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FC 전채리 대표
리브랜딩의 기술
CFC 전채리 대표는 현재 리브랜딩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최근 몇 년간 디자인계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 접두사 하나를 꼽으라면 ‘리re’를 들 수 있다. 리사이클recycle, 리뉴얼renewal, 리디자인redesign…. 리브랜딩rebranding 역시 큰 화두다. 리브랜딩의 이유는 다양하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사업 확장이나 신규 서비스 론칭 등 대개 전환점이 필요한 경우 리브랜딩을 선택한다. 거시적 관점에선 이제 한국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긴 시간 검증된 브랜드들의 환골탈태가 새로운 플레이어의 등장만큼 중요해진 시대다. 하지만 리브랜딩은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다. 그저 새로움만 수반한다고 만사형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칫 오랜 팬을 잃을 수 있기에 섬세한 집도가 필요하다. 형태와 내용 간의 흐름을 읽는 CFC 전채리 대표는 현재 이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디자이너의 사이드 프로젝트


방금 새로 연 페쿨리 커피 로스터스(이하 페쿨리)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올라왔어요.(웃음) 예전에 한 매체에서 언젠가 식당을 열고 싶다고 인터뷰한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꿈을 이룬 셈이네요.
카페를 연 것은 사실 꽤나 즉흥적인 선택이었어요. 예전에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베를린 오피스 1층이 캔틴canteen(사내 식당)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식당을 운영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여건이 허락되지 않더군요. 그런데 작년 여름쯤부터 사무실 건물 1층이 공실이 되면서 가볍게 ‘카페를 열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인철 로스터와 친분이 있기도 했고요. 콘셉트 구현부터 협업 디자이너 선정까지 속전속결로 이뤄졌는데 사이드 잡이라는 생각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꿈을 이뤘다는 말은 다소 거창한 것 같습니다.(웃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해도 사실 디자이너가 자기 공간을 대충 만들지 못하잖아요. 작은 공간이지만 하나하나 신경 썼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CFC는 평소 규모가 큰 회사들과 일하기 때문에 프로젝트의 개념이 명확하고 논리 정연해야 합니다. 하지만 페쿨리는 늘 하던 방식이 아닌 ‘느낌적인 느낌’으로 접근하고 싶었어요. 스페인에서 철학을 공부한 강인철 로스터가 남미에서 직접 생두를 수입하기도 해서 이국적인 남쪽 나라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직관적으로 태양이 떠올랐고 여기서 옐로를 키 컬러로 도출했죠. 덜 다듬어진 돌과 나무가 있었으면 했고요. 요즘 매끈한 스틸 소재로 마감하는 힙한 카페가 많잖아요. 반대로 정제되지 않은, ‘뭉툭한’ 분위기로 가면 어떨까 했습니다. 트렌디하지 않아 오히려 일상에서 편히 찾는 카페가 됐으면 했거든요. 무드보드를 만들고 맙소사 김병국 소장에게 나무를 잘 다루는 디자이너 추천을 부탁했는데 목수로 커리어를 시작한 석운동 김지원 소장을 소개해주더군요. 워낙 나무에 조예가 깊은 디자이너라 생각하는 바를 잘 구현해주었어요. 여기에 그림과 소품 등은 평소 개인적으로 사 모았던 것을 가져다 두었습니다.
컨설팅과 자기 공간을 운영하는 것 사이에는 꽤 큰 간극이 있다고 하잖아요. 페쿨리를 직접 운영해본 소감도 궁금하군요.
이제 문을 연 지 석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이야기하기가 곤란하군요. 주변을 둘러봤으면 알겠지만, 이 동네가 워낙 카페 불모지이기도 하고요. 다만 완료와 동시에 손을 떠나는 클라이언트 프로젝트와 달리 지속 가능한 운영과 성장이 필요하므로 꾸준히 애정을 가져야 하는 것 같습니다. 책임감을 갖고 잘 성장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요. 그런데 성장 속도가 너무 빠르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웃음)


