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을 동시대적 감각으로 보여준다는 것
유민지 국립민속박물관
디자인 잘하는 박물관으로 국내에서 첫손에 꼽히는 국립민속박물관은 박물관 최초로 인하우스 전시 디자이너를 채용하고 유니버설 디자인을 전시 디자인에 접목했다. 연못에 던진 돌이 서서히 파동을 일으키듯 이곳의 변화도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했다. 그 출발점에는 18년 동안 전시 디자이너로 근무하고 있는 유민지 학예연구사가 있다.

만약 ‘민속’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고루하다고 느낀다면 국립민속박물관을 둘러보기를 추천한다. 그곳의 디자인이 그런 시각을 교정해줄 테니까. 실제로 국립민속박물관은 디자인 잘하는 박물관으로 국내에서 첫손에 꼽힌다. 박물관 최초로 인하우스 전시 디자이너를 채용했고 유니버설 디자인을 전시 디자인에 접목했다. 또 실력 있는 디자이너들과 협업해 포스터, 리플릿, 도록, 전시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남다른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연못에 던진 돌이 서서히 파동을 일으키듯 이곳의 변화도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했다. 그 출발점에는 18년 동안 전시 디자이너로 근무하고 있는 유민지 학예연구사가 있다.

“전시 디자인은 글로 정리된 기획 의도를 공간에 입체적으로 펼치는 작업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박물관에서 전시 디자이너를 뽑는 일이 드물었다.
지금은 전시 디자이너로 일하는 인원이 학예연구사 3명, 연구원 10명가량 되지만 입사하던 2006년만 해도 2명에 불과했다. 2004년부터 전시 디자이너를 정규직 학예연구사로 채용하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는 전배호 디자인 전문 경력관은 내 사수였다. 큐레이터들도 전시 디자이너와 어떻게 협업해야 할지 몰라서 어려워했고 우리도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크레디트에 전시 디자이너의 이름이 안 올라가던 시절이었다. 우리 박물관이 가장 먼저 디자인에 참여한 회사명과 디자이너를 밝히기 시작했다.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2003년 김홍남 관장이 부임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예일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면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 앞서나간 고객 경험 서비스를 경험하고 돌아온 덕분이다. 박물관 로비나 카페, 기념품점 등 각종 시설 환경에 대한 개선이 이루어졌고 상설 전시관도 리뉴얼이 시작됐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전시 디자인을 아카이빙한 출판물을 기획했다.
참고할 만한 기초 자료가 부족했던 입사 초기, 전시 디자인에 관한 책이 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디자이너가 있는 우리 박물관이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에 전배호 디자인 전문 경력관과 의기투합해 전시 디자인에 관한 출판물 발행을 제안했다. 물론 전시 도록이라는 형태로 책이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전시 개막식 때 도록이 현장에 비치되어 있어야 한다는 관념 때문에 유물 사진은 실어도 전시장 사진은 일정상 생략되곤 한다. 전시 디자인은 기록으로 잘 남지 않는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2010년 〈전시=기획×디자인〉이라는 책이 탄생했다. 전시는 기획과 디자인이 맞물려 완성되는 것이라는 취지에서 책 제목을 부호를 섞어서 지었다. 시리즈 형식으로 지금까지 총 3권의 책이 나왔는데 다음 전시 디자인을 기획할 때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도 있어 매우 유용하다.


