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독립을 꿈꾸는 산업 디자이너의 롤모델 윤정식

삼성전자 디자이너를 거쳐 벤처 사업가, 디자인 경영인, 그리고 정부 기관의 자문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는 그는 디자인의 의미가 영역을 뛰어넘어 끊임없이 확장해가고 있는 이때 디자이너들이 조언을 구하기에 가장 좋은 선배일지 모른다.

이 시대 독립을 꿈꾸는 산업 디자이너의 롤모델 윤정식
계명대 산업미술과를 졸업하고 고려대에서 산업디자인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8년 삼성전자에 입사했고 이후 2001년 디자인뮤를 창업했다. 제30회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일본 굿 디자인 마크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현재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산업계 대표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www.designmu.com

디자인 전문 회사를 운영한다는 것은 좋은 디자이너인 동시에 좋은 경영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둘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지만, 올해로 설립 14년째를 맞은 산업 디자인 전문 회사 디자인뮤의 윤정식 대표는 타고난 디자이너이자 타고난 사업가다. 디자인 스케치를 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이지만, 빠르게 변하는 이 시대에 디자인 전문 회사가 그 한계를 극복하고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하며 다양한 실험을 진행 중이기도 하다. 삼성전자 디자이너를 거쳐 벤처 사업가, 디자인 경영인, 그리고 정부 기관의 자문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는 그는 디자인의 의미가 영역을 뛰어넘어 끊임없이 확장해가고 있는 이때 디자이너들이 조언을 구하기에 가장 좋은 선배일지 모른다. 최누리 기자, 인물 사진: 김정한(예 스튜디오)

모나미 프리미엄 만년필, 2014~2015 모나미의 역사와 전통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프리미엄 만년필. 특히 뚜껑을 여닫기 편리하도록 디자인했다.
디자인뮤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어떤 회사라고 부르겠습니까?

‘사업 기획’을 하는 회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것이 결국 디자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 해요. 상품 기획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대부분 하나의 제품에 대한 기획을 지칭할 때가 많습니다. ‘사업 기획’이라는 용어를 고안한 이유는 단순한 개별 제품의 디자인을 넘어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제품 개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단기ㆍ중기ㆍ장기 계획을 모두 고려하며 큰 로드맵을 두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마케팅과 디자인 기획이 따라가게 되지요.

2001년에 디자인뮤를 설립했습니다. 설립 당시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회사 운영 측면에서 어떤 점이 가장 달라졌다고 생각하는지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프로세스나 방법론에 대한 생각입니다. 예전에는 우리 스스로 프로젝트를 소화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클라이언트의 개발팀이나 마케팅 부서와 논의할수록 일이 많아지거나 프로젝트가 산으로 간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클라이언트를 파트너처럼 최대한 활용하자는 것입니다. 사실 프로젝트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클라이언트입니다. 우리가 풀지 못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오히려 그들에게 숙제를 주자는 역발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일을 ‘받아서’ 한다는 개념이었지만 지금은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클라이언트와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디자인뮤는 제품 디자인을 핵심 카테고리로 삼고 있습니다. 디자인뮤의 디자인 철학은 무엇인가요?

제품에도 여유나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제품과 제품 디자인은 기능 중심주의를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제품이 사용하지 않고 놔두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그럴 때조차도 제품이 사용자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디자인뮤가 생각하는 제품 디자인의 개념입니다. 쓰지 않고 책상에 가만히 놓아둘 때라도 감성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제가 개인적으로 산이나 숲을 즐기고 자연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런 성향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프로기(Froggy) 미아 방지용 웨어러블 디바이스, 2015 클라이언트 SK Telecom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를 삼성전자에서 시작하셨지요?

컴퓨터팀에 입사한 것이 1988년 1월이었습니다. 애플 모니터를 삼성전자에서 제조업자 개발 생산(ODM) 방식으로 생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도면을 모두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디자인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지요. 미니멀하고 포스트모던한 디자인의 제품을 통해 많이 배웠습니다. 애플은 그때도 디자인 품질을 철저하게 컨트롤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한번은 제품의 곡면 부분을 눈으로는 알아차릴 수도 없을 만큼 미세하게 변경한 적이 있는데, 담당자가 해고되고 금형을 다시 만들어야 했지요. 그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했습니다.