리브랜딩, 시대의 화두

본업 이야기로 넘어가죠. 요즘 들어 리브랜딩의 수요가 부쩍 늘었습니다. CFC의 손을 거친 작업도 꽤 되고요. 이렇게 리브랜딩의 수요가 급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처음에는 리브랜딩 프로젝트를 이렇게 많이 진행하고 있는지 인지조차 못 했어요. 곰곰이 원인을 파악해봤는데 역시나 팬데믹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이전에도 물론 리브랜딩 프로젝트가 있었지만, 2020년을 기점으로 수요가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시장 관점에서 보면 유동성 증대와 더불어 플랫폼 브랜드가 빠르게 성장한 게 요인이었죠. CFC가 진행한 런드리고, 당근, 리멤버 등이 대표적입니다. 초기에는 스타트업이 디자인에 예산을 많이 쏟지 못하는데 사용자가 급증하고 조직이 성장하면서 브랜드를 다지는 시기가 앞당겨진 것입니다. 회사 차원으로 보면 마켓컬리를 성공적으로 리브랜딩한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후 스타트업뿐 아니라 레거시 브랜드의 리브랜딩도 맡게 되었어요.
칠성사이다는 24년 만의 큰 변화였고* 예스24도 24년, 한샘은 무려 32년 만의 리브랜딩이었습니다. 회사와 시장의 확대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여러 환경 변화가 많은 리브랜딩을 진행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봐요. 이를테면 웹사이트 기반이었던 온라인 커머스가 모바일로 넘어오면서 모바일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아이덴티티가 필요해진 것이죠. 기존 브랜드의 충성 고객의 연령대가 높아지면서 젊은 신규 고객 유입을 위한 장치도 필요했을 테고요. CFC가 진행한 타임 같은 패션 브랜드가 대표적이죠.
*칠성사이다는 2000년에 정립한 아이덴티티를 2020년에 부분 리뉴얼했다.

SM엔터테인먼트의 CI 리뉴얼도 빼놓을 수 없죠.
기억에 남는 첫 리브랜딩이었습니다. CFC라는 이름을 대중에 각인한 고마운 프로젝트이기도 하고요. 통상 CI 리뉴얼은 매우 진중하고 예민하게 다루는데 그런 일반적인 루트에서 벗어나 더 기억에 남습니다. 원래 회사 내부에서 오래전부터 리뉴얼을 시도했다고 해요. 그런데 그때마다 설립자가 ‘아직 이르다’며 유보했죠. 그러던 중 AI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회사의 확장 방향성이 선명해졌고, 비로소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SM 크리에이티브 디비전으로부터 전달받은 키워드는 ‘인공지능’이었어요. 우리는 스스로 진화하는 인공지능의 개념에 착안해 ‘셀프이볼빙self-evolving’이라는 아이덴티티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그리고 그래픽으로 이를 구현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CFC는 스튜디오 초창기부터 섬세하고 가는 선으로 유려한 형태를 만들어내는 작업에 몰두했는데 SM엔터테인먼트의 CI에서 정점을 이뤘습니다. 원래 예술가도 비슷하잖아요. 수년간 간헐적으로 형식 실험을 하다가 시간이 흐른 뒤 하나의 작품 세계로 집대성되죠. CFC에게 SM엔터테인먼트의 CI가 꼭 그랬습니다. 2017년 1년 내내 투자한 프로젝트였고 2018년에 공개했는데,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모멘트가 됐죠.


2021년 하라 겐야의 샤오미 리뉴얼이나 지난해 재규어 이슈를 지켜보며 리브랜딩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대중이 생각하는, 보이지 않는 변화의 적정선 같은 게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사실 저도 재규어를 보면서 깜짝 놀라긴 했지만(웃음), 샤오미는 적절한 변화였다고 생각합니다. 로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프레임뿐 아니라 로고를 이루고 있는 선 전체에 R값이 들어가 있죠. 작은 변화이지만 기존보다 인상이 훨씬 풍성해졌어요. 오히려 3억 4000만 원이라는 제작비가 너무 적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적정선의 변화’가 리브랜딩에서 중요하고 예민한 지점인 것은 맞아요. 저는 이것이 브랜드의 잔상과 관련 있다고 봅니다. 대중에게 브랜드 이미지의 잔상이 남아 있느냐 없느냐, 남아 있다면 얼마나 남아 있느냐가 척도가 됩니다. 잔상이 없다면 지금부터 구축하면 되지만,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예스24의 이전 로고를 뜯어보면 컬러가 4종이나 돼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색을 다 기억하진 못합니다. 웃는 형상과 파란색 정도만 대중의 잔상에 남아 있기에 이를 중심으로 리브랜딩을 진행했죠.
** 샤오미는 변화의 폭이 적어서, 재규어는 변화의 폭이 너무 커서 비판을 받았다.



