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가 + 에르메스 + 셀린느 + 디올 = ‘프랑켄슈타인 백’?

‘패션 산업의 숨은 크리에이터’를 조명한 미스치프의 새 프로젝트 ​

발렌시아가부터 디올까지 명품 브랜드의 디자인이 한데 모인 이색적인 가방이 공개됐다.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 텔레폰 백'이 그 주인공으로, 최근 한국에서 단독 전시를 개최하기도 했던 미스치프의 작품이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디자인, 과연 어떤 스토리가 담겨 있을까?

발렌시아가 + 에르메스 + 셀린느 + 디올 = ‘프랑켄슈타인 백’?

“DESIGNED IN: UNITED STATES, PERU, PORTUGAL, INDIA, CHINA.”
“디자인 국가: 미국, 페루, 포르투갈, 인도, 중국.”

이 문구를 보고 어떤 느낌이 드는가? 5개국에서 디자인되었다는 것도 낯선데, 서로 멀리 떨어진 데다 언뜻 하나의 공통점으로 묶이지 않을 듯한 나라들이 나란히 있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는가? 이 문장은 뉴욕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크리에이티브 컬렉티브 미스치프(MSCHF)의 새 프로젝트,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 텔레폰 백(The Global Supply Chain Telephone Bag)’에 각인된 실제 생산자 표시 문구다.

규모가 크든 작든, 대부분의 알려진 패션 브랜드들은 노동력이 저렴한 지역에 있는 공장에 실제 제품 제작을 맡긴다. 패션 산업에서 이들 공장의 역할은 단지 비용을 아끼는 것으로 인식되는 데 그친다. 수많은 사람들이 디자인과 생산 공정에 참여함에도 불구하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한 명에게 거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는 럭셔리 브랜드들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미스치프가 실험한 바에 따르면,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이 공장들 역시 ‘크리에이터’로서의 역할을 할 때가 있다. 클라이언트의 주문이 정확하지 않거나, 놓친 부분이 있을 때 생기는 디자인 상의 공백을 채우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는 것이다.

4개의 명품 브랜드가 하나로 뭉치다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 텔레폰 백’은 세계 네 곳의 가죽 공장들이 에르메스(Hermès), 디올(Dior), 발렌시아가(Balenciaga), 셀린느(Celine)의 시그니처 핸드백들을 레퍼런스 삼아 디자인을 조금씩 더하고 수정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 핸드백’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미스치프는 지난해 공개한 프로젝트 ‘Backward Shoe’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이 ‘프랑켄슈타인 핸드백’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당시 제작을 의뢰한 공장 쪽에서, 앞뒤가 바뀐 듯한 신발 디자인을 보고 디자이너들이 실수한 것이라 생각해 직접 디자인을 수정해 보내온 것이다. 오해로 빚어진 단순한 해프닝이었지만, 미스치프는 공장에서도 그처럼 디자인 수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도 한다는 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세계 네 개 지역의 공장을 선정해, 이들의 역할을 드러내는 실험을 기획했다.

미스치프는 시제품을 의뢰하면서, 일부러 이해하기 어렵고 모호하게 쓴 디자인 지침과 레퍼런스 이미지를 보내 의도된 공백을 만들었다. 공장 입장에서는 ‘최악의 클라이언트’였던 셈이다. 처음에는 ‘가방을 더 여성스럽게 바꿔달라’거나 ‘장식적으로 만들어달라’는 식의 지침을 전달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최악인 클라이언트로 행세한 탓에, 처음에는 방향성을 잃고 콘셉트가 사라진 시안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미스치프는 방법을 조금 바꿔서 유명한 럭셔리 브랜드의 가방들을 흐릿하게 찍은 사진들을 추가로 보냈다. 가장 먼저 페루 가죽 공장에는 에르메스의 버킨​(Birkin) 백의 이미지를 보내 그와 닮게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페루에서 지시사항을 참고해 만들어 보낸 샘플 이미지는, 다음 순서인 포르투갈에 있는 가죽 공장으로 넘겨졌다. 미스치프는 이곳에 셀린느 러기지(Luggage) 백의 이미지를 함께 보내, 그것과 더 비슷해 보이게 디자인을 수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포르투갈에서 보낸 수정본은 세 번째인 인도 공장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디올 새들(Saddle) 백처럼 보이게 만들어 달라고 역시 모호하게 요청했다. 이를 반영하여 만든 샘플은 발렌시아가 아워글래스(Hourglass) 백처럼 만들어달라는 요청과 함께 마지막 순서인 중국 공장으로 보내졌다.

