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학교 유현준 교수
어쩌면 공간 그 이상의 이야기
2025년을 맞이하며 건축가 유현준과 미래의 공간, 도시,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폴 고갱이 1897년에 던진 질문을 2025년에 다시 꺼내 든 이유는 아직 우리가 이에 대한 충분한 대답을 마련하지 못한 까닭이다. 본질과 정체성, 미래에 대한 의문과 의심은 우리가 연방 세상을 탐구하는 동력이 된다. 을사년 새해를 맞아 건축가 유현준의 사무실을 찾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건축 밖에서 건축의 본질을 발견하는 학자이자 건축 안에서 시대의 의미를 묻는 이 건축가는 우리에게 공간 너머로 시선을 던질 것을 촉구한다. 건축과 도시, 사회 시스템과 시대에 대해 나눈 이 담론이 또다시 한 해를 살아갈 수많은 디자이너에게 나침반이자 북극성이 되기를 바란다.
건축 밖에서 답을 찾는 건축가
지난가을 그리스를 다녀오셨더군요.
제주도에 40평(약 132㎡) 남짓한 호미라는 주택을 지었는데 그 집이 국제건축상(International Architecture Awards)에서 상을 받았어요. 시상식이 아테네에서 열렸는데 시상식에 참석할 겸 유튜브 팀과 촬영도 할 겸 며칠 다녀왔죠. 사실 그리스는 미국 유학 시절 이후 28년 만에 다시 찾은 것이었습니다.
교수님이 유학 시절 그리스 건축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당시 학교에서 여름방학 기간에 한 달 정도 체류비를 지원해주는 워크숍이 있었는데, 워크숍 종료 후 자비를 들여 한 달 정도 더 머물면서 그리스 고대 문명지를 둘러봤습니다. 원래 학생 때는 최대한 많은 것을 봐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잖아요. 식사량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가장 저렴한 숙소에 묵으며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눈에 담으려고 했죠.
르코르뷔지에의 동방 여행을 떠올려봐도 그렇고 건축가에게 고대 건축 문명의 발상지를 둘러보는 것은 큰 울림을 주는 것 같습니다. 28년 만에 다시 찾은 그리스는 어땠나요?
솔직히 28년 전에 방문했을 땐 적잖이 실망했어요. 돌덩이 몇 개 외에 남아 있는 것도 별로 없는 폐허가 뭐 그리 대단한가 싶었죠.(웃음) 그런데 경험을 쌓고 보니 많은 것이 예전과 달라 보이더군요. 이 잔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보이는 거예요. 건축사뿐 아니라 인류사적 의미로 봤을 때도 말입니다. 파르테논 신전이나 원형극장, 올림픽 경기장 등이 아테네를 민주주의 사회로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체감하고 돌아왔죠.
2015년 이후 교수님이 쓴 책은 전부 다 읽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책의 주제가 점점 확장되고 있단 생각이 들었어요. 〈공간이 만든 공간〉은 〈총, 균, 쇠〉의 건축가 버전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더라고요.(웃음) 건축 자체보다 건축을 둘러싼 외연에 더 의미를 두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정확히 본 것 같군요. 원래 100명의 건축가가 있으면 100명이 모두 다른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 저는 조금 더 전체적으로 보는 편입니다. ‘홀리스틱holistic하게 본다’라는 표현은 다소 거창할 수 있지만. 학생 때도 건축책보다 다른 분야의 책을 더 많이 읽었던 것 같아요. 건축 밖에서 건축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건축은 제게 하나의 도구일 뿐 목적은 아니거든요. 인간을 이해하는 툴로 바라보다 보니 건축의 심미성이나 조형성은 부차적으로 느껴집니다. 물론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건축을 통해 다른 세상을 보고 싶은 욕망이 큽니다. 〈공간이 만든 공간〉이 그런 맥락에서 쓴 책이고, 3월 출간을 목표로 준비 중인 책에선 그런 경향이 더 짙어질 듯합니다. 모닥불부터 현대 스마트시티까지, 어떻게 인간 사회가 진화했는지, 건축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이야기하려고 해요.