내부 관계자들을 설득하는 과정도 무척 중요할 것 같아요.
특히 레거시 브랜드에서 오래 근무한 실무진과 미팅할 때 자주 생기는 일인데, 처음에는 뭐든지 완전히 바꿔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막상 완전히 바꾼 안을 가져가면 손사래를 칩니다. 너무 낯설다고요. 우리는 늘 이미지를 다루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제 적정선에 대한 감이 어느 정도 있어요. 다만 설득을 위해 전혀 아닌 디자인 안도 가져갑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아닌 것도 알게 되니까요.
요즘 기업들이 CFC를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공감의 폭이 넓다는 게 장점이 아닐까 싶네요. 다른 디자인 전문 회사들이 클라이언트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내 작업’, ‘내 포트폴리오’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묻어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는 내 것이라는 욕심을 내려놓고 브랜드 안에 최대한 깊숙이 들어가려고 합니다. 최종 의사 결정권자인 경영진뿐 아니라 초반에 커뮤니케이션하는 실무진과도 공감대 형성을 위해 노력하죠. 심지어 엉뚱한 의견을 제시하는 구성원의 이야기도 경청하고요. 또 한 가지 우리를 찾는 이유는 포기하지 않는 태도 때문이라고 봅니다. CFC의 포트폴리오를 살펴보면 하나같이 쉽지가 않습니다. 조직의 규모가 크고 의사 결정 프로세스도 복잡하죠.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고요. 그럼에도 끝까지 책임감 있게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파트너라는 신뢰가 업계 전반에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줄 수 있나요?
얼마 전에 공개한 뚜레쥬르의 리디자인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이해당사자가 많은 데다 미국에도 진출해 있는 터라 유니버설한 디자인이 필요했죠. 과업 중 축약형 엠블럼이 있었는데 이게 이슈가 됐어요. 바삭한 질감의 ‘TOUS’, ‘JOURS’와 부드러운 필기체의 ‘les’가 결합된 로고타이프를 축약한 엠블럼은 질감 있는 ’T’와 ‘J’ 사이를 소문자 스크립트 ‘l’로 연결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내부 반응이 좋았어요. 그런데 미국 법인에서 현지인 일부가 소문자 ‘i’을 ‘e’로 인식한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이미 프로젝트가 꽤 진척된 상황이라 난감했죠. 안팎에서 ‘할 만큼 하지 않았냐?’라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처음 스터디할 때 나온 안을 완전히 뒤집고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완성했어요. 시안이 나왔을 때 ‘이건 통과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성장하는 디자이너

그렇게 또 하나 배운 셈이네요.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늘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CFC 설립 초기와 지금을 비교해볼 수 있을까요?
인터브랜드와 스톤브랜드커뮤니케이션즈에서 6년 정도 일을 하고 독립을 결심했어요. 원래 6년 차쯤 되면 디자이너들이 ‘근자감’ 같은 게 생기나 봐요.(웃음) 저도 좀 무모하지만 나름대로 자신 있게 스튜디오를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때 저는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던 것 같아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지도 못했던 것 같고요. 지금은 최소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는 아는 것 같습니다. 아주 어려운 이론서를 예로 들면 예전에는 다음 장에 무슨 내용이 나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한줄 한줄 간신히 이해해가며 읽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끝까지 한 권을 완독해서 대략 목차 정도는 파악하는 수준이 되었다고 할까요? 여전히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지만요. CFC라는 스튜디오명은 “디자인은 형태와 내용 간의 흐름이다(Design is a relationship between form and content)”라는 폴 랜드의 말에 착안해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설립 당시에는 그저 청사진에 불과했던 것 같아요. 13년을 거치는 동안 다양한 실천이 이어져 이제 이론을 넘어 좀 더 손에 잡히는 느낌이 듭니다. 아, 한 가지 더 이야기하면 이제 웬만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됐어요. 클라이언트로부터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피드백을 받아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라고 약간 수도승처럼 넘어가게 되는 것 같아요.(웃음)


