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마법♥/Mabeob M/Magie〉전
부산에 상륙한 기호의 탐구자
그래픽 디자인 듀오 M/M 파리가 〈사랑/마법♥/Mabeob M/Magie〉전을 위해 부산을 찾았다.

사물은 결코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 문화적 약속에 기초한 도상과 은유, 기호와 상징으로 가득 찬 곳이 바로 현실 세계다. 프랑스의 그래픽 디자인 듀오 M/M 파리M/M Paris는 오래전부터 이 지점에 천착해 탐구와 실험을 거듭해왔다. 매체와 장르를 자유자재로 오가면서도 M/M 파리만의 디자인 문법을 구축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덕분이다.
지금 부산의 복합 문화 공간 F1963에서 열리고 있는 〈사랑/마법♥/Mabeob M/Magie〉전은 이 부지런한 두 거장의 창작 세계를 ‘기호’라는 무형의 개념으로 엮어내는 자리다. 전시의 핵심 키워드는 ‘마법’. 이를 타로 카드라는 사물을 통해 가시화했다. M/M 파리는 주술 도구가 아닌 디자인된 사물로 타로 카드를 바라본다. 78장의 타로 카드를 재해석한 대형 공간 설치로 마법이라는 개념을 시공간으로 확장했다.

타로 카드 내 모든 무늬는 격자 시스템을 벗어나지 않는데, 이는 중립성과 보편성을 강조한 모더니즘 미학에 대한 오마주다. 그러나 그리드가 내포한 의미를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은 아니다. 모더니즘 디자인이 합리적인 체계를 통해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면, M/M 파리는 이 시스템을 타로라는 비논리적이고 모호한 대상에 적용하며 변주를 꾀한다. 단일하고 명확한 것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것의 가치에 주목하는 M/M 파리의 작업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에서 이해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전시를 구성하는 또 다른 축은 도시에 대한 탐구다. 전시가 열리는 도시와 공간의 성격을 고려해 기존 작품을 새롭게 구성하는 건 M/M 파리가 이전부터 선보여온 전시 방식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M/M 파리가 부산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신작을 소개한다. 전시장 초입에는 M/M 파리의 알파벳 서체 드로잉을 적용한 대형 스툴 ‘B.U.S.A.N’을 설치했고, 산란하는 빛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홀로그램 타로 카드 설치 작업은 작가들이 부산 바다에서 받은 영감을 환기한 것이다.
이 외에도 M/M 파리의 여정을 되짚어볼 수 있는 200여 점의 아트 포스터, 그들이 디자인한 무대 세트를 살펴볼 수 있는 오페라 〈안티고네〉 영상까지, M/M 파리가 새롭게 배열하고 조합한 30여 년 치의 아카이브가 공간 곳곳을 풍성하게 메운다. 이번 전시를 위해 부산을 찾은 M/M 파리의 마티아스 오귀스티니아크Mathias Augustyniak와 미카엘 암잘라그 Michael Amzalag를 만나 전시 안팎의 이야기를 자세히 나눴다.
Interview

