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발드 스피커르

[장인의 21세기 생존기] 전통 인쇄 기법을 고수하는 서체 디자이너

에발드 스피커르(Ewald Spieker)는 전통 인쇄 기술을 사용해 손으로만 작업하는 장인적인 디자이너다. 내성적인 성격도 딱 장인 같다. 그의 작업실 이름은 ‘타이포 갤러리(Typo Gallery)’. 비영리로 운영하는 이곳은 외부인에게 항상 무료 개방이다. 그러나 36년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이 갤러리가 곧 문을 닫는다. 이 인터뷰는 아마 이곳의 마지막 기록이 될 듯하다.

에발드 스피커르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는 손 가는 대로 즉흥적으로 써 내려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70 평생 동안 붓 1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을 정도로 한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런 부단한 노력 그 자체가 장인 정신일 것이다. 이번 특집에서는 제품의 가치를 창조하는 장인이 21세기 디자인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이를 위해 장인과 협업하는 디자이너, 전통 기법을 직접 활용하는 디자이너, 장인들이 모인 공방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에발드 스피커르(Ewald Spieker)는 전통 인쇄 기술을 사용해 손으로만 작업하는 장인적인 디자이너다. 내성적인 성격도 딱 장인 같다. 그의 작업실 이름은 ‘타이포 갤러리(Typo Gallery)’. 비영리로 운영하는 이곳은 외부인에게 항상 무료 개방이다. 그러나 36년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이 갤러리가 곧 문을 닫는다. 이 인터뷰는 아마 이곳의 마지막 기록이 될 듯하다. 에발드 스피커르전통 인쇄 기법을 고수하는 서체 디자이너 에발드 스피커르는 1980년부터 현재까지 전시회를 통해 자신의 작업을 알려왔다. 대부분의 전시가 네덜란드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인지, 아님 그의 유별나게 장인적인 성격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네덜란드 국경을 넘어서는 순간 그의 이름은 다소 생소해진다. 하지만 그가 1981년 네덜란드 소설가 윌렘 프레데릭 헤르만(Willem Frederik Hermans)의 60세 생일을 기념해 35권만 제작한 책이 있는데, 현재 수집가들 사이에서 시가 3000유로(한화 약 425만 원)에 거래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막상 이 책을 제작한 에발드 자신은 선물로 증정한 책이라 단 1유로의 수입도 없었다는 게 속사정이지만. 온화하나 고집 있는 이 서체 디자이너를 만나기 위해 지난 5월 5일 암스테르담을 방문했다. 디자이너들에게 유명한 드로흐 숍(Droog Shop)과 니호프 & 리(Nihof & Lee) 서점 사이에 있는 이 작은 타이포 갤러리의 외관은 얼핏 볼품없어 보인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오래된 인쇄 기계와 활자 선반으로 가득 찬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에발드는 1974년 게리트 리트벨트 아카데미(Gerrit Rietveld Academy)를 졸업하고나서 줄곧 이 자리를 지켜왔다. 모교에서의 강의도 그만둔 그는 각종 워크숍 요청과 인턴 문의도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다. 작업실에 틀어박혀 ‘서체’를 가지고 골몰할 뿐이다. 직접 서체를 개발하는 건 아니나 이미 통용되는 서체로 실험적인 작업을 선보이는 게 그의 디자인 특징. 36년 동안 한결같은 점이 있다면 전통 인쇄 기법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주로 서체를 이용한 인쇄 작업이었다. 그러다 서체에 두께를 주거나 서체 형태를 입체적 의자로 만드는 등 제법 스케일이 큰 가구에 이르기까지 ‘서체’라는 소스를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더구나 이 모든 작업은 100% 손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네덜란드 타이포그래피의 전통을 잇는 사람이다. 네덜란드의 예술 대학은 아직도 인쇄소와 활판 인쇄기를 갖추고 있으며, 학생이 직접 이 인쇄기를 다루는 걸 당연시한다. 하지만 서체 개발 자체가 컴퓨터를 통한 작업이 되었고, 많은 인쇄소가 가격 경쟁에 밀려 문을 닫는 국면에 처한 것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에발드는 “기본적으로 나는 현대 기술을 동경하는 사람이다. 컴퓨터로 모든 게 가능한 시대이기는 하지만 젊은 디자이너들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연습을 꼭 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종이를 직접 만지고 자르는 아날로그 방식을 경험하는 동안 예상치 못한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인터뷰는 무척 어렵게 성사됐다. 인터뷰 날짜가 다가올 즈음 “갤러리 문을 곧 닫아야 하기 때문에 인터뷰가 힘들 것 같다”는 절망적인 답을 보냈기 때문이다. 임대인에게 타이포 갤러리를 비워달라는 마지막 통고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작업실의 마지막 모습을 남기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에발드는 다시 마음을 바꿨다. 기술 발전으로 점점 거처를 잃어가는 건 장인만이 아니다. 이를 수호하려는 디자이너 역시 그랬다.

interview
에발드 스피커르
“아날로그 방식에서 예상치 못한 발견을 할 수 있다. 시도해보라.”

