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관 정비에서 공존으로, 대한민국 공공디자인 연대기

디자인 언어가 대한민국의 공공 경험을 다시 쓰고 있다. 도로 시스템에서 의료·상담 서비스, 재난 대응 체계까지, 이미 공공 인프라의 많은 부분에 디자인이 개입하고 있다. 하지만 단숨에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다. 그동안 여러 시대적 전환과 실험이 필요했다. 월간 〈디자인〉은 그 흐름을 되짚어보며, 도시 미관을 다듬던 공공디자인이 어떻게 오늘의 ‘공존’이라는 가치로 확장됐는지 살폈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수렴한 대한민국 공공디자인대상 수상작의 변천사도 함께 톺아봤다.

미관 정비에서 공존으로, 대한민국 공공디자인 연대기

공공디자인의 여명기

한국 디자인계에서 ‘공공디자인’이라는 화두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전후다. 물론 이전에도 아시안게임, 올림픽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면서 여러 사업이 진행됐지만 대부분 중앙 정부가 주도한 미관 정비 수준이었다. 디자이너의 자발적 담론 형성이 아닌 톱다운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러다 2001년 5월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한 포럼이 의미 있는 전환점이 됐다. 디자이너들은 이 자리에서 공공의 문서와 제도, 기반 시설을 디자인의 관점에서 새롭게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 논의는 9월의 심포지엄으로 이어졌고, 같은 해 12월에는 전시 〈de-sign Korea: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으로 구현되었다. 교과서와 증명서, 정류장, 대통령 선거 포스터, 거리 상점까지, 디자이너들은 일상의 공공 요소를 다시 그려보며 ‘디자인의 공공성’이란 무엇인지 탐구했다. 공공의 시설과 서비스도 더 아름답고 편리하게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이 처음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비로소 ‘공공을 디자인한다’는 감각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깨끗하지 못한 미관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아니라 변화의 대상이 되었다. 이동식 화장실 도입, 공사장 가림막 개선, 간판 교체 등 크고 작은 시도들이 도시를 흔들기 시작했고, 공공의 일상이 디자인을 통해 개선될 수 있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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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진행한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의 간판 디자인 프로젝트. 간판은 공공디자인 여명기에 가장 뜨거운 감자였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 공공디자인은 본격적으로 도시의 전면에 등장한다. 2007년 서울시는 ‘디자인 서울’을 내세우며 도시 정책 전반에 디자인을 전면 배치했고, 같은 해 서울이 ‘2010 세계디자인수도(WDC)’로 선정되면서 “도시는 디자인으로 경쟁한다”는 메시지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 과정에서 공공디자인은 일부 디자이너의 문제의식을 넘어 다시 행정과 정책의 언어로 수렴되기 시작했다. 서울시가 디자인 공무원을 채용한 것은 당시로선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공공디자인의 조건과 기준을 만들려는 시도도 이 무렵 이뤄졌다. 2007년에는 대한민국 공공건축상이, 2008년에는 대한민국 공공디자인대상이 신설되며 ‘어떤 공공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서울시 간판 가이드라인이 정리·도입되면서 무질서하게 난립하던 간판 문제가 도시 차원의 공공 의제로 부상했고, 공공디자인 엑스포와 국제 심포지엄을 통해 국내외 사례와 담론이 활발하게 교류되었다.

사용자 경험 디자인의 수혈

한편 한국 정부가 마주한 과제는 도시 미관만이 아니었다. 행정 서비스는 난해하고, 민원 절차는 복잡했으며, 공공 문서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조차 모호했다. 이용자 중심의 시각이 정책 전반에 거의 스며들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디자인으로 다시 풀어보려는 시도가 2010년대에 본격화되었다.

이는 국내 디자인계가 국제 사회와 동기화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2000년대 초·중반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정립된 서비스 디자인이 기업의 비즈니스를 넘어 공공 영역에서 유효한 성과를 입증하면서 국내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공공디자인은 시설물과 경관을 넘어 행정·서비스·경험의 영역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건강검진 안내문을 한 장의 직관적 시트로 재구성한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개편, 지하철 이용 방식을 바꾼 티머니 오픈 게이트 등 ‘사용자 중심의 공공 경험’을 재정의하는 사례가 잇따라 등장했다.

