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을 읽고 쓰는 논픽션 콘텐츠 플랫폼 ‘파이퍼’
진짜 지식은 경험에서 나온다
모두가 자신의 경험을 글로 치환해 공유하고, 이를 필요한 사람이 구입한다. 콘텐츠 비즈니스의 새로운 판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파이퍼의 김하나 대표를 만났다.
서머싯 몸은 “어떤 면도의 방법에도 철학이 있다”고 썼다. 여기에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매일매일 계속하고 있으면, 거기에 뭔가 관조와 같은 것이 우러난다는 말이라고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하찮은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좋아하거나 나의 생업과 관련된 경험이라면 어떨까. ‘파이퍼’의 김하나 대표는 AI 시대에 “우리가 내일을 준비하고,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영감의 원천”으로 좋아하는 일을 해 나간 개인의 고유한 경험을 주목했다.
“콘텐츠가 있었기 때문에 제가 나고 자란 곳의 한계를 넘어 넓은 세상을 간접 경험하고 더 즐겁게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콘텐츠 일은 제가 평생 하고 싶은, 해야 하는 일이라고 느끼고 있어요.” 2007년 신문사 기자로 일을 시작한 김하나 대표가 미디어 스타트업 콘텐츠 총괄을 거쳐 파이퍼를 창업했다.
파이퍼는 2022년 9월, 취미와 전문 지식 분야의 논픽션 시리즈를 전문적으로 다루며 웹소설처럼 콘텐츠를 한 편씩 읽을 수 있도록 설계한 논픽션 시리즈 플랫폼으로 출발했다. “진짜 지식은 경험에서 나온다”고 믿으며 실행하고 몰입한 경험이 있는 누구나 자신만의 관점이 담긴 실용적인 콘텐츠를 파이퍼 웹사이트에 ‘퍼블리시’하고 판매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지난해에는 파이퍼에 연재한 콘텐츠를 모아 책으로 펴내는 출판 브랜드 ‘파이퍼프레스’를 론칭해 5권의 ‘경험들’ 시리즈로 출간했으며, 파이퍼 웹사이트에서 발행하는 연재 콘텐츠는 4,500여 명의 구독자가 함께 지켜봤다. 개인이 콘텐츠를 발행하는 플랫폼도, 지식 콘텐츠를 다루는 플랫폼도 다양하고 그 경쟁이 치열하다. 그 사이에서 파이퍼는 ‘논픽션’이라는 토양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고 있다.
이야기가 되고 지식이 되는 나만의 경험
먼저 ‘파이퍼’가 만든 편집 툴의 질문을 조금 변형한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해 볼게요. 파이퍼에 대한 핵심 정보를 소개해 주세요.
‘파이퍼’는 경험을 이야기로 만들어 온라인에서 연재하고 종이책으로 발행하는 논픽션 콘텐츠 회사입니다.
논픽션이라는 테마와 콘텐츠를 한 편씩 구매하는 지금과 같은 형식을 택하게 된 과정이 궁금해요. 논픽션만 다루기에는 리스크가 있지 않을까 싶거든요.
논픽션을 택한 건, 우선 제가 실제 세상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서예요. 시장성도 있다고 봤어요. 픽션 시장에서는 웹소설이 기존의 창작자의 범위를 확장하고 새로운 소비를 창출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논픽션은 여전히 기자, 기고자 등이 생산하는 프로의 영역과 커뮤니티, 블로그 등에 업로드되는 아마추어의 영역이 나뉘어 있어요. 영상, 텍스트를 막론하고 콘텐츠 시장 전반이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 파괴, 더 다양한 생산을 통한 맞춤형 소비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논픽션 시장에서도 아마추어가 프로의 영역으로 진입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했어요. 큰 그림에서는 모두가 자기 경험을 콘텐츠로 만들어 공유하고, 필요한 사람이 구입하는 모델이 가능하다고 보았죠.
파이퍼는 ‘포스팅’이 아닌 ‘퍼블리싱’ 콘텐츠를 추구한다고요. 이 둘에 어떤 차이가 있나요?
포스팅하는 글들은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에 가깝죠. 퍼블리싱은 독자를 상정하고 상품을 만드는 과정이에요. 내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자기만족을 넘어 누군가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글을 만든다는 점에서 출판, 즉 퍼블리싱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퍼블리싱하는 사람이 프로 생산자인 거죠.
웹사이트의 카테고리는 크게 하나의 콘텐츠를 의미하는 ‘파이퍼’와 연재물인 ‘매거진’으로 구분되어 있어요.
‘파이퍼(piper)’라는 이름은 연결된다는 의미의 ‘파이프(pipe)’와 종이, 글, 자료를 뜻하는 ‘페이퍼(paper)’에서 연상해서 만들었어요. 생산자와 소비자가 긴밀하게 연결되는 글이라는 의미를 담고 싶었죠. 각각의 파이퍼는 하나의 글로서 온전하게 읽힐 수 있는 단위인 동시에 여러 개를 엮으면 연결성 있는 책이 될 수 있도록 만들고 있어요. 모듈처럼 독립적이면서도 재조합이 가능한 단위를 상정했고, ‘매거진’이라는 단어가 그 묶음을 표현하는 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콘텐츠를 글쓰기·창작, 음식·서비스, 예술·라이프스타일, 스포츠·건강으로 분류한 이유도 궁금해요.