당신은 30년 넘게 한자리에서 비영리로 갤러리를 운영했다. 갤러리를 운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또한 당신의 타이포 갤러리는 어떤 곳이며, 어떤 전시를 했는지 짧게 설명을 부탁한다. 

나는 돈 버는 데 소질이 없다. 갤러리가 자리 잡은 암스테르담 지역의 분위기를 좋게 만들고 싶은 단순한 기대로 시작한 공간이다. 그렇기에 건물주가 무료로 건물을 사용할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건물주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갤러리를 비워달라는 말을 들었다. 30년 넘게 이 공간을 무료로 쓸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정든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건 슬프다.

인쇄 기술을 어떻게 배웠는가? 

대학 시절 학교 안의 인쇄실에서 독학했다. 당시 혼자 인쇄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좋아 기계를 다뤄가면서 이해했다. 이렇게 오래된 기계들은 따로 사용법이 없다. 그저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해야만 한다.

손으로 작업을 하면 노동 시간이 길어진다. 작업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일반인에게 열린 공간이라 항상 방문객이 있다. 혼자서 외롭게 작업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웃음) ‘타이포 갤러리’라는 간판 때문에 그래픽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주로 방문한다. 이곳이 많이 알려지면서 많은 곳에서 견학이나 워크숍 문의를 하는데,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방문하면 내 개인 작업에 방해가 되므로 늘 거절한다.

여기 있는 기계들을 어떻게 모았는가? 

선물받은 인쇄기도 있고 직접 찾아 다니며 구한 것도 있다. 내가 가장 아끼는 기계는 200년 전에 만든 인쇄기다. 구텐베르크를 기념해 그의 조각상으로 장식했다. 문 닫은 인쇄소 꼭대기 층에서 어렵게 이곳으로 운반했다. 기계 위에 사람 모양의 조각이 보이는가? 이 사람이 바로 구텐베르크다. 이 기계는 다음 작업실에도 반드시 가져가야 할 물건이다.

기계로 생산해도 요즘은 높은 품질을 보장한다. 이런 시대에 장인 정신으로 만든 제품은 어떤 가치가 있나? 

장인이 손으로 만든 제품은 완벽하진 않지만 감성적인 면에서 완벽하다. 사람의 손맛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수작업과 장인은 계속 유지될 것이다. 고백하자면 난 현대 기술을 동경하는 사람이다. 내가 컴퓨터에 소질이 없어 그런지 자유자재로 디지털 도구를 다루는 젊은 디자이너를 보면 놀랍다.

그렇다면 아이폰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어떤가? 

판타스틱(Fantastic)! 사진을 넣어서 볼 수 있는 기능 때문에 하나 갖고 싶지만, 가족들이 모두 내게 안 어울리는 기계라고 한다.(웃음) 나에게 핸드폰은 전화를 걸고 받는 기능만 있으면 되니까. 내 전화기를 보고 싶은가?(그는 노키아의 구식 바 형태 핸드폰을 꺼내 보여줬다.) 지금 이런 핸드폰을 보려면 박물관에나 가야 할 거다.

네덜란드에서 장인에 대한 대우는 어떤가? 

일반인들에게조차 장인에 대한 기본 인식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레터프레스 같은 옛날 인쇄 방식을 배우고자 하는 어린 학생의 수도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장인에 대한 정부 보조는 점점 없어지고 있다. 내가 작업을 시작한 초기에는 정부 보조가 조금 있었지만 현재는 아무것도 없다. 개인적으로 유럽에서 장인에 대한 대우는 벨기에, 프랑스 쪽이 좋다고 알고 있다.

요즘 디지털로 작업하는 젊은 디자이너를 보면 감각에 치우친 경향이 많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이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컴퓨터로 모든 게 가능하지만, 손으로 만드는 연습을 꼭 했으면 좋겠다. 종이를 직접 만지고, 자르고, 색을 칠하는 경험을 하는 아날로그 방식에서 예상치 못한 발견을 할 수 있다. 시도해보라.

당신의 작업을 대량 생산할 계획은 없는가? 

기회만 된다면 대량 생산으로 많은 사람에게 선보이고 싶은 바람도 있다. 하지만 내 성격 자체가 비즈니스 마인드가 부족한 데다 돈 버는 쪽으로는 도무지 재주가 없다. 좋은 사업 파트너가 있어 진행을 해준다면 가능하겠지만 그런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다.

앞으로 작업 계획은? 

현재는 타이포 갤러리의 새 거처를 찾는 데 몰두해야 한다. 이 일로 다른 작업은 잠시 중단한 상태다. 지금까지 살아온 암스테르담에 새 작업실을 구하고 싶지만 집세가 비싸 현재 작업실과 비슷한 규모의 공간을 구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이곳의 보물 같은 장비를 모두 옮기고 싶지만 어려울 것 같아 고민이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384호(2010.06)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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