그리고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공공디자인은 더 넓은 의미의 ‘공공성’을 고민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2016년 제정·시행된 ‘공공디자인의 진흥에 관한 법률’은 공공디자인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무를 제도적으로 명시하며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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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경제 활성화를 꾀하고 지역 공동체를 되살린 ‘광주 1913 송정역시장’ 프로젝트.

디자인이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보호하고 공동체의 회복력을 어떻게 높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도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지역 공동체를 되살린 광주 ‘1913송정역시장’ 프로젝트, 2013년 대한민국 공공디자인대상 대상을 수상한 버려진 탄광을 문화예술 시설로 바꾼 정선 ‘삼탄아트마인’ 프로젝트, 시민의 안전과 편의를 강화한 2018년 대상 수상작 ‘서리풀 원두막’, 도시의 슬럼화를 방지하며 같은 해 우수상을 수상한 ‘도심으로 돌아온 등대’ 프로젝트 등이 등장하며 한층 확대된 공공디자인의 역할을 시사했다. 이 시기 공공디자인은 더 이상 시설물·경관·행정 UX를 구분된 영역으로 다루지 않았다.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디자인’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갔다.

함께 사는 법을 제안하다

2020년대를 지나며 공공디자인은 다시 한번 성격을 달리하게 된다. 팬데믹과 기후 위기, 고령화, 돌봄과 안전 문제 등 생활 깊숙한 지점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드러나면서, 공공디자인은 더 넓은 의미의 ‘포용’과 ‘공존’을 향한 방향성을 선명하게 갖추기 시작했다. 이제 공공디자인은 눈에 보이는 환경을 정비하거나 특정 서비스를 개선하는 수준을 넘어,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를 설계하는 일로 확장되고 있다.

최근에는 특히 ‘생활 접점’ 중심의 공공디자인이 두드러졌다. 2024년 대한민국 공공디자인대상 장관상을 수상한 국내 최초 인지 건강 커뮤니티 ‘인생정원’처럼 정서적·심리적 돌봄을 디자인 언어로 구조화한 시도나, 교통 약자들의 이동 편의를 증진한 2023년 대상작 ‘북아현동 경사형 엘리베이터 설치’와 같이 일상의 사용성을 개선하는 프로젝트가 등장했다. 2022년 대상을 수상한 ‘공공디자인 선순환 체계’는 이러한 흐름을 제도적 차원에서 보여준다. 국민 참여를 기반으로 고속도로 시설과 서비스 경험을 단계적으로 개선해, 공공디자인을 ‘형태’가 아닌 ‘운영·프로세스·경험’ 중심으로 확장했다. 2025년 대상을 받은 서울 서초구의 ‘기술과 디자인으로 새로운 흡연 문화 만들기’도 궤를 같이한다. 서초구는 바람의 흐름, 제연 기술, 이용자 동선 분석을 바탕으로 개방형 제연 시설을 설계해 규제가 아닌 설계적 해법으로 흡연자와 비흡연자의 갈등을 조정했다. 공공디자인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 과정에서 공공디자인의 방법론 자체도 크게 확장됐다. 기술, 데이터, 인터페이스, 미디어, 예술 등 새로운 도구를 공공의 문제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2025년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받은 국가보훈부·빙그레·디마이너스원의 ‘처음 입는 광복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AI 기술로 광복 영웅들을 복원해 기억·추모 경험을 재해석한, 경험 디자인을 통해 공공디자인의 가치를 알린 프로젝트다.

동시에 오늘날의 공공디자인은 더 이상 행정이나 전문가만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공공디자인 페스티벌과 다양한 시민 참여 프로그램이 활성화되며 시민들이 직접 제안하고 협업하는 방식이 보편화되었다. 참여 방식 역시 물리적 환경 조성에서 디지털·데이터 기반으로 확장되며, 공공의 의사 결정 과정 전반에 디자인적 사고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결국 공공디자인은 ‘공존의 기술’을 탐구하는 일이다. 서로 다른 세대, 감각, 신체, 삶의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 한 사회에서 어떻게 안전하게, 존중받으며,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공공디자인이 진화하는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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