 디자인의 힘이 떨어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때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아주 섬세하게 디자인의 영향력을 녹여냈습니다
네이버가 추구하는 것은 적정 디자인입니다. 화려한 기교보다 적재적소에 필요한 디자인을 하려고 하죠. 현재는 각양각색의 기술과 접목했을 때 디자인이 어떻게 영향력을 펼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중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에요. 네이버에서 현재 시도 중인 다양한 첨단 기술은 완성형이 아닌 과정 중에 있으니까요. 제가 합류하기 이전 해에 열린 디자인 콜로키움에서 이런 실험을 발표했고 그 이후 어마어마한 피드백을 받았다고 해요. 몰랐던 디자인 영역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의견부터 새로운 영역에 도전할 용기를 주었다는 젊은 디자이너의 이야기까지, 이 모든 게 네이버가 현재 국내 디자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한 강연에서 브랜드 경험을 설계하는 것은 인생 설계를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문득 20대 중반이 된 네이버의 인생 설계가 궁금해지네요.
네이버가 내년에 25주년을 맞이합니다. 개인적으로 20주년이 갓 성인이 되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라면 25주년은 사회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급변하는 기술이나 시대 상황을 볼 때 ‘진짜 험난한 사회로 나아가는 중이구나’라고 체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버티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고, 지금은 이를 잘 견디기 위해 우리의 코어를 단련하는 중이라고 봐요. 그간 수많은 국내외 경쟁자들과 부딪히면서 버텨온 내성이 있기 때문에 25살이 넘은 네이버도 충분히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