논픽션의 하위 카테고리를 위와 같이 4개로 분류한 이유는 저희가 콘텐츠를 만드는 이유와 관련이 있는데요. 저희는 글을 통해 독자들에게 긍정적인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었어요. 글을 읽고 ‘해보고 싶다’, ‘가보고 싶다’, ‘먹어보고 싶다’ 이렇게 당장 실행할 수 있는 감각을 드리고 싶었죠. 그래서 많은 분이 하고 싶고, 할 수 있다고 느끼는 영역의 경험을 먼저 콘텐츠로 만들어보자고 결정했습니다.
파이퍼의 경험 콘텐츠
경험을 글로 바꾸는 장치로 ‘질문’을 택했어요. 사실, 경험, 해설, 의견, 보완으로 구성된 질문들에 답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편의 글이 완성되는데요.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예요.
저희는 모두가 자기 경험을 콘텐츠로 만드는 생산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거나, 타고나길 잘 쓰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생생하고 재밌는 경험 논픽션을 쓸 수 있다고 보거든요. 오히려 글쓰기 경험이 없는 분들의 글이 더 진솔하고 감동적일 때도 있고요. 그래서 질문을 통해 글쓰기의 허들을 낮추면 더 많은 분이 쉽게 쓰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각 질문은 어떻게 선정했나요?
팀원들이 그동안 콘텐츠 업계에서 일하면서 저자분들께 가장 많이 했던 질문들을 중심으로 구성했어요. 글쓰기 경험이 없는 분들이 쉽게 쓸 수 있고, 편집자가 편집하기 쉬운 구조를 만드는 게 목표였습니다.
오픈 초기에는 분야를 정하고 저자를 찾아 섭외해 콘텐츠를 제작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현재는 어떻게 운영하고 또 퀄리티를 유지하고 있나요?
지금도 저자를 섭외해서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어요. 많은 시도를 해봤지만, 결국은 콘텐츠 제작자인 편집자의 역량이 퀄리티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한 저자를 찾아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목적에 맞게 끌어내는 일을 하는 편집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현현’의 하덕현 대표님, ‘apt’의 김효빈 대표님, ‘별집 공인중개사사무소’의 전명희 대표님 글을 보며 참 섭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업계에서 유명한 분들인데, 어떻게 섭외하고 설득해 글을 쓰게 하셨는지 궁금해요.
저희가 평소에 관심을 갖고 좋아하면서 팬으로서 지켜보고 있던 분들이었어요. 각자의 영역에서 철학을 가지고 일하시면서 멋진 모습뿐 아니라 어려움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공유하시는 분들이라고 느꼈어요. 저희가 생각하는 저자의 기준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꾸미지 않고 진솔하게 말할 용기가 있는 분’인데요. 정말 그런 분들입니다. 파이퍼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말씀드렸을 때, 세 분 모두 공감해 주셨던 것이 섭외에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 아니었나 싶어요.
지금까지 가장 반응이 좋았던 콘텐츠는 무엇이었나요?
3월 말에 출간되는 〈서울 건축 여행〉입니다. 건축 덕후인 저자가 무려 54곳의 서울 속 근현대 건축물을 소개하는 글인데요. 아름다운 묘사와 친절하고 솔직한 감상을 담고 있어요. 감히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글이라 자부합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새로운 정보도 많고, 건축물을 보는 시각도 얻을 수 있어요. 이 글을 읽고 서울이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는 분들이 많아요. 지방에서 서울로 여행 오시는 분들이 참고용으로 구매한다고 말씀해 주시기도 하고요. 출간 전 펀딩을 진행했는데, 목표 금액의 740%인 1,100만 원을 달성했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온라인에서 다시 오프라인으로
자연스럽게 ‘파이퍼프레스’에 대해 소개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파이퍼프레스’는 지난해 9월 론칭한 파이퍼의 출판 브랜드예요. 파이퍼에서 연재한 매거진을 종이책으로 펴내고 있습니다. ‘경험자의 관점이 들어간 실용 지식’을 다루는 ‘경험들’ 시리즈와 단행본을 만들고 있어요.
이미 발행된 콘텐츠를 책으로 만들며, 더군다나 시리즈로 만들며 디자인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경험들’ 시리즈의 디자인에서 중점을 둔 것은 무엇인가요?
책들을 꽂았을 때나 눕혔을 때 모두 독립적인 매력과 특징을 가지면서도 시리즈의 통일성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디자이너님께서 책등을 모았을 때 서로 다른 높이가 리듬감을 줄 수 있고 표지를 모아봐도 각기 다른 패턴에서 리듬감이 느껴지는 형태를 제안해 주셨어요. 색감과 패턴이 더 부각되도록 CCP지를 코팅하는 방식을 선택했고, 판형도 시집 판형에 가깝게 가로 폭이 좁고 길게 만들었습니다. 서점에서 봤을 때 ‘이건 뭐지?’ 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완성하고 싶었어요.