처음 스튜디오 문을 연 게 1992년이다. 디자이너로서 첫발을 내딛은 순간을 기억하나?
오귀스티니아크 지금과 사뭇 다른 시대였다. 우리가 디자이너로 데뷔할 당시에는 말 그대로 새로운 세상에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가능성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던 때라 당장이라도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픽 디자인 전시 같은 실험적인 시도가 가능해진 것도 그 즈음부터였다. 바깥세상의 변화도 흥미로웠다. 디지털 기술이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큰 꿈을 꿀 수 있었다. ‘2000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따위의 순진한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다. 그게 우리가 스튜디오를 차린 배경이었다. 지극히 유토피아적인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출발점에 선 기분이 충만한 시절이었다.
그간 수많은 브랜드 및 아티스트와 협업했다. 파트너를 선정하는 기준이 있나?
암잘라그 우리는 전 세계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협업 제안을 받는다. 규모도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중요하게 보는 것은 딱 하나, 대화가 가능한지 여부다. 달리 말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공감하고 창의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최근 바이레도의 조향사 벤 고햄, 패션 디자이너 조너선 앤더슨과의 협업이 아주 재밌었다. 깊이 있는 대화가 바탕이 되었기에 결과물의 수준도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러니 늘 같은 원칙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 대화가 흥미롭고 자극이 될 때 비로소 우리답게 일할 수 있다.
전시는 M/M 파리에게 유독 친숙한 매체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전시가 아니더라도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작업을 선보일 수 있는 매체는 많을 텐데.
오귀스티니아크 그래픽 디자이너는 태생적으로 ‘즉각적인 존재’다. 이 직업의 리듬 자체가 그렇다. 시의성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이고 반응한다. 묻고 답하기의 연속이다. 우리도 이런 빠른 리듬과 호흡을 즐기지만, 때로는 좀 더 차분하고 심도 있게 작업을 바라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런 면에서 전시라는 매체는 우리에게 굉장히 소중하다. 화이트 큐브는 시공간의 흐름에서 비켜나 있는 공간이고, 우리는 그곳에서 과거의 작업을 재배치하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스튜디오 초창기부터 전시에 대한 깊은 신념이 있었다. 스스로의 작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전시라는 매체를 거쳐야 하고, 그래야 관객 역시 우리의 작품을 새로운 눈으로 봐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면에서 지금 부산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도 마찬가지다.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30년 전에 구성했던 전시와 다르지 않다. 매번 새로운 탈을 쓴 ‘같은 전시’라고 할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이번 부산 전시의 개최 배경도 이야기해달라. 기획 단계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고 들었다.
오귀스티니아크 이번 전시는 오랜 협업 파트너인 크리스티나 강 덕분에 시작되었다. 오래전부터 한국에서 대규모 전시를 열고 싶었다. 하지만 적절한 장소를 찾는 일에 난항을 겪었다. 단순히 기존 작업을 한국에 가져가 전시하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제작하고 설치하는 장소 특정적 작품을 선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끝에 발견한 곳이 바로 부산의 F1963이었다. 무엇보다 용도와 목적이 정해지지 않은 창조적인 공간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 가능성의 영역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이라 흥미로웠다. F1963은 예전에 공장이었던 곳이다. 금속 와이어 로프를 생산하던 곳이었다고 들었다. 이 같은 장소의 역사성이 물리적인 흔적으로 남아 있다는 점도 굉장한 영감을 주었다. 그 자체로 전시를 풍부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전시 포스터 상단의 ‘사랑/마법’이라는 한글 타이포그래피가 인상적이다.
오귀스티니아크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활자 디자인이야 늘 하는 것이지만 한국어를 직접 구사하지는 못하니까 언어적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한글은 재밌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 사람이 특정한 의도로 개발한 문자 아닌가. 그 자체만으로 너무나 흥미롭다. 타이포그래피는 역사와 문화, 지역성을 내포한 시각 언어다. 그런 면에서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디자인한다는 것은 단순히 글자를 그리는 차원을 넘어 이 나라의 정체성과 정신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암잘라그 라틴 알파벳을 먼저 디자인한 뒤 그것을 한글로 치환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서로 다른 두 문화 사이에서 시각적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언어는 발음이나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미묘하게 다르기 마련인데, ‘magic’의 m과 ‘마법’의 자음 ㅁ이 대응한다는 걸 발견했다. 여기에 초점을 두고 미끄러지듯 전환되는 언어의 흐름을 시각화했다. 타이포그래피 안에서 두 문화를 연결하는 감각을 찾아낸 셈이다.
최근 디자이너로서 고민이나 관심거리가 있나? 앞으로의 행보도 궁금하다.
암잘라그 너무 심오한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웃음) 이미지 과잉 시대를 살다 보니 디자이너로서 고민이 많다. 하루에도 수천 개의 이미지에 압도되는 게 지금의 세상이다. 과거에는 이미지라는 것이 어딘가 신성하고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는데, 이제 그런 감각이 거의 사라졌다. 일종의 포르노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요즘 나는 자극과 마비, 속도와 정지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중이다. 범람하는 이미지를 잠시 뒤로하고 되돌아보는 순간을 만들고 싶다. 이번 부산 전시도 그런 시도의 일환이다. 단순히 아카이브를 나열하는 게 아니라 타로 카드의 구조를 활용한 전시를 구성하는 방식은 우리에게도 생소할뿐더러 관람객 입장에서도 난해할 수 있다. 그러나 관람객이 잠시나마 기존의 감각을 흔드는 사고의 확장을 경험한다면 우리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