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취향 담은 본거지, 김금
커피와 차, 술, 음식과 디저트를 경험할 수 있는 제주의 공간
화려하거나 빠르지 않지만 자신만의 속도로 ‘진짜’를 선보이는 제주 디자인 스튜디오 '김금(金金)'의 이야기.
제주도에 자리한 설계자의 공간 ‘김금’. 동명의 운영자는 적당한 활기와 고요가 있는 이곳에서 그가 애정하는 커피와 차, 술, 음식과 디저트를 만든다. 그리고 도자기를 빚으며 사진도 찍고 좋아하는 책을 팔며 본업인 설계를 한다. 설계자 김금이 좋아하는 모든 활동이 존재하는 곳. 그래서 그는 이곳을 본거지라 부른다. 설계자. 디자이너로 더 잘 알려진 직업이다. 하지만 김금은 본인을 디자이너가 아닌 설계자라 소개한다. 이는 그가 직업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설계자로 표현했을 때 느껴지는 어떤 묵직한 무게감과 책임감. 그는 디자이너이자 가게의 운영자로서 펼치는 모든 활동에 깊이를 담아내고자 노력한다. 화려하거나 빠르지 않지만 김금만의 속도로 ‘진짜’를 선보이기 위한 수고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본거지 김금을 채우는 모든 요소에선 설계자의 진짜를 향한 태도가 오롯이 전해진다.
Interview
김금 디자이너
설계자의 본거지
김금은 어떤 공간인가요?
김금(金金)은 제 이름 그 자체인 공간으로 저의 본거지(本據地)로 사용하고 있어요. 본거지의 사전적 의미가 ‘활동의 근거로 삼는 곳’이라는 뜻인 만큼, 제가 펼치는 모든 활동의 시작으로 삼고 있습니다.
대표님의 본업은 설계자로 알고 있습니다.
설계자란 직업이 조금 낯설 수 있을 거예요. 주로 디자이너로 부르니까요. 설계자의 영어 표현이 디자이너라서 같은 의미이지만, 저는 설계자로 제 업을 표현하길 선호해요. 개인적으로 설계자로 직업을 소개할 때 조금 더 묵직한 무게감과 책임감을 느끼거든요.
2000년대 초, 그러니까 제가 중학생 무렵에 ‘러브하우스’라는 TV 프로그램이 인기였어요. 낡고 허름한 집이 근사한 집으로 변신하는 모습은 정말 놀라웠죠.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공간을 향한 꿈을 처음 가졌어요. 저는 실내건축과가 있는 디자인 고등학교로 진학했고, 대학교 역시 같은 전공으로 졸업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디자이너로 회사 생활을 시작했고요. 실무에서 디자인은 본인의 의견을 내세우기보다 클라이언트에게 맞춰 작업을 진행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이 부분을 실제로 받아들이고 적응하는데 좀 서툴렀던 것 같아요. 디자이너로 살기로 한 것은 내가 꿈꾸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인데 제가 거쳤던 스튜디오들은 주로 관공서나 이미 명확한 컨셉이 있는 브랜드의 스토어를 설계했거든요. 현실적으로 회사에 다니며 제 꿈을 이루는 건 불가능했어요. 결론은 명확했죠. 내가 하고 싶은 공간은 결국 내 돈으로 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김금을 열게 된 건가요?
퇴사 후 제 유년 시절과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첫 설계 공간 ‘장복호’를 열었어요. 김금을 만들기 전에 먼저 선보인 공간이죠. 그동안 공부하며 익힌 설계의 정석과 제가 공간을 바라보는 철학을 장복호에 적용했습니다.
설계자 김금의 공간 철학이 궁금해지네요.
설계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요소를 꾸며서 끝나는 것이 아니죠. 공간이 가지는 이야기와 거기에 필요한 음악, 사람, 맛 그 모든 것을 모아 사람들이 내 공간에서 어떤 공기를 느끼게 할 것인가, 어떤 감상을 가지고 돌아가게 할 것인가. 이러한 조각조각의 요소를 모두 아우르는 실험을 하기로 했어요.