당시 새내기 제품 디자이너의 생활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지방에서 올라와 친구도 없고, 주말에도 딱히 할일이 없어 정말 일만 열심히 했습니다. 입사 후 약 1년 후에 기흥에 있는 기술원으로 컴퓨터팀이 모두 옮겨가게 되었는데, 기숙사는 산속에 있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지요. 또 중간에 컴퓨터 사업부를 없앤다고 상사들이 모두 해고되거나 지방 발령을 받는 바람에 얼떨결에 대리 시절 팀장을 달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던 때였기 때문에 나에게 모자란 부분을 회사를 통해 열심히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중국 통신 장비 전문 업체 화웨이를 위해 디자인한 디지털 셋톱 박스, 2009
모자란 부분을 어떻게 채우며 미래를 준비했나요?

저녁 8시까지 일하고 새벽 3시까지 공모전을 준비하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특선만 받다가 1년을 마음먹고 준비한 끝에 대통령상도 받았지요. 당시 삼성이 유명 디자인 전문 회사 아이데오(Ideo)와 협력해서 캘리포니아 아이데오 사내에 별도 팀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는데, 자원해서 그곳으로 가 6개월 정도 머물며 배우기도 했습니다. 또 IDS라고, 현재 삼성디자인학교(SADI) 전신인 교육기관에서 1년 반 정도 공부하기도 했지요. 이후 휴대폰 관련 부서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런 경험을 통해 배웠던 서비스 디자인이나 UX 디자인을 적용해보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삼성전자에 근무하던 시절부터 사업을 꿈꾸었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뚜렷이 한 적은 없었습니다. 창업보다는 오히려 교수가 되는 것을 더 선호하는 시절이었는데, 모교의 스승님이 학교로 올 생각이 없느냐고 해서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조직에 머무는 것보다는 내가 원하는 일을 좀 더 자유롭게 하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회사를 차린다기보다 나만의 브랜드, 혹은 내 이름을 내세운 브랜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 디자인뿐 아니라 실력 있는 디자이너들과 협업해서 그들의 이름을 함께 내세울 수 있는 그런 에이전시를 꿈꿨지요. 80세가 되어 머리가 하얗게 세어도 디자인을 하고 싶었으니까요. 그러려면 우선 통장에 적어도 500억원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웃음). 그래야 돈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디자인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디자인뮤 자체 브랜드 람다의 파워 뱅크 대용량 보조 배터리, 2015
500억 원을 모으겠다는 각오로 이후 벤처 창업에 뛰어드셨군요?(웃음)

삼성전자에서 퇴사한 것이 2000년 2월이었습니다. 이후 지인들과 함께 차렸던 벤처 회사가 2년만에 300억 원을 까먹었지요. 한창 벤처 붐이 일던 때였습니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던 수많은 좋은 인력이 너도나도 회사를 그만두던 시절이었지요. 그런데 제가 근무하던 디자인실만 유독 조용했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나가 후배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벤처 사업에 성공한 선배들의 좋은 사례가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롤모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어떤 분야의 회사였나요?

지금으로 말하면 IPTV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였습니다.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 국영 통신사와 연계한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었지요. 시작도 무척 순조로웠습니다. 처음 9명으로 시작했는데 2년 만에 직원이 100명으로 늘고, 제품 개발 또한 2년 만에 끝낸 뒤 프로그램 설치를 위한 소프트웨어만 몇 십억 원어치 제작했지요. 그런데 당시 인터넷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아 결국 실패했습니다. 영화 한 편 다운받는 데 4시간이 걸렸으니까요. 나름 똑똑한 사람들이 모였다고 했지만 머리만 앞서고 주변 환경을 고려하지 못한 탓이었습니다. 투자도 많이 받았는데 말이죠. 지금 돌아보면 좀 더 천천히, 차근차근 회사를 이끌어 나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휠체어 로봇, 2011~2012 노약자들이 빠르고 안전하게 목적지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이동 수단이다.
그런 경험이 현재 회사를 운영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디자이너들도 적극적으로 창업을 준비하는 시대지요.