다양성에 대한 고민
귀국 전 미국에서 리처드 마이어 건축사사무소에서 근무했죠. 그런데 사실 ‘백색의 건축가’라고 부르는 리처드 마이어의 색깔이 교수님의 공간에서 느껴지진 않는 것 같아요.
아무리 좋아하는 건축가라고 해도 누군가의 제자나 아류에 그치고 싶진 않았습니다. 리처드 마이어의 영향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면 성공한 것 같군요.(웃음) 그래도 일하는 태도나 방식 면에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치밀하게 건축의 디테일을 탐구하는 모습이 귀감이 됐죠. “신은 디테일에 있다”라는 미스 반데어로에의 격언을 현장에서 체험한 시간이었습니다. 건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에서 일할 때 얼마나 행복한지도 느꼈어요. 사무실 안에선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흘렀습니다. 이것은 리처드 마이어라는 든든한 우산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유현준 건축사사무소도 같은 분위기인가요?(웃음)
그런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하죠. 아무래도 일하는 방식 면에선 리처드 마이어 사무실을 닮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일단 나이를 불문하고 제가 존경할 수 있는 직원을 뽑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직원들이 모였을 때 상호 존중하는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팀원들이 건축가로 일하는 것에 자긍심을 느꼈으면 합니다. 하는 일은 서비스업일지라도 그 이상의 가치를 만드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마음을 가진 집단을 만들고 싶습니다. 회사 밖에서도 건축가를 존중하는 문화가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건축가라는 사람들이 인간에 대해,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얼마나 고심하는지 깨닫고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면 해요.
생각해보면 설계사무소 대표로서의 유현준은 덜 알려진 것 같아요.
처음에는 설계사무소를 열 여력도 없었죠. 건축주가 없었으니까. 귀국 후 2년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에 계획 설계 프로젝트를 하나 맡으면서 개소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냥 평생 건축가로 살고자 했던 사람이지만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 소프트 랜딩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는데 마침 홍익대학교에서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홍익대학교 측이 실무를 겸하게 허락해준 것이 제게 천운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막상 교수로 살다 보니 실무자로 저평가받는다는 느낌도 들더군요. “교수니까 펜대나 굴릴 줄 알 거야”, “직원 대신 학생을 데려다 쓸 거야” 따위의 편견이죠. 실제로 저희 사무소에서 근무하는 30여 명 중 홍대 출신은 5%도 채 안 되는데 말입니다. 개소 후 고정관념을 깨는 데 줄곧 노력했던 것 같아요.
학교 이야기를 하니 ‘뉴 홍익’ 프로젝트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지난해 OMA의 당선안이 공개되자 찬사와 비판이 동시에 쏟아졌어요. 교수님은 이 안을 어떻게 봤나요?
긍정적인 편입니다. 저는 디자인이 문제 해결의 산물이라고 보거든요. 예술 작품과 다르게 현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게 디자인의 숙명이죠. 그런 면에서 OMA의 설계 안은 정답을 찾았다고 생각해요. 동선이 여러 개로 나뉘고 입구를 다방면으로 낸 것도 지극히 동시대적 발상입니다. 비트코인 같은 게 만들어지는 시대잖아요. 비트코인의 핵심은 탈중앙화와 분산에 있죠. 만약 렌초 피아노나 헤어초크 & 드 뫼롱이 설계했다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왔을 거예요. 상징적인 건물이 들어섰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OMA는 그냥 중심 없는 지형을 만들고 끝을 냈어요. 지붕 위를 산책로처럼 걸어 다닐 수 있게 하고, 성큰으로 채광과 통풍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것이 시대상과 맞아떨어진다고 봐요.