뭐랄까, 속세를 초월한 구도자 같군요.(웃음)
예전에는 작업이 막히거나 까다로운 클라이언트와 맞닥뜨렸을 때 스트레스가 극심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같은 상황이라도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게 됐습니다. 상황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죠. 단순히 제 개인의 성장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들에게도 “우리 한 2주는 힘들겠다. 하지만 결국 잘될 거야”라고 이야기해줍니다. 저와 함께 산전수전을 겪은 디자이너들이다 보니 이 말을 신뢰하는 것 같아요. 어찌 보면 CFC를 통해 13년간 얻은 가장 큰 자산은 그 믿음을 공유하는 구성원일 수도 있겠네요.
업력이 쌓인 회사가 잘 해낼 수 있는 프로젝트가 따로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맞아요. 2019년쯤에 우리에게 지금 같은 규모의 CI 프로젝트가 들어왔을 때 대부분 거절했습니다. 제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디자인도 스포츠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트리플 악셀 같은 고난도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 죽도록 노력하고 시도하다가 어느 순간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죠. 그럼 그다음에 더 어려운 기술에 도전할 수 있고. 그런 내공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리브랜딩도 마찬가지죠. 앞서 적정선의 변화에 관해 이야기 나누기도 했지만, 무엇을 취하고 버려야 할지 판단할 줄 아는 내공이 필요한 것 같아요.
물론 여전히 부담은 됩니다. 한샘 리브랜딩 프로젝트 의뢰가 들어왔을 때도 ‘파오스가 설계한 저 전설적인 로고를 어떻게 건드려?’라고 생각했어요. 국내에서 코카-콜라에 준하는 인지도를 가진 칠성사이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아니면 또 누가 이걸 해?’라는 생각도 듭니다. 특히 칠성사이다는 각별한 사명감으로 임한 프로젝트였어요. 전 국민이 다 아는 대량생산품인 만큼 정말 잘하고 싶었어요. 칠성사이다는 단순히 미려한 그래픽만 뽑아서 되는 일이 아니었어요. 쉽게 말해 매대에서 코카-콜라와 환타 사이에서 경쟁할 수 있는 아이덴티티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재미있네요. 워낙 유통 시장이 온라인 중심으로 흐르다 보니 여전히 매대 경쟁이 중요한 상품이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녹색 배경에 별을 큼지막하게 프린트한 디자인을 구상했어요. 이미지로만 봤을 때는 그게 더 세련되고 쿨했을 거예요. 하지만 매대에 놓는다고 가정하니 이 안을 고집하기 어렵더군요. 일단 별 모양만큼이나 사선이 대중에게 강렬한 잔상으로 남아 있는 만큼 타사와 구별되는 브랜드의 고유성을 지켜야 했어요. 그리고 보통 매대에는 가격표를 꽂는 단이 있기 때문에 너무 하단에 시각 정보를 배치하면 현장에서 잘 보이지 않을 우려도 있었죠.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해야 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서 한 가지 의미 있는 것은 페트병 디자인에 국영문을 듀얼 페이스로 적용했다는 점입니다. 캔 디자인에선 면적의 한계상 구현하지 못했지만 페트병에는 한글과 영문을 함께 기재해서 오랫동안 브랜드를 향유한 소비자들도 위화감 없이 제품을 수용할 수 있도록 했어요.