〈전시=기획×디자인〉에는 어떤 내용을 담았나?
안그라픽스가 디자인한 첫 번째 책에는 2006~2009년 동안 개최된 기획 전시 16건에 대한 전시 디자인을 꼼꼼하게 수록했다. 두 번째 책과 세 번째 책은 각각 2014년과 2019년에 나왔다. 매번 전시를 마치고 나면 결과 보고서를 정리하는데 거기에는 전시 기획 의도, 유물 리스트와 대여처, 관람객 설문 조사 결과만 싣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책을 만들게 된 이후로는 템플릿을 마련해 정해진 카테고리에 따라 책에 실릴 디자인 소스를 미리 취합하고 있다. 다음 시리즈는 내년쯤 출간할 예정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유니버설 디자인을 국내에서 최초로 도입한 박물관 사례로도 자주 회자된다.
박물관에는 〈한국인의 하루〉 〈한국인의 일 년〉 〈한국인의 일생〉이라는 주제로 3개의 상설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2018년부터 순차적으로 리뉴얼을 시작했고 2021년 재개관한 상설 전시관 2 〈한국인의 일 년〉의 전시 디자인을 내가 맡았다. 12년 만의 개편이었기에 진열장, 영상 미디어, 그래픽, 조명 등 천장에서 바닥까지 전시 연출 요소의 모든 것을 전면적으로 탈바꿈시킨 프로젝트였다. 이때 시각장애인과 약시자를 고려한 촉각 전시물과 점자 패널, 촉지도를 처음 전시장에 설치했다. 사실 소수의 관람객에 대한 배려는 차순위로 밀려나기 십상이다. 하지만 박물관이야말로 모두를 위한 공간이지 않나? 시각장애인과 약시자도 전시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각종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지 여부가 박물관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믿었기에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의지를 다질 수 있었다.
당사자인 시각장애인들의 피드백을 얼마나 반영했나?
우리의 노력에 공감하고 선뜻 도움을 준 장애인 단체들이 있었다. 촉각 전시물이 너무 날카롭게 느껴진다는 피드백을 수용해 모형을 다듬었고, 점자의 자간과 행간, 문장의 길이가 적절한지도 의견을 물었다. 글자가 너무 작으면 약시자가 읽기 힘들 수 있기에 큰 글씨로 전시 해설문을 출력한 ‘빅 레이블(대활자 책자)’을 별도 비치했다. 서울공예박물관이나 국립한글박물관에서도 촉각 전시물을 도입하는 등 유니버설 디자인이 확산되고 있어 고무적이다. 박물관 내 시각장애인을 위한 각종 장치는 일반 관람객이 일상에서 장애인을 의식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그 외에도 국립민속박물관만의 특별한 전시 디자인이 있다면?
국립민속박물관은 다른 박물관과 다르게 유물 자체보다 유물 간의 맥락이나 관계를 통한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소장품 대부분이 민속품이다 보니 국보급 유물을 주로 취급하며 오브제 자체에서 드러나는 형식과 예술성에 집중하는 국립중앙박물관과는 접근 방식부터 다른 셈이다. 따라서 우리 박물관은 전시 디자인과 연출 방식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와 더불어 영상이나 인터랙티브 미디어, 사운드도 생동감을 표현하는 데 효과적인 장치다.
〈한국인의 일 년〉전에서도 각종 미디어 장치를 활용한 점이 두드러진다.
사계절을 담아야 하는 전시였다. 이럴 경우 각 계절에 따라 키 컬러를 정해 그래픽 요소로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전시 디자인 접근 방식이다. 여름에는 블루, 가을에는 브라운,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뻔한 구성에서 탈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 가지 톤으로 담백하고 정적인 공간을 연출했고 한 섹션에서 다음 섹션으로 넘어갈 때마다 영상 사이니지로 강조했다. 기간이 정해져 있는 특별전은 디자인에 트렌드를 반영하는 편이지만 약 10년을 주기로 개편하는 상설전은 달리 접근해야 한다. 지나치게 튀는 컬러를 사용하거나 최첨단 테크놀로지로 과도하게 연출했을 때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촌스럽거나 시대에 뒤처지는 듯한 느낌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유행하는 VR·AR 등 실감형 콘텐츠를 과도하게 적용하기보다 계절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장치로 영상 미디어를 적절히 활용했다.
얼마 전까지 열린 〈길상 특별전: 그 겨울의 행복〉에서도 프로젝션 매핑으로 겨울 분위기를 연출했다.
전시 디자인은 글로 정리된 기획 의도를 공간에 입체적으로 펼치는 작업이다. 요즘 관람객은 정해진 동선을 따르기보다 주체적으로 전시를 감상하는 쪽을 선호한다. 〈길상 특별전: 그 겨울의 행복〉전은 섹션 순서대로 보도록 벽을 세워서 구획을 명확하게 나누지 않았다. 대신 메인 공간에 들어서면 환한 개방적인 공간이 펼쳐진다. 여기에 눈이 내리면서 소복하게 쌓이는 포근한 풍경을 벽면과 바닥에 영상으로 연출했다. 그리고 양쪽에 박스형 공간을 지어서 섹션을 구분했는데 이곳에는 낮은 층고와 조도로 유물 감상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이때 답답한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 중정의 눈 내리는 풍경과 연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벽에 창을 냈다.