창업을 준비하는 디자이너 후배들을 보면 대부분 알레시나 다이슨과 같은 이상적인 유명 디자인 기업을 롤모델로 삼지요. 꿈을 높게 가지는 것은 좋지만, 처음 창업을 시작할 때는 제품의 디자인뿐 아니라 적절한 가격과 서비스도 철저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아이디어와 서비스는 좋지만 디자인 품질에만 집중한 나머지 가격대를 지나치게 높게 설정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좋은 디자인일수록 오히려 제품이 팔리지 않는 모순이 생기기도 합니다.

디자인을 핵심 전략으로 삼은 회사 창업을 준비할 때 특별히 고려해야 할 점이 있을까요?

성공적인 디자인 창업을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강력한 브랜드, 혹은 강력한 디자이너 네임, 둘 중 하나는 갖추어야 합니다. 소비자가 단순히 제품이 예뻐서 구입하는 경우도 있지만, 디자인이 중요한 제품의 경우에는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나 특정 디자이너의 제품이라는 이유로 구입하는 경우도 각각 30%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특히 소수의 인원이 삼삼오오 모여 창업을 준비하다 보면 브랜드 파워나 홍보, 마케팅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자신들이 좋아하는 제품을 개발하고 창업을 준비하는 경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람다 스마트폰 도킹 스테이션, 2013 산의 형상을 콘셉트로 디자인했다.
소비자 입장에서 제품을 바라볼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각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동안 나름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하지만, 저도 최근 또 한 번 비슷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디자인뮤는 현재 DDP 살림터에 디자인 숍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디자인 아트 숍’이라는 개념으로 디자인뮤가 직접 개발한 제품뿐 아니라 다른 좋은 디자이너와 작가, 디자인 전문 회사의 제품도 큐레이션하여 소개하고 판매하지요. 그런데 처음엔 제품이 잘 안 팔리는 겁니다. 작년 한 해 동안 95% 이상의 매출을 보조 배터리 한 제품으로 충당했습니다. 1~2년간 어떤 아이템이 잘 팔리는지 가만히 지켜보며 분석하면서 ‘내가 이제까지 팔릴만한 제품을 개발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취미 생활을 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만족할 만큼의 디자인 품질과 제품의 품질을 달성하는 데 지나치게 집중하다 보니 브랜딩이나 마케팅 측면은 간과했다는 점을 깨달았지요. 제품 자체뿐 아니라 그 제품을 어떻게 선보일 것인지도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말이지요.

자체 디자인 숍 운영을 비롯해 디자인뮤를 통해 다방면의 디자인 경영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디자인뮤는 크게 UX 디자인 파트와 제품 디자인 파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캐릭터 사업도 함께 하고, ‘람다’라는 별도의 브랜드 사업도 운영하지요. 디자인뮤의 뮤는 그리스어의 열두 번째 알파벳이고 람다는 열한 번째 알파벳입니다. 각각 ‘100만분의 1m’, ‘파장’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저의 소망은 잘 운영되고 있는 디자인뮤의 각 파트를 더 발전시켜 궁극적으로 따로 독립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어를 콘셉트로 삼아 알파벳 수대로 회사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요(웃음). 그렇게 독립한 회사들이 네트워크를 이뤄서 큰 프로젝트를 소화하는 구조를 꿈꾸고 있습니다.

