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을 서성이는 모든 이를 맞이하는, 복도

디자인이 연대와 평등을 이야기하는 정치적 언어가 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정치적 결정의 동인이 될 수 있을까? 디자이너 이경민이 차별의 길목에서 이정표를 제시한다.

문 앞을 서성이는 모든 이를 맞이하는, 복도

“당신은 선택받은 사람이다. 이 문장을 읽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네덜란드 디자이너 뤼번 파터르Ruben Pater의 책 〈디자인 정치학〉에 나오는 말이다. 인류사는 오랜 세월 서구 백인 남성 중심으로 쓰여왔고 디자인은 그 모든 배제와 소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그 반대도 있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고, 당연시되는 것에 의문을 던지는 디자인도 있다. 디자인이 연대와 평등을 이야기하는 정치적 언어가 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정치적 결정의 동인이 될 수 있을까? 지금 여기, 차별이라는 거대한 미로에서 이정표를 제시하는 디자이너를 소개한다.


디자이너 이경민은 최근 작업실을 옮겼다. 입구의 긴 복도가 인상적인 공간이다. 스튜디오 이름도 ‘플락플락’에서 ‘복도’가 됐다. 그가 8년 동안 사용한 플락플락이라는 이름은 퀴어 운동의 상징인 무지개 깃발에서 빌려 온 것이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스튜디오명을 바꾼 게 이사 때문만은 아닐 터. “명징한 시각적 기호로서 깃발이 가지는 힘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깃발을 갖지 않는, 혹은 갖지 못하는 상태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이제 힘차게 나부끼는 깃발보다 복도를 조용히 서성이는 이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싶다는 그의 말은 앞으로 더 넓은 관점에서 주변부의 존재를 조명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사실 이경민의 그간 행보를 돌아보면 지금의 결심이 수긍이 가기도 한다. 그의 작업 세계는 언제나 넓은 의미의 퀴어를 아울렀다. 디아스포라영화제 작업만 봐도 그렇다. 디아스포라영화제는 난민, 실향 등의 이주 과정뿐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차별에 의해 소외된 이들의 삶을 포괄적으로 조명하는 영화제다. 그 방향성에 공감해 2018년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디자인 작업에 참여했다. 그간 선보여온 모든 영화제 아이덴티티에는 사회 변두리의 이야기를 가시화할 수 있는 소재와 표현 기법에 대한 지난한 고민이 녹아 있다. 구체적인 상징 기호보다 추상화된 도형과 패턴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도 눈에 띈다. 여기에는 특정 집단이나 정체성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 각계각층의 주체를 향해 영화제의 메시지를 발신하고자 하는 디자이너의 의도가 투영되어 있다.

이경민은 올해도 어김없이 디아스포라영화제에 참여한다. 이번에는 새로운 이름으로 함께하게 될 테다. 이경민의 복도는 어딘지 모르게 디아스포라 공간을 떠올리게 한다. 공존과 다양성을 향해 나아가는 동시대 디아스포라처럼, 이경민은 문 앞을 서성이는 모든 이와 손잡고 더 긴 복도를 향해 걸어 나갈 준비를 마쳤다. kmkm.kr


Interview

이경민 복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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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주변부의 소수자를 조명하는 디아스포라영화제와 오랜 기간 협업했다. 그간의 작업 경험이 디자이너로서 생각과 태도에 영향을 주기도 했나?

디아스포라영화제는 동시대의 첨예한 사회적 의제를 다룬다. 영화제를 준비하다 보면 그간 놓치고 있던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주변부의 이야기를 시각 매체로 옮기기 위해 늘 적절한 소재와 형식을 고민하는데, 일련의 과정을 거치다 보면 주제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함께 일하는 기획단으로부터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을 배우기도 한다.

다양한 정치·사회적 의제를 다루다 보면 때로 당사자성을 확보하기 어려울 때도 있을 것 같다.

스스로를 퀴어로 정체화하고 있지만 막상 퀴어와 관련된 작업에서조차 나와 꼭 맞는 당사자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수많은 문화와 정체성이 교차하는 가운데 나의 당사자성은 극히 일부에 해당하거나 종종 찾아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디자이너는 주제를 함부로 대상화하지 않기 위한 방식을 숙고해야 한다. 그 이면에는 내가 접하는 모든 일이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료 시민의 일이라는 공감과 인식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애초에 당사자성 문제는 사회적 소수성과 관련한 주제에만 국한되는지도 의문이다. 디자이너는 원체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지 않나.

올해부터 ‘복도’라는 스튜디오 이름으로 활동한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최근에 새로 옮긴 작업실이 긴 복도를 거쳐야 하는 공간 구조다. 그 모습이 마치 여러 사이를 오가는 디자인 과정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방 안에 들어오지 못한 채 서성이는 이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복도’라는 스튜디오 이름에는 이런 두 가지 생각이 담겨 있다. 요즘은 스튜디오 내에 서점 공간을 마련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복도를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말과 행위를 흔적으로 남기려고 한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60호(2025.02)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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