난해했던 클라이언트의 요구, 과연 결과는?

그 결과 나온 최종 결과물은 아워글래스 백의 하단부 곡선, 러기지 백의 손잡이, 새들 백의 비대칭 형태, 버킨 백의 플랩을 갖췄다. 미스치프는 마지막으로 받은 시안 몇 가지 중, 유명 브랜드들의 시그니처 핸드백의 특징을 조금씩 조합한,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기이한 느낌의 이 가방을 선택했다. 미스치프는 자신들은 중간 디자인 수정 과정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으며, 핸드백의 소재와 구조, 크기 등 품질 영역에 대해서만 의사결정을 했다고 밝혔다. 27cm x 24cm x 11cm 크기의 이 핸드백에는 탈부착 가능한 스트랩이 달려 있고, 전면과 후면, 내부에 각각 포켓이 하나씩 있다. 컬러는 블랙, 베이비 핑크, 이브 클라인 블루, 탠저린의 네 가지다. 미스치프는 이 글로벌한 디자인 여정에 참여한 가죽 공장들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완성품은 지난 2월 21일 한정 수량으로 650달러 가격에 출시되었으며 빠르게 매진됐다.

미스치프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것을 만들 때에는, 그것이 이동하는 과정 중에도 창조가 이뤄진다”고 말한다. 공장이 언제나 완벽한 디자인 지침을 받지 않고, 또 컴퓨터처럼 완벽하게 지침을 따른 결과물을 내지 않으며, 이에 따라 최종 소비자들이 모르는 곳에서도 창조적인 노동이 발생한다는 설명이다. 윤리적 패션에 대한 논의가 종종 화두로 떠오르는 가운데 생각해 볼 수 있는 또다른 이슈를 제시한 것이다. ‘프랑켄슈타인 백’은 한편으로 럭셔리 핸드백의 인기는 디자인이 아닌 브랜드의 이름에서 기원한다는, 그다지 비밀일 것 없는 패션계의 이면도 풍자한다.

럭셔리 패션을 풍자한 또 다른 작품

2016년 설립 후 장난스러우면서 논란을 야기하는 일련의 디자인 프로젝트들로 유명해진 미스치프는 앞서서도 비슷하게 럭셔리 패션을 풍자하는 상품들을 만든 바 있다. 2022년 ‘메이드 인 이탈리아Made in Italy’는 유럽 이탈리아가 아닌 미국 텍사스주 이탈리아에서 만든 핸드백으로, 제조국 라벨에 달라붙는 고급스러운 이미지와 선입견을 비틀었다. 2023년 ‘마이크로스코픽 핸드백(Microscopic Handbag)’은 루이비통 온더고(OnTheGo) 핸드백 디자인 그대로 소금 한 알보다 작게 만든 가방이다. 바늘 구멍을 통과할 수 있는 크기라는 이 가방은 현미경으로 봐야만 가방임을 알아볼 수 있다. 실생활에 기능적인 물건이어야 할 핸드백이, 점점 작아져 브랜드의 상징이자 오브제로서만 기능하게 된 것을 빗대려는 의도로 만든 가방이다.

미스치프는 ‘메이드 인 이탈리아’ 핸드백을 ‘프랑켄슈타인 핸드백’과 비슷한 가격대인 550달러에 판매했다. ‘마이크로스코픽 핸드백’은 경매를 통해 6만3750달러에 판매했으며, 프로젝트가 전하려는 메시지와 정반대로 수익화를 추구하고 고가 상품 소비를 부추겼다는 비판과, 오히려 경매를 통해 소비주의를 이중적으로 풍자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 되었다는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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