2021년 개관한 국립민속박물관 파주관은 개방형 수장고 형식을 도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물관은 유물 보호를 우선순위로 하기에 개방형 수장고 콘셉트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위험에 대비해 수장대에 도어와 시건 장치를 달아야 했다. 또 보수를 한다거나 대여 요청이 들어올 때는 관리자가 유물의 반입, 반출을 편리하게 할 수 있는 부분도 고려해야 했다. 실제로 ‘수장’과 ‘전시’는 공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여러 제약 조건을 어떻게 풀어낼지 고민한 끝에 새로운 수장형 전시 디자인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었다. 파주관 로비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ㄷ자형 수장고는 1.8m×1.8m 그리드 체계 안에서 시각적 통일감과 개방감을 주도록 설계했다. 각양각색의 유물 사이즈에 맞게 선반과 서랍장을 모듈형으로 제작하고 각 유물의 형태가 잘 보이도록 조명에도 신경 썼다.
지난해 파주관에서 열린 〈민속×공예: 소소하게 반반하게〉전은 현대적 미감으로 풀어낸 전시 디자인이 인상적이었다.
목가구를 전시한 16수장고는 로비 타워형 수장고와는 대조적인 블랙 큐브 형식이 특징이다. 이곳에서 열린 〈민속×공예: 소소하게 반반하게〉는 동시대 디자이너들의 현대적 소반과 반닫이를 보여주는 작은 규모의 기획전이었다. 전시명도 내가 아이디어를 낸 터라 각별하다. 전통적인 나무 소재에서 탈피해 다채로운 컬러와 소재를 적용한 소반 작품이 전시됐는데 이를 부각하기 위해 포스터나 집기 디자인에도 다양한 고채도 컬러에 광택감을 살린 마감재를 접목했다. 건물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직선 모티브를 이 전시에서는 ‘전통’과 ‘현대’라는 시간의 간극을 연결하는 의미로 재해석했다. 집기 디자인은 제로랩, 포스터를 비롯한 각종 그래픽 디자인은 로호타입, 모션 및 영상 디자인은 1-2-3-4-5와 호흡을 맞췄다.



외부 디자이너와 협업을 잘하는 박물관으로도 알려져 있다.
전시 콘셉트에 잘 맞는 디자이너를 찾아내고 이들이 내 상상을 뛰어넘는 멋진 시안을 제안할 때 짜릿함을 느낀다. 〈소금꽃이 핀다〉전에서 소금 결정체를 연상시키는 타이포그래피를 포스터에 부각시킨 스튜디오fnt의 이재민 실장, 〈호랑이 나라〉전에서 호랑이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고준호 일러스트레이터가 떠오른다. 좋은 전시 디자인은 커뮤니케이션에서 비롯된다. 우리와 함께 일하고 다음에 더 좋은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다들 잘나가는 디자이너로 성장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실력 있는 디자이너를 발굴하는 등용문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대한 나름의 자부심도 있다.
전시 디자인을 할 때 고민이 있다면?
얼마 전 고 이어령 선생의 1주기를 맞아 지우헌 갤러리에서 열린 〈우리 문화 박물지〉 특별 북 토크에 연사로 초대됐다. 전통문화와 디자인을 바라보는 이어령 선생의 통찰력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이야기를 참석자들에게 공유했는데 전시 디자인을 할 때도 한국성을 어떻게 풀 것인지가 어려운 숙제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한 민속품은 계층적 스펙트럼이 넓다. 외국인은 관람 만족도가 높은 편인 데 비해 내국인은 양반 문화가 아닌 평민의 소소한 일상을 박물관에서 보여주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는 듯하다. 이런 의식을 디자인으로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올해 초 국립민속박물관 어린이박물관으로 팀을 옮겼는데 전시 디자인은 물론 전시 기획, 운영까지 맡게 되어 어깨가 무겁다. 당장은 5월 5일 어린이날을 앞두고 〈달토끼와 산토끼〉전을 준비하고 있고, 어린이박물관 곳곳을 차차 리뉴얼할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