장복호을 직접 운영하며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 사람을 맞이하는 행동, 선보이는 음식의 스토리텔링과 맛, 연령대에 맞춰 플레이하는 음악까지 분위기를 만드는 모든 것을 설계라는 마음으로 채웠어요. 이런 경험을 쌓으며 설계자라는 정체성을 확립한 것 같아요.
공간은 물론 제품과 브랜드까지 설계한다고 들었어요.
공간 외의 콘텐츠에도 김금이 가진 이야기를 적용해 보고 있어요. 올해 출시될 전통주 브랜드를 설계하고 있고, 아름다운 사물을 좋아하다 보니 제품 제작에도 관심이 있어 지금 진행 중이에요. 이런 활동도 분명 설계의 영역이죠. 제가 말하는 설계는 공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아직 작업의 수가 적고, 그 속도는 느리지만 ‘진짜’를 담아내고자 노력하고 있죠.
김금의 시작, 기다림이 없는 곳
설계는 업의 특성상 높은 집중력과 꼼꼼함을 필요로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어쩌다 수시로 사람을 맞이해야 하는 김금을 만들게 됐나 궁금해요. 본래 하시던 일에 집중하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첫 번째 공간 장복호를 운영했을 때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어요. 자영업 자체가 작은 공간에 나를 가두고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걸요. 그리고 장복호는 명확한 ‘음식점’이라는 사실. 음식점 특성상 설계를 하면서 배제했던 것들이 기다림을 마주하자, 하나둘 필요해지기 시작했어요. 어떤 책을 두는 것, 틀 수 있는 음악과 그렇지 못한 음악, 작업을 할 수 있는 나만의 큰 책상, 아름다운 사물을 놓을 수 있는 부분. 점점 마음속에 원하는 것들이 생겨났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아니다.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해보고 싶었던 일을
이것저것 하며 보내는 어떤 하루 중 찾아오는 사람을 반가이 맞이하는 것이라면.”
‘그게 그거 아니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문장에는 무려 ‘기다림’이 없어요. 그렇게 김금이 시작됐죠. 김금의 방식을 존중해주고 이해해 주는 주변인들과 협업을 진행하다 보니 일이 많은 편은 아니에요. 또 김금이 아주 바쁜 스토어는 아니라서 영업시간 틈틈이 작업하거나, 집중할 시간이 필요하면 오픈 전이나 마감 후에 남아서 하는 편이에요.
대표님의 이름이기도 한 김금. 한자 ‘金(쇠 금)’을 두 번 반복한 네이밍입니다. 어떤 뜻이 있나요?
어느 날 ‘스스로 나의 이름을 짓는다면 뭐라고 지을까?’라는 고민을 해봤어요. 저는 꽤 오랜 시간 금발로 살아왔거든요. 분명 금발이 주는 좋은 영향이 있었죠. 그래서 종종 ‘내 노란색의 명도’라는 문구로 저를 표현했고요. 그러다 저의 성인 김(金)과 황금의 금(金)으로 이뤄진 노랗고도 찬란한 이름이 번뜩 떠올랐어요. 자연스럽게 제 이름을 김금(金金)으로 지었고, 두 번째 공간의 이름도 김금으로 지었죠.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과 내가 하는 모든 활동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스스로 지은 내 이름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제주의 노형동. 왜 이곳에 터를 잡았나요?
노형오거리는 제주도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에요. 임대인은 김금이 자리한 건물은 노형이 개발되며 첫 번째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제주에서 제일 번화하고 큰 대로변에 이렇게 오래된 건축물이 살아남아 접점 없는 업종들이 공존하며 수명을 이어가는 재밌는 건물이 또 있을까 싶었어요.
설계자의 마음과 취향을 담은 공간
김금은 분명 화려하거나 거대한 스케일로 시선을 압도하는 공간은 아니지만 주인장의 섬세한 미감이 느껴지는 공간이었어요. 어떤 관점으로 이곳을 설계했는지 묻고 싶어요.
주인의 취향으로 이것저것 무심하게 툭툭 채워진 공간을 좋아해요. 제가 그렇지 못한 인간이기 때문이죠. 늘 정확한 규칙과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전공자의 직업병이랄까요? 하지만 김금은 내가 배우고 해왔던 정석적인 설계 방법을 내려놓고 명확한 컨셉 없이 진행해보자고 다짐하며 시작했어요.