웅진코웨이 자연식 가습기, 2012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했다.
일종의 컨소시엄이군요. 그러한 형태의 디자인 전문 회사를 구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이제까지는 회사 내에서 하나의 프로젝트를 모두 소화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여건상 소화가 힘들 것 같으면 아예 수주를 거절했지요.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프로젝트가 크면 큰 대로 외부와의 협력을 통해 그만큼의 완성도를 성취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제품 디자인이든 시각 디자인이든, 디자인 전문 회사는 무작정 직원을 늘리는 방법으로 규모를 키우는 것은 불가능한 구조입니다. 단순히 많은 인력으로 회사를 운영하기보다는 소수 정예 인력으로 다른 회사와 융통성 있게 협업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접하는 프로젝트의 형태와 규모가 제한적일 뿐 아니라 틀에 갇히게 되기 쉽지요.

프로젝트를 클라이언트로부터 ‘수주받는다’는 통상적인 디자인 전문 회사의 운영 개념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전에 이런 형태의 회사 운영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10년 전쯤 디자인 전문 회사 5곳, 제조 회사 한 곳, UX 디자인 전문 회사 한 곳이 협업한 클러스터 형태의 회사에 참여했지요. 공동 프로젝트 형식의 비즈니스 모델로 운영하자는 의도도 좋았고 추진력도 있었는데 사실상 제품 디자인이라는, 모두 똑같은 일을 하는 회사가 모여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운영이 쉽지 않았지요. 비슷한 일을 하는 회사들끼리 프로젝트 협업을 이루는 것보다는 서로에게 모자란 부분을 채울 수 있는 회사들끼리 파트너십을 이루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래야 비즈니스적으로 윈윈 관계를 이룰 수 있고 이제까지 시도하지 못한 전혀 색다른 프로젝트에도 도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밖에 디자인뮤에서 실행하고자 하는 또 다른 사업 전략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한 가지 또 중요한 사업 기회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기업에게 미래 전략 컨설팅을 제공하는 일입니다. 삼성전자 선행 디자인팀에서 쌓은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기업은 끊임없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언제나 ‘다음의 먹거리’를 고민합니다. 일종의 선행 디자인 개념으로, 단순한 제품 디자인을 넘어 사업 기획까지 이르는 비전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디자인 전문 회사를 운영하면서 가장 힘들었거나 위기를 느낀 순간은 언제인가요?

솔직히 말하면 항상 지금이 최고의 위기라고 생각하고 회사를 운영해왔습니다. 사업을 하는 입장이라면 모두 그러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데 최근 들어서 더욱 고민이 많아졌는데, ‘지금’이 아니라 ‘다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제 나이가 50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는데, 디자인 전문 회사의 대표를 할 수 있는 최대 나이는 56세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이후 디자인뮤의 각 부서를 독립시킨 다음 다시 디자이너로 돌아가고 싶어요. 삼성전자에서 퇴사하며 생각했던 처음 목표대로 말이지요. 저는 밖에 앉아 음악을 틀어놓고 디자인 스케치를 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그래서 통장에 500억은 없지만, 회사 대표 자리를 내려놓은 후에는 원하는 디자인을 마음껏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웃음).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 5년 내에 디자인뮤의 조직 체계나 운영, 수익 구조 등 비효율적이거나 불합리한 점을 개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저런 고민이 많아집니다.

람다 공기청정기, 2015
디자인뮤가 독립할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고 계시다는 말이군요.

회사 창업 초기부터 함께한 직원이 많습니다. 그동안 대기업으로 스카우트되어 간 친구들은 종종 있었지만, 다른 디자인 전문 회사로 이직한 직원은 거의 없었습니다. 현재 회사의 주축이 되어 팀을 이끌고 있는 직원들에게는 남은 5년 동안 열심히 준비하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나중에 모두 한 회사의 대표가 될 것이라고요.

