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풍광과 독립 영화의 천진함을 담다, 2025 선댄스 영화제 아이덴티티
선댄스 영화제는 전 세계 독립 영화인들의 꿈의 무대다. 올해 영화제의 아이덴티티 디지인은 슬기와 민이 맡았다.

1985년에 시작한 선댄스 영화제는 규모와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의 독립 영화제다. 전 세계 독립 영화인들의 꿈의 무대로 불리지만 첫 무대는 지금과 달리 다소 소박했다. 유타주의 작은 도시에서 겨울마다 열리던 이름 없는 영화제에 배우 겸 감독인 로버트 레드퍼드가 관심을 가진 게 시작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영화제를 후원해오던 그는 행사의 규모와 위상을 키운 끝에 지금의 선댄스 영화제를 탄생시켰다. 4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행사 마지막 날 로버트 레드퍼드가 영화인들을 직접 맞이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한편 설립 이래 줄곧 고수해온 관례가 또 하나 있으니, 바로 해마다 다른 디자이너들의 손을 빌려 영화제 아이덴티티를 새롭게 탈바꿈하는 것이다. 매년 수십 편의 작품을 새롭게 선보이는 영화제의 성격을 고려해 행사 성격을 규정짓지 않고 번번이 다른 모습으로 거듭나려는 의도다. 2023년 처음으로 ‘만년 아이덴티티 시스템(evergreen system)’1을 도입했지만, 최소한의 시각적 규칙을 제외한 모든 아이덴티티를 매해 쇄신하는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올해 선댄스 영화제의 아이덴티티 디자인은 슬기와 민이 맡았다.
- 개별 연도를 초월하는 전체 아이덴티티 시스템. 2023년 포르투 로샤Porto Rocha가 디자인했다. ↩︎

팬데믹 이후 본격적인 오프라인 행사를 재개하는 자리인 만큼 디자이너는 선댄스 영화제를 개최하는 지역의 장소성에 주목했다. 영화제가 열리는 유타주의 파크시티Park City는 높은 산세와 독특한 호수 풍경으로 잘 알려진 도시다. 슬기와 민은 이와 같은 지역의 지리적 특징에 착안해 유타주 풍경을 연상케 하는 전용 서체 시리즈 ‘선댄스케이프sundanscape’를 개발했다. 기본 서체의 하단을 장식한 4개의 독특한 밑줄은 각각 구름, 산, 빌딩, 호수를 의미한다. 전용 서체로 글을 적으면 파크시티의 풍경이 저절로 그려지는 셈이다. 한편 만화 같은 밑줄 형태와 일정한 글자 너비가 자아내는 불규칙한 질감은 언뜻 천진한 인상을 풍기는데, 여기에는 ‘독립 영화제 특유의 호기심 어린 감수성을 다시금 북돋우고 싶었다’는 슬기와 민의 의도가 투영되어 있다.


서체 배경에 중첩된 그래픽 요소도 눈여겨볼 점이다. 언뜻 불규칙한 추상 패턴처럼 보이는 그래픽 이미지는 역대 선댄스 영화제 수상작 속 장면에서 일일이 추출했다. 영화제의 장소적 맥락과 시간적 흐름을 아우르며 아이덴티티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시도다. 모든 그래픽 요소는 각각 네 가지 보조 색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년 아이덴티티 시스템의 컬러 팔레트를 참고하되, 원색에 가까운 주색에 파스텔 톤의 보조색을 중첩해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인상을 구현해낸 전략이 돋보인다. 슬기와 민은 기존 시각언어에 대한 존중을 기저에 두면서도 올해 영화제만의 색깔을 드러내야 하는 두 가지 과업을 능숙히 완수했다. 이들의 손길을 거쳐 새롭게 탈바꿈한 올해 선댄스 영화제의 아이덴티티 디자인은 시간과 장소, 역사와 문화를 촘촘히 엮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디자인이다.



Interview

최슬기, 최성민
슬기와 민 공동대표
선댄스 영화제의 아이덴티티는 매년 다른 디자이너가 디자인하는 게 특징이다. 북미 독립 영화계를 대표하는 대규모 행사인 만큼 부담감도 컸을 텐데.
이 정도로 규모가 큰 영화 프로젝트를 맡은 건 처음이었다. 진행 속도가 빠른 것은 물론이고 작업 범위나 심도 면에서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만년 아이덴티티 시스템의 틀을 지키며 영화제의 연속성을 확보하면서도 올해 행사만의 개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슬기와 민의 사적인 목소리도 녹여낼 수 있었기 때문에 보람이 컸다. 선댄스 재단 크리에이티브팀과 밀접히 협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댄스 영화제의 과거 수상작에서 그래픽 이미지 요소를 추출한 이유가 궁금하다.
선댄스 영화제는 우리가 어릴 때 감명 깊게 본 영화를 여럿 배출했다. 코엔 형제, 거스 밴 샌트, 쿠엔틴 타란티노 등 오늘날 거장으로 불리는 감독들도 한때는 모두 ‘선댄스 키드’였다. 영화제를 통해 발굴한 의미 있는 작품들을 기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저작권 이슈로 영화 스틸 이미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역대 수상작 스틸 이미지 중 아주 작은 일부분을 잘라낸 뒤 이를 크게 확대하고 가공해 그래픽 요소를 디자인했다. 그렇게 만든 그래픽 이미지를 타이포그래피와 중첩해 풍부한 색상 효과와 시각적 깊이감을 이끌어냈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그래픽 이미지가 유타주의 독특한 지질학적 풍경을 닮아 있는 것은 뜻밖의 우연이다.
영화제의 헤리티지와 동시대성을 동시에 보여주어야 하는 숙제를 어떻게 풀고자 했나?
헤리티지를 드러내는 데 천착하진 않았다. 다만 역대 수상작에 기초한 그래픽 요소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디자인 안팎의 이야기를 굳이 노출하지 않고도 대중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게 우리가 가진 미신 같은 믿음이다. 동시대성도 마찬가지다. 역설적이지만 우리에게 ‘동시대성’이라는 단어는 ‘관리된 시대 착오성’의 다른 말처럼 느껴진다. 매 프로젝트마다 동시대성을 의식하지만, 또렷이 지향한다고 해서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익숙함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해 매번 최선을 다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