출간한 책과 함께 ‘독서 경험회’라는 오프라인 워크숍도 운영하고 계시죠. 독서 경험회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요?
앞서 저희 글을 읽고 무언가 해보고 싶다는 행동의 변화를 느끼시기를 바란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 연장선에서 기획한 것이 독서 경험회예요. 해볼 수 있는 기회를 드리는 거죠. 〈향수 수집가의 향조 노트〉를 읽고 향조와 향수가 궁금해진 분들께는 시향회가, 〈소설은 실패를 먹고 자란다〉를 읽고 소설 쓰기를 시작하려는 분들께는 소설가인 저자와 함께하는 소설 워크숍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독서 경험회를 진행하면서 이렇게 밀도 높은 대화가 오가는 모임이 정말 흔치 않다고 느끼고 있어요. 하나의 주제에 관심을 갖고, 글을 읽으며 실행의 욕구를 느낀 분들이 모인 자리라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파이퍼가 그리는 미래
파이퍼를 처음 접하는 분들께 추천하는 이용 방법이 있을까요? 창작자인지 소비자인지에 따라 접근도 달라질 것 같은데요. 각각에 맞는 활용팁이 있을지도 궁금하고요.
소비하는 분들이라면, 연재물을 구독하고 이메일로 받아 보시면서 책이 출간되는 과정을 생중계 보듯 경험하시는 걸 추천해요. 책으로 만들어질 퀄리티 높은 글을 무료로 받아 보시면서 저자와의 유대도 쌓을 수 있어요. 창작자라면, 직접 해본 경험과 그 경험의 키워드를 뽑아서 글쓰기를 시작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문장을 유려하게 쓰고, 적확한 단어를 찾는 것 보다 나만의 고유한 경험을 솔직하게 기록하는 것이 훨씬 더 커다란 울림을 줍니다. 작업하시면서 저희 팀에 알려주시면 목차 수립 등의 도움을 드릴 수 있어요.
지난해 출간한 5권의 ‘경험들’ 시리즈와 올해 2월에 출간한 단행본 〈아픔이 내가 된다는 것〉과 출간 예정인 〈서울 건축 여행〉의 가제본. © 파이퍼
2022년 처음 대표님이 구상하셨던 그림에서 지금 어디쯤 와 계시나요?
처음 구상했던 그림과 완전 다른 데에 와 있어요. (웃음) 처음엔 논픽션을 웹소설처럼 연재하면서 회차별로 유료 판매하는 모델을 생각했어요. 논픽션계의 웹소설이 되겠다며 ‘웹논픽션’이라는 말도 만들었고요. 실제로 해보면서 느낀 건, 소설과 논픽션의 소비 구조가 다르다는 거였어요. 소설은 뒷부분을 궁금해하면서 읽어 나가지만, 논픽션은 관심 토픽 자체를 소비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소장하고 싶어 하는 거죠. 그래서 종이책을 시작하게 됐고, 실제로 저희 책을 구입하시면서 ‘향수’, ‘내추럴 와인’, ‘건축’ 같은 토픽을 소장하는 감각을 느끼시는 것 같아요. 콘텐츠가 내 관심사와 정체성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면, 그 콘텐츠를 물성이 있는 굿즈로 소장하게 해주는 게 책이 아닐까 해요.
그동안 파이퍼를 운영하며 대표님께서 나누고 싶은 실행의 경험이 있다면요?
가치 있는 콘텐츠에는 언제나 수모가 있다고 생각해요. 말하기 부끄럽고 창피한 경험이 듣는 사람에겐 가장 도움이 되는 이야기이거든요. 그런 솔직함에서 몰입감 있는 생생한 스토리가 만들어지고요. 저도 언젠가는 저의 수모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를 내고 싶어요. 콘텐츠 비즈니스를 하는 일,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솔직하게 나누는 글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파이퍼의 현재 목표는 무엇인가요?
현재의 목표는 더 많은 분의 다양한 경험을 글로, 책으로 만드는 거예요. 파이퍼에서 다른 사람의 경험을 찾아보며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죠. 경험을 담은 논픽션 IP가 거래되고,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장르로 재창작 될 수 있는 기회도 열릴 거라고 생각해요.
기술이 발전하고 결국 사람의 손에 남겨질 일은, 해야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일 거라고 생각해요. 대표적인 것이 읽기와 쓰기예요. 자주 하지 못하지만 하고 싶고, 잘하고 싶고, 더 많이 하고 싶은 일이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발견하고, 내 이야기를 표현하면서 나를 다듬는 일이라는 점에서 가장 사람다운 일일 거라고도 생각해요. 더 많은 분이 글을 통해서 나를 발견할 기회를 얻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