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스턴스〉의 그 서체, 누가 만들었을까?

영화 〈서브스턴스〉가 한국에서 누적 관객 수 50만 명을 돌파했다. 충격적인 시각 효과가 시종일관 이어지는 가운데 유독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타이포그래피다. 〈서브스턴스〉의 서체를 제작한 모션 디자이너 질 포앵토가 직접 작업의 뒷이야기를 보내왔다.

〈서브스턴스〉의 그 서체, 누가 만들었을까?

모든 건 코랄리 파르자(Coralie Fargeat) 감독의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되었다. 〈서브스턴스〉를 준비 중이던 그가 영화에 등장하는 키트 디자인 작업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와는 이미 단편영화 〈Reality+〉에서 좋은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던 터라 흔쾌히 승낙했고, 곧바로 미술감독 스타니슬라스 레이델레(Stanislas Reydellet) 팀과 함께 작업에 착수했다. 시나리오를 읽는 것만으로도 감독의 머릿속 그림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그의 요구는 명확했다.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강렬한 비주얼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려는 의지가 강했고, 극 중에 등장하는 ‘서브스턴스’라는 브랜드의 이미지 역시 직관적이고 선명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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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온 엔드(Main on Ends) 타이틀 시퀀스 작업 이미지.

이 같은 감독의 의도에 따라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상징적이면서도 신뢰감을 주는, 관객의 눈에 각인될 만한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게 관건이었다. 원하는 이미지에 다가가기 위해 화장품 회사, 패션 브랜드, 성형외과 등 다양한 분야의 비주얼 코드를 살펴봤다. 레퍼런스를 분석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방향성이 생겼다. 단순히 눈에 띄는 디자인을 넘어 한 편의 이야기가 담긴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나아갔다. 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한 끝에 ‘브루탈리즘(Brutalism)’ 스타일을 떠올렸다. 브루탈리즘은 원래 건축에서 주로 쓰는 표현이다. 직역하면 ‘날것 그대로의 콘크리트’를 뜻하는데, 매끄러운 마감 처리 대신 콘크리트와 강철이 그대로 드러나는 구조적 요소를 강조하는 게 특징이다. 〈서브스턴스〉의 아이덴티티에도 브루탈리즘 스타일을 적용해 시각적 충격을 주고자 했다. 서체는 표면적으로 완벽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묘한 불규칙성이 드러나는데, 이는 부드러움과 거침, 완벽함과 불완전함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시각적 장치다.

기본 알파벳을 만드는 데에도 수많은 시안을 거쳐야 했다. 브루탈적이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아야 했고, 글자가 극 중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화면 비율까지 고려해야 하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소품에 들어가는 글자는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에서 한 자 한 자 수작업으로 디자인했고 최종적으로는 폰트셀프(Fontself) 프로그램을 활용해 한 벌의 폰트로 완성했다. 서체 최종 승인이 나자 그 뒤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5 일 만에 소품을 만들어 촬영에 돌입했고, 이후에는 장면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그래픽 이미지와 엔딩 크레디트를 디자인했다. 이번에도 역시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스크린 컬러를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전환하는 방식을 택했다. 극장에서 보니 마치 총성이 눈앞을 스치는 것 같았다. 원하던 대로 강한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과정에는 파르자 감독의 역할이 컸다. 실제 브랜드의 사용자 경험을 설계하듯 세세한 부분까지 그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기에 가능한 여정이었다.

작년 5 월 칸 영화제에서 〈서브스턴스〉를 공개한 뒤 본격적인 작품 홍보가 시작되었다. 글로벌 마케팅을 위해 모든 악센트와 특수 문자를 추가로 만들어야 했지만, 내가 만든 서체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홍보 마케팅의 핵심 요소로 쓰인다는 건 가히 놀라운 일이었다. 영화가 개봉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서브스턴스〉의 시각적 요소가 점점 더 생생히 살아나는 경험을 했다. 사운드트랙 EP, 홍보 키트, 기념품까지. 감독의 철저한 가이드라인 아래 영화 안팎의 모든 시각적 요소가 타이포그래피를 매개로 연결되었다. 이번 작업은 돌이켜봐도 믿을 수 없는 여정이었다. 영화의 혼을 담은 시각언어로 거듭난 이 서체가 화면 너머까지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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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포앵토(Gilles Pointeau). 프랑스를 무대로 활동하는 모션 디자이너 겸 아트 디렉터다. 타이틀 ·모션 디자인 스튜디오 FUGU 프로덕션을 이끌고 있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61호(2025.03)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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