실시설계 단계에서 기획이 무너지지 말아야 할 텐데 말이죠.(웃음)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교수님도 스머프빌리지 마스터플랜으로 교육 환경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사실 시작은 제 아들이었습니다. 아이가 크면서 엄마랑 사이가 너무 안 좋아지는 거예요. 이유가 무엇인지 가만히 관찰해보니 자유가 없는 아이의 일상이 보이더군요. 교실과 학원만 오갔으니까. 왜 그렇게 게임에 몰두하는지 한편으로 이해가 가더군요. ‘젤다의 전설’ 같은 게임을 잘 보세요. 캐릭터가 계속 뛰어다닙니다. 아이들이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게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세종시가 학교를 지을 마스터 건축가를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학교를 더 들여다봤더니 진짜 교도소와 똑같은 구조였습니다. 야외 공간을 접할 기회도 턱없이 부족하고요. 그래서 가장 먼저 아이들을 해방할 수 있는 구조를 구상했어요. 교실 문밖 40m 이내에 야외 공간을 조성하는 등 몇 가지 원칙을 세웠죠. 지식은 책에서 배우고 지혜는 자연에서 배우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를 위해 빌딩을 여러 개로 쪼개고 저층화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쉬는 시간 10분이라도 잠시 야외로 나가 환기할 수 있도록 말이죠.
학생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학교 입장에서는 통제를 벗어나는 구조에 불안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런 문제는 셉티드CPTED 같은 개념을 도입해 충분히 상쇄할 수 있습니다. 감시와 통제만 강조하는 사회가 되어선 곤란해요. 스머프빌리지에서 또 한 가지 제안했던 것은 학년에 따라 달라지는 교실이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집이 모인 마을 같은 느낌이었으면 했어요. 저는 어릴 적에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너무 거친 운동 중심이었던 게 원인이었어요. 학교 운동장은 군대 연병장을 닮았죠. 아이들이 하는 축구도 군대의 전투 축구에 가까웠고. 다양성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바엔 운동장보다 마당을 만들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획일화된 공간에서 성장하는 것은 공간 안에서 나만의 가치를 찾기 어려워진다는 뜻입니다. 결국 그 가치를 모조리 집값으로 치환하죠. 모든 것이 정량화된 사회에선 사회의 스트레스 지수가 높을 수밖에 없어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다양성을 확보해야 하죠.
솔직히 너무 뿌리 깊은 문제라 당장에 해결될 것 같진 않네요. 화제를 전환하죠. 다양한 저술 활동 에 방송 출연, 유튜브 채널 운영까지, PI(President Identity) 전략의 일환이라고 봐야 할까요?
비즈니스에 일정 부분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사실 특별한 목적을 갖고 운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어릴 적에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미술이었어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정규 교육과정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과목이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다른 과목은 체육 정도를 제외하면 위대한 누군가가 이미 정립한 것을 습득하는 것이잖아요. 음악조차 누군가가 작곡한 곡을 연주하거나 부르죠. 저는 표현 욕구가 강한 사람입니다. 건축을 택한 것도 그런 이유였는데 실무를 하다 보니 막히는 부분이 많았어요. 건축주의 요구도 있고, 까다로운 법규도 지켜야 하고, 예산의 한계도 있으니까. 그래서 우회로로 글을 쓰고, 방송에 출연하면서 건축으로 표현하지 못한 것들을 분출했던 거예요.
예상과 조금 다르네요. 저는 전략적인 접근 내지 계몽적인 의도가 좀 있다고 봤거든요.
계몽적 차원도 있긴 합니다. 방송만 해도 PD에게 편집권이 있으니 소신 발언이 편집될 때가 있어요. 하지만 유튜브는 좀 더 자유롭게 제 생각을 말할 수 있죠. 건축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안타까운 일 중 하나가 좋은 건축가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변에 정말 훌륭한 건축가가 많은데 사무실을 열어도 일거리가 없어요. 솔직히 그 반대의 경우도 보고요.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무엇보다 건축을 보는 사회의 안목이 부족한 탓이란 결론을 내렸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건축을 바라보는 사회의 안목이 개선되었으면 했습니다. 꼭 내가 아니어도 괜찮으니 좋은 건축가와 일하라는 것이죠. 어쩌면 이게 좋은 건물 하나 올리는 것보다 더 빠르게 세상을 업그레이드하는 방법일 수 있어요.
지금 하신 말씀에는 좋은 건축이라는 게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유현준 교수가 바라보는 좋은 건축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건축입니다. 저는 건축을 일종의 관계로 봅니다. 건축설계는 곧 관계를 디자인하는 것이죠. 건축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갈등을 창의적으로 해소하고 상생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건축, 미래의 도시, 미래의 삶
2015년에 쓴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좋은 거리의 조건으로 ‘이벤트 밀도’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길을 걷는 동안 접하는 이벤트가 많을수록 걷기의 긍정적 경험이 강화된다고 말했죠. 그런데 당시 모범 사례로 언급한 가로수길은 이후 심각한 젠트리피케이션을 겪었어요.