회사를 운영하면서 리더로서 고민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직원들과 어떻게 함께 성장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처음에 회사를 설립했을 때는 삼성보다 월급을 많이 주겠다고 호기롭게 외쳤지요. 그런데 2000년대 이후 대기업 디자이너들의 월급이 급상승해서 도저히 따라가기 힘들었습니다(웃음). 그래서 디자인뮤가 직원들에게 대기업보다 나은 어떤 혜택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한 달간의 방학을 주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약 2년간 시행해봤는데 직원들이 복직하고 나서 일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이후 중단했지요. 지금은 긴 휴가는 실적에 따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 오래 근무한 직원에게는 자신의 커리어를 외부에서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많은 디자인 전문 회사, 특히 제품 디자인 분야의 디자이너와 회사들이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비교했을 때 제품 디자인 영역의 시장이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입니다. 아이폰이 등장하고 소위 ‘애플 스타일’이 제품 시장을 장악하면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졌습니다. 일단 개발할 수 있는 제품의 라인업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폴더폰 시절만 해도 휴대폰 모델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 스마트폰은 기껏해야 한 회사당 한두 개 모델뿐이니까요. 자연스럽게 디자인할 제품의 수도 급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TV나 에어컨 같은 일반 전자 제품도 예외는 아니어서 라인업의 간소화 바람으로 가짓수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기업의 내부 인력으로도 디자인 업무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되었고, 밖으로 나오는 일감이 많이 감소했습니다. 1등 브랜드의 독주 체제가 공고해졌다는 점도 또 다른 원인입니다. 예전에는 한 제품의 카테고리 안에 1등, 2등, 3등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이들끼리 서로 경쟁하며 엎치락뒤치락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요즘은 하나의 기업 혹은 하나의 브랜드가 시장을 장악하는 시대입니다. 특히 대기업 브랜드인 경우가 많지요. 제품에 대한 모든 정보가 오픈되어 있기에 소비자들도 낯선 브랜드를 실험 삼아 구입하기보다는 이미 검증된 제품만 구입하려는 성향이 강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소기업은 제품 개발에 대한 의욕이 상당 부분 상실되었습니다. 또 열심히 개발하고 디자인해서 제품을 잘 만들어놓아도 한 달 뒤면 중국이 금세 카피 제품을 들고 따라옵니다. 이런 다양한 현실적 상황이 제품 디자인의 위기를 불러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 전문 위원으로도 활동 중이십니다. 정부에서 디자인 산업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한가요?

저는 공교롭게도 전문 위원에 디자인계 대표가 아니라 산업계, 즉 우리나라 중소기업 대표 자격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도대체 이 자리에 왜 디자이너를 선발했을까 의아했는데, 창조 경제를 중요시하는 만큼 기존의 산업계를 지배하던 제조 중심과는 조금 다른 개념의 접근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에너지 등 디자인과 전혀 다른 분야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에게 디자인과 디자인 중심의 정책이 왜 중요한지 자문을 통해 최대한 전달하려 노력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부가 디자인의 중요성에 대해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아직까지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오랜 시간 기술 기반의 사회였기에 이것이 일종의 습관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제는 제조가 아니라 서비스로 가치를 창출해야 할 터닝 포인트가 필요한 시점인데, 아직까지는 충분한 전환이 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젊은 세대가 성장해 사회에 막 진출할 시기, 다시 말하면 적어도 10년 안에는 완전한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말씀하신 터닝 포인트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디자인 전문 회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아직까지 진정한 디자인 주도형 기업이라고 할 만한 좋은 사례가 많지 않습니다. 좋은 디자인을 보여준 사례는 많지만, 일본의 발뮤다처럼 그 뿌리까지 디자인 마인드로 무장한 가치 중심의 제조 회사는 드물지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디자이너가 컴퓨터 앞에서 혼자 일하는 시대는 이제 지났습니다. 디자인 전문 회사도 유연한 구조를 가지고 다양한 파트너들과 협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조 기업과의 상생을 고민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삼성과 같은 대기업에 제품을 납품하는 1차 제조기업이 국내에 상당히 많습니다. 이들은 좋은 기술과 수천억 원대의 매출 규모를 가지고 있지만 자생력은 거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요. 대기업이 무너지거나 대기업과의 계약을 이어가지 못하면 회사가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것이죠. 이런 제조 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자체 브랜드를 만드는 것도 디자인 전문 회사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에 집중하는 것이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디자인의 대상뿐 아니라 프로젝트 프로세스와 방법도 포함됩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449호(2015.11)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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