지금까지 F&B, IT, 뷰티, 리빙, 유통 등 다양한 산업 분야의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클라이언트를 선택하는 기준이 있나요?
아마 많은 브랜드 디자인 전문 회사가 비슷한 생각을 할 텐데, 같은 산업군의 프로젝트를 연달아 진행하는 것은 가급적 피하려고 합니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편이죠. 클라이언트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고요. 프로젝트를 선택할 때는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에 우선순위를 두는 편입니다. 금융, 패션, 엔터테인먼트… 지금은 방산 관련 산업에도 손을 대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건 늘 즐겁습니다. 제가 언제 전투기 이름과 특성을 줄줄 외우겠어요.(웃음) 그리고 이렇게 축적한 지식이 언젠가 다른 산업과 연결이 되더군요. 무엇보다 브랜딩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은 인간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과정 같아요.
그렇다면 어떤 프로젝트에 도전해보고 싶나요?
동시대의 화두에 늘 관심이 많아요. 예전에는 케이팝이었고 지금은 AI겠죠. 계속해서 시류를 파악해야 우리도 성장하고 진화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심벌 프로젝트도 진행해보고 싶어요. 스타벅스의 세이렌 디자인 리뉴얼이 무척 인상적이었거든요. 지금은 로고 트렌드가 로고타이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지만요.
원래 영원한 트렌드란 없는 법이죠.
한국적인 브랜드의 프로젝트도 맡아보고 싶습니다. 무인양품의 브랜드 전반에 일본의 미학이 서려 있는 것처럼 한국적 미감과 감수성을 담는 브랜드가 있다면 BI부터 제품 디자인까지, 철학부터 비주얼까지 하나의 세계를 다듬고 완성해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브랜드일 테지만 말이죠.

브랜딩 작업을 위해선 다양한 소양이 내재화되어야 할 것 같아요. 인사이트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이 있나요?
사실 늘 일에 치여 살다 보니 따로 시간을 내어 공부하진 못해요. 대신 전시를 보든 책을 읽든,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흐름을 파악하려고 노력합니다. 현상 너머의 의도를 읽는 것이죠. 예를 들어 2022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언커머셜: 한국 상업사진, 1984년 이후〉전은 연대기별로 전시를 구성한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역사적 맥락이라는 관점에서 기획한 게 눈에 들어오더군요. 10~20년쯤 뒤에 아이덴티티 디자인 전시를 이러한 방식으로 구성해봐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전혀 다른 곳에서 영감받은 것을 제 일에 대입해 상상하기도 해요.
최근에도 그런 케이스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아직 공개하기 어렵지만 멀티 아이덴티티 프로젝트 의뢰가 하나 들어왔어요. 처음에는 손에 잡히지 않아 고민을 했는데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다가 감이 왔습니다. 영화 속 멀티버스를 멀티 아이덴티티로 치환할 수 있겠다 싶었죠. 예전 미셸 공드리의 영화처럼 유사한 형태의 시각 이미지가 서로 다른 시퀀스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가 되는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이에 맞게 프로젝트를 전개하고 있어요.

클라이언트 자신조차 미처 알지 못했던 강점을 포착하는 것도 디자이너의 역할이 아닐까 싶어요.
보통 우리가 하는 일이 그렇죠. 단순히 형태를 만들어달라는 요청보다 추상적인 상태로 의뢰하는 경우가 더 많아요. 예를 들어 런드리고의 경우 기존 디자인이 나쁘지 않았는데 내부 구성원들과 인터뷰해본 결과 이 디자인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르겠다는 의견이 많았어요. 달리 말해 새로운 BI에는 자신들이 하는 일이 녹아 있기를 바랐죠. 현장 실습으로 런드리고 공장을 갔는데 수백 대의 드럼 세탁기와 드라이 머신이 줄지어 있고 동그란 창 안에서 빨래가 돌아가는 장면이 스펙터클하게 다가왔습니다. 런드리고 서비스의 특징 중 하나가 빨래가 집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온다는 것이죠. 여기에 재사용과 재활용 등 환경을 생각하는 브랜드의 특성까지 담아 ‘고Go’의 대문자 알파벳 G와 순환을 뜻하는 화살표를 연결했죠. 티빙도 비슷합니다. 인터뷰를 통해 티빙이 긴 호흡의 시리즈만큼 30분 내외의 짧은 콘텐츠와 예능에 강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시청자 피드백을 적극 수렴한다는 인상도 받았고요. 쉽게 말해 시청자와 브랜드 간의 케미스트리가 좋았습니다. 이를 적극 브랜드 아이덴티티 안에 녹였는데 단순히 즐거움을 표현해달라는 의뢰가 고도화된 시각화로 나타났습니다.
변치 않는 본질과 맥락

