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월간 〈디자인〉이 주목하는 디자이너 15팀] 슈퍼샐러드스터프

정해리가 일하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 호오를 따라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주위에서 내민 손을 기꺼이 맞잡는다. 시시각각 업역을 넓히면서도 여전히 가본 적 없는 곳을 향해 방향키를 튼다. 정해리가 지금껏 그려온 궤적은 여정의 서문에 가까우며, 이 젊은 디자이너는 아직 시작점에 서 있을 뿐이다.

[2026 월간 〈디자인〉이 주목하는 디자이너 15팀] 슈퍼샐러드스터프

디자이너 정해리는 2017년 스튜디오를 시작하며 ‘슈퍼샐러드스터프’라는 다소 뜻 모를 간판을 내걸었다. ‘Soup or Salad?’를 ‘Super Salad’로 오해하며 생긴 언어유희에서 비롯된 이 이름은, 시시껄렁한 농담을 즐기는 본인의 성격이 고스란히 투영된 결과였다. 그럴듯한 스튜디오명을 굳이 내세우지 않은 건 애당초 거창한 목표가 없어서였다. 회사에서 1년간 공들이던 프로젝트가 무산된 후 일종의 탈출구로 삼은 것이 슈퍼샐러드스터프였다. 스튜디오 이름을 걸고 처음 출판한 책 〈Books in Animation〉이 그토록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의 정해리를 있게 한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정해리의 호기심 어린 시선은 일상에서 우연히 조우한 장면마저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포착한 장면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디자인으로 엮어내는 게 그의 오랜 습관이라는 것.

취미 삼아 만들기 시작한 책이 한 권, 두 권 쌓이며 슈퍼샐러드스터프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샐러드’, ‘슈샐’, ‘사라다상’까지, 갈수록 늘어나는 별명마저도 정해리는 기꺼이 여긴다. “내가 가장 나다울 때 사람들도 좋아해준다. 믿어주는 이들이 있으니 언제나 마음 가는 대로 흘러갈 뿐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왕성한 호기심을 좇는 슈퍼샐러드스터프의 정체성이 혼란스럽다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정해리에게는 그 모든 여정이 디자이너로서 고유함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SSS works 1b
‘불현듯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2023. 한 편의 시를 위한 타이포그래피 송시다.
20251220 165336
개인전 〈볼펜 위의 공〉 풍경.

2024년에 선보인 개인전 〈볼펜 위의 공〉은 정해진 도식에 쉽게 꿰맞출 수 없는 그의 취향과 호기심을 한데 모은 자리였다. “오랜 시간 숙고하기보다는 즉흥적인 선택 속에서 발생하는 변칙에 흥미를 느낀다. 스스로 세운 기준을 되짚다 보면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정해리의 모든 작업에는 나름의 규칙과 기준이 존재하지만, 그는 정작 알아보는 사람이 없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해석의 주도권은 언제나 보는 이에게 맡긴 채 즐거움만 남기를 바랄 뿐이다.

오래전부터 책에 매료되어 있었지만 정작 직장으로 인연을 맺은 곳은 대부분 엔터테인먼트 회사였다. YG엔터테인먼트와 스타트업 규모의 엔터사를 거쳐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에 합류했다. 이직의 조건은 언제나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직장을 옮길수록 범주는 점점 넓어졌고, 완전히 독립한 지금은 그의 직업을 하나로 규정짓기 어렵다. 현시점에서 정해리는 디자이너이면서 큐레이터이고, 교육자이자 아티스트다. 최근에는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텍스트까지 관심을 확장하며, 읽고 쓰는 행위를 또 하나의 디자인 실천으로 다루고 있다. 여러 분야를 종횡무진하면서도 일하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 호오를 따라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주위에서 내민 손을 기꺼이 맞잡는다. 시시각각 업역을 넓히면서도 여전히 가본 적 없는 곳을 향해 방향키를 튼다. 정해리가 지금껏 그려온 궤적은 여정의 서문에 가까우며, 이 젊은 디자이너는 아직 시작점에 서 있을 뿐이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71호(2026.01)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