먼저 27평 남짓 되는 공간에 제게 필요한 기능을 모두 나열했어요. 그리고 그것들을 묶고 나누며 서로 유기적이고 조화롭게 존재하도록 공간의 큰 틀을 잡았죠. 개방형 바 구조는 상업 공간에서 식음료를 제조하고 판매할 때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인데요. 불행히도 이는 제가 선호하는 형태는 아니에요. 바 대신 적당한 개방감을 가진 벽을 양쪽에 세웠고, 그 벽을 잡아줄 보를 얹으면서 공간을 구획했어요. 언제나 그렇듯 공간 자체가 가진 제약은 늘 존재하나 그것은 의도와 만나 의외의 결과물을 선사한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느꼈죠.
김금을 채우는 가구와 그것의 배치, 적절한 조도, 흐르는 음악, 정성이 담긴 식음료, 각자만의 방법으로 소란스럽지 않게 제주의 시간을 향유하는 방문객까지 만족스러웠어요. 공간에서 만나볼 수 있는 콘텐츠는 어떻게 구성했나요?
사물들은 공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채워가기로 했어요. ‘김금의 세상에서 제일 작은 서점’을 테마로 제가 읽고 좋았던 책들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작은 서가가 있고요. 곳곳에 제가 사랑하는 건축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와 루이스 칸(Louis Kahn 1901~1974),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1899~1980)의 익살스러운 사진과 제가 찍은 사진들을 보여드리고 있어요. 그리고 공간 한켠에 언젠가의 제도 수업을 위한 제도판과 제가 ‘화락민’이라는 이름으로 작업 중인 도예 작업을 판매하는 진열대가 있습니다. 나름 음악 좀 듣는다고 자부하는 만큼 좋은 오디오로 의식의 흐름대로 공간에 음악을 채우고 있어요. (웃음) 그리고 제가 설계하며 중시하는 원칙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사람이 머무는 공간이 가져야 할 본질을 꼭 지키는 것이죠. 사람들이 오래 앉아있어도 불편하지 않을 높이의 의자와 물건을 두어도 복잡하지 않을 넓이의 테이블까지. 그래서 김금의 테이블과 의자는 모두 편합니다.
공간의 무드만으로도 찬탄할 만하지만 김금의 식음료 역시 훌륭하더군요.
좋아하는 것들을 욕심껏 채우다 보니 메뉴가 많은 편이에요. 간단한 요리, 디저트, 커피, 잎차, 칵테일, 와인을 맛볼 수 있고요. 이중 저의 심상을 담아 만들어 낸 오직 김금에서만 볼 수 있는 메뉴도 있습니다. ‘빙백화’라는 아카시아꽃 에이드와 ‘여명’, ‘묵’, ‘금’이라는 이름을 붙여 블렌딩한 잎차들이 특별해요.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향기로 어떤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음료라 한 번쯤 경험해 보셨으면 해요.
김금의 지난 여정과 다음
지난 3월 9일 김금이 1주년을 맞이했어요. 지난 1년의 소회가 있다면요?
음, 1주년에 별 감정이 들지 않는 닳고 닳은 소상공인이 되어버린 탓에 3월 9일 당일은 여느 날과 다름이 없었어요. (웃음) 그래도 김금을 진하게 좋아해 주시는 분들의 진심 어린 축하를 받으니, 지난 1년 동안 저의 본거지가 누군가에겐 특별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펼칠 다음 계획이 있을까요?
소소하고 느리지만 ‘진짜’를 담은 것들을 꾸준히 설계해 나갈 거예요. 지난 1년 동안 운영에 치우쳐 실행하지 못했던 음악감상회나 제도 수업 같은 프로그램을 올해는 선보이도록 준비하고 있고요.
제주도민부터 육지에서 찾는 여행객까지 앞으로도 많은 분이 김금을 찾을 텐데요. 방문객들이 이곳을 어떤 공간으로 기억하기를 바라세요?
적당한 활기와 적당한 고요가 있는 공간. 김금 안에 있는 자기 모습이 꽤 그럴싸해 보였던 공간으로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