클라이언트 티빙 프로젝트 디렉션 티빙(황혜정, 윤지선, 오나원, 이서영, 강유혜, 김다민, 이두용, 박혜미) BI 시스템 디자인 CFC(전채리, 강새롬, 김세윤, 김지영, 최정문)
바야흐로 브랜드 전성시대입니다. 작은 구멍가게조차 브랜딩을 하는 시대죠. 게다가 대중과의 접촉면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났고요. 이럴 때일수록 브랜딩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교과서 같은 이야기이지만 본질이 역시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달리 말하면 자기다움을 파악하는 것이죠. 그건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으로 치면 인생을 통해 켜켜이 쌓은 자기만의 맥락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단순히 유행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요.
솔직히 여기서 디자인 전문 회사의 딜레마가 느껴지네요. 아무리 멋진 디자인이라고 해도 결국 자기다움을 만드는 것은 클라이언트의 몫 아닌가요?
맞습니다. 가끔 CFC의 디자이너들이 제게 하소연해요. 몇 달에 걸쳐 고민하고 고생해서 만든 브랜드가 한 달도 되지 않아 이상하게 쓰일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때마다 “이미 우리 손을 떠났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브랜드를 숙성하고 성장시키는 것은 클라이언트의 몫입니다. 왜 브랜드를 만들었는지 혹은 개선했는지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사 이야기를 나눠보죠. 직원들의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마련한 조직 문화도 있는지 궁금하네요.
일단 처음 채용할 때부터 각기 다른 역량을 가진 사람을 뽑으려고 노력해요. 누구는 새로운 기술에 강점이 있다면, 또 다른 누군가는 글을 잘 쓰거나 논리적인 설계를 잘할 수도 있고요. 서로 장점이 다른 구성원들이 만나 스튜디오 안에서 서로에게 배우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굳이 조직 문화를 한 가지 꼽자면 입사순으로 서너 명씩 해외로 인사이트 트립을 가게 지원해줍니다. 어린 직원의 경우 해외 경험이 부족한 친구들도 있거든요. 그래서 멋진 해외의 디자인 결과물이라고 해도 핀터레스트와 비핸스에서만 접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사실 디자인은 그 현장의 맥락에 놓여 있을 때 더 빛이 나는 법이잖아요. 짧은 순간이라도 그것을 현장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려고 해요.
스튜디오 내에서 AI는 좀 활용하는 편인가요?
코딩 기술을 구현하기 위해 일부 코딩값을 챗GPT에 물어보긴 하지만 아직 그 이상 적극적으로 활용하진 않습니다.
작년에 한 브랜드 전문가와 이야기 나눈 적이 있어요. 생성형 AI로 브랜딩 작업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현재로서는 어렵다고 답하더군요. 아이덴티티 안에 함축된 의미를 피상적 표현으로 다 드러내기 어렵다는 이유였죠.
동의합니다. 생성형 AI가 디자인을 못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브랜드에서 중요한 것은 명분과 이유예요. 브랜드는 그 자체로 주술적 의미도 있는데 그것을 설계하고 사유하는 과정 없이 기계가 뚝딱 만들어낸 것을 사용할 순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한편으로 회의감도 느낍니다. 이유가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모든 게 분절되고 파편화된 이 시대에 명분이나 맥락이 과연 필요할까요? 영상만 봐도 서사가 있는 롱폼 콘텐츠보다 자극적이고 단선적인 쇼트폼이 주목받잖아요.
쇼트폼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면 긴 호흡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는 오히려 후자가 있었기에 인류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조금 바보 같아도 우직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필요하죠. 한 가지 덧붙이자면 설령 그것 하나하나는 파편일지라도 그 이상의 의미를 생성하려면 결국 맥락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스포티파이의 탄생기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플레이리스트〉를 보면 한 등장인물이 구슬을 가져와서 원하는 대로 꿰어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와요. 개별 음악은 편린일지 몰라도 그것을 자기 삶에 맞게 맥락 속에서 꿰어내는 것이죠. 결국 인간이란 끊임없이 규칙과 질서를 부여해 맥락을 만들어내려는 존재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