저는 건축가이다 보니 하드웨어 중심으로 이야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함께 돌아가죠. 젠트리피케이션은 소프트웨어상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물리적 구조는 그대로인데 임대료가 올라가고, 이에 따라 대자본만 들어오는 환경이 조성되고, 그 결과 거리의 다양성과 특색이 말소되죠. 종국에는 지역의 매력 감소로 이어지고요. 그런데 결국 도시라는 것은 유기체와 같아서 성장하기도, 쇠퇴하기도, 죽기도 해요. 때론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가로수길이 호황기를 누렸던 것은 인근 압구정 로데오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경제 호황기를 맞이하고 마이카 시대가 되면서 소비력을 갖춘 베이비 붐 세대나 소위 오렌지족이 로데오를 활성화시켰어요.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예전만큼 풍요롭지 않잖아요. 차가 아닌 지하철로 접근할 수 있는 대안이 가로수길이었어요. 지금은 가로수길이 죽고 성수동으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죠. 한국은 젊은 소비층 자체가 제한적인 것 같아요. 한정된 인원이 을지로로, 성수동으로 몰렸다가 소셜 미디어로 소비한 다음 마치 철새처럼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것이죠. 결국 좋은 공간을 소비하는 층 자체가 두꺼워지지 않으면 이런 현상은 도돌이표처럼 반복될 거예요.
도시만큼 건축도 변하고 있습니다. 렘 콜하스는 일찍이 엘리베이터 때문에 오늘날 건축의 가치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한 적도 있죠. 미래 도시와 건축을 일구는 데 영향을 줄 결정적 기술로 무엇이 있을까요?
AI일 거라고 봐요. 인공지능을 탑재한 자율 주행 시대가 도래하면 자동차 공간의 개념 자체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운전자가 항상 전방 주시를 해야 했던 시대를 지나 등을 지고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있게 되죠. 자동차의 공간이 바뀌면 도로의 의미도 바뀌죠. 이동하는 공간에서 머무는 공간으로 말입니다. 철근 콘크리트, 엘리베이터와 결합한 건축은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지만, 사실 건축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이었어요. 건물과 기계가 결합하고, 그 결과 고층 건물의 개념이 탄생했습니다. 그렇다면 건축이 기계를 넘어 인공지능을 탑재하면 어떻게 될까요? 또 한 번 건물 모습이 바뀌지 않을까요? 어쩌면 자동차와 건물 자체가 융합되는 현상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자동차가 운송 수단이 아닌 방이 된다면 그 방이 건물에 붙는 게 이상할 것도 없죠.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자율주행차가 건물 입면에 탈부착되는 미래가 올 수도 있잖아요. 자동차와 건물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도시의 얼굴도 바뀔 것 같습니다. 주차장의 필요성도 줄어들겠죠. 이것 또한 도시의 풍경을 바꿔놓을테고요.
SF 영화의 한 장면이 연상되네요.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어요. 지금의 글로벌한 에너지 수급 시스템이 깨지지 않고 잘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늘어놓은 이야기는 모두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일입니다. 일단 자동차 자체에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고 자동차를 들어 올릴 때 쓰는 에너지도 만만치 않겠죠. 일종의 체인이 빈틈없이 연결되어야 하는데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난이나 중동 석유 체인의 변화, 미군의 달러 패권 소실 등을 감안하면 미래를 낙관할 수 만은 없습니다. 이런 변수가 더해지면 진화는 멈추고 발전은 꺾일 거라고 봐요.
쉽지 않네요. 결국 모든 것이 다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 것이잖아요.
그렇죠. 저는 살아 있는 유기체도 평균대 위를 걷는 것보다 더 아슬아슬하게 겨우 균형을 맞추며 살아간다고 보거든요. 우리가 인공적으로 너무나 복잡한 생태계를 만들어놨는데 여기서 뭐 하나 삐끗하면 진화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거예요.
한때 3D 프린팅 건축이 주목받은 적도 있습니다. 여전히 세계 도처에서 관련 프로젝트가 이어지고 있지만 기대만큼 파급력이 크진 않네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층 건물을 짓는 기술이 등장하지 않아서 그래요. 아직 3D 프린터로 4층 이상 높이의 건물을 지은 적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속단은 이릅니다. 저는 이것 또한 과도기일 수 있다고 봅니다. 과거에 건물을 돌로만 짓다가 철근 콘크리트를 쓰기 시작했잖아요. 천연 재료만 사용하다 시멘트와 철근 등 공장에서 만든 재료를 쓰는 공정이 추가된 것입니다. 철골 구조로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공장 제작의 비율이 높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면 건설 현장을 기피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빈자리는 외국인 노동자가 대체하고 있죠. 이런 이유로 3D 프린터 등을 활용하는, 공장 제조 비중이 높아질 수 있어요. 힘들고 위험한 공사 현장보다는 쾌적한 실내에서 일하는 것을 선호할테니까요. 단가 절감을 위해 로봇이 공정에 참여할 가능성도 높아진다고 봅니다. 모듈형 건축도 활성화될 수 있습니다. 일일이 부품을 만들어 현장에서 쌓아 올리는 방식은 제작 단가 감축에 한계가 있으니, 아예 공간별로 쇼핑하듯 선택하고 이걸 현장에서 조합해 완성하는 건축도 출현할 수 있습니다.
〈공간이 만든 공간〉 서두에는 기후변화를 인류의 군집과 연결 지어 설명했습니다. 이 대목을 읽고 문득 인류세에 접어든 우리의 공간과 도시도 결국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류 절멸의 위기부터 극복하는 게 우선이겠지만 말이죠.
사실 제일 쉬운 방법은 서식지로 옮기는 거예요. 살 만한 기후가 안 되면 살기에 적합한 기후의 지역으로 옮기는 것이죠. 그런데 이건 그나마 긍정적인 시나리오입니다. 요즘 기후학자들은 더 이상 지구온난화라는 표현을 쓰지 않죠. 대신 지구 이상 기후라는 표현을 씁니다. 쉽게 말해 기후를 종잡을 수 없다는 거예요. 기후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농작물 생산을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외부 세계와 차단된 실내 공간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마치 롯데월드 어드벤처처럼 말이죠. 평생 쇼핑몰 같은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디스토피아가 펼쳐질 수 있어요. 정확한 미래는 예측할 수 없지만 변화하는 환경을 감안했을 때 건축은 점점 더 외부와 차단되는 쪽으로 진화할 가능성이있어요. 최근 LA에서 온 지인을 한 분 만났는데 자기 집 모든 창문에 셔터를 장착했다고 합니다. 도난 사고가 심해서 건물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죠. 요점은 자연환경의 변화가 사회 환경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등장하는 아파트도 점점 더 익스클루시브하게 변하잖아요. 외부 세계와 차단된 안전한 공간을 만들려는 움직임이죠. 이런 현상이 기후변화와 맞물려 심화될 수 있다고 봅니다.
기후 못지않게 세대의 변화도 극명합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좋은 공간을 둘러보는 것보다 즉각적으로 흥미를 충족할 수 있는 미디어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고 하죠. 그렇다면 세대가 바뀌면 좋은 공간의 기준도 바뀌게 되지 않을까요?
저는 그럼에도 인간의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흔히 파충류 뇌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수억 년에 걸쳐 진화하면서 생겨난 본능은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긍정적인 면을 발견해요.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갈등이 넘쳐나지만 사실 다른 점보다 인간으로서 공통점이 더 많죠. 물론 자라나는 세대를 보며 우려되는 부분도 많습니다.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만큼 자신을 즉각적으로 만족시키는 디지털 마약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죠. 집 안에서 욕구를 충족시키는 콘텐츠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보니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도 못 느끼고요.이 세대가 자라서 독특한 가치관과 세계관이 생길 텐데 어떤 세상이 만들어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론 세대마다 그 세대 고유의 문제를 안고 있잖아요. 결국 그 세대의 숙제이니 그들이 풀도록 여지를 남겨둬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우리 세대의 숙제를 푸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