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션 디자이너, 한나 바실레스키
무대에서 프로덕션이 존재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작품을 더욱 아름답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한나 바실레스키Hannah Wasileski는 자신의 작업이 단순히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디자인 요소가 아닌, 무대의 시간과 공간을 직조하는 일이라고 믿는 프로젝션 디자이너다. 하지만 무대에서 영상 투사는 양날의 검 같은 것. ‘완전한 몰입’이라는 마법 같은 순간을 선사하는 한편, 산만하고 촌스러운 사족이 되기도 한다. 폭넓은 예술 재료로 무대의 여러 층위를 넘나드는 그에게 프로젝트 매핑의 세계를 물었다.

이력이 독특하다. 바이올리니스트에서 프로젝션 디자이너라니.
음악과 시각 예술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나의 일부였다. 사운드와 디자인을 일로,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했을 땐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한 분야에 집중하면 다른 분야에 소홀할 수밖에 없으니까. 나의 내적 갈등은 대학 진학을 앞두고 음악과 시각 예술을 포괄하는 프로그램을 발견하면서 점차 해소되었다. 대학 시절엔 음악 안에서 시각적 표현을 찾아나가는 다학제적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즈음부터 왠지 모르게 비디오 설치나 비디오 퍼포먼스처럼 영상을 기반으로 한 작업에 이끌렸다.
무대 연출을 위한 디자인 분야는 꽤 세분화되었다. 프로젝션 매핑에 특별히 매료된 이유가 있나?
나에게 움직이는 이미지는 음악과 시각 예술 사이의 합일을 찾기 위한 완벽한 플랫폼이었다. 그중에서도 평면 이상의 N 차원을 표현하는 일이 흥미로웠다. 몰입도 높은 환경을 만드는 일에 호기심이 많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고, 라이브 공연 무대를 위한 영상에 큰 매력을 느꼈다. 이런 관심사의 종착지에서 만난 것이 바로 무대 제작과 디자인이었다. 기존 재료나 건축물에 영상을 투사함으로써 공간을 탐구하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어쩌면 스스로의 욕구를 발견하는 일련의 경험을 통해 프로젝션 디자이너의 길을 모색하지 않았을까. 무대 프로젝션 디자이너로서 큰 즐거움 중 하나는 내가 구상한 재료로 물리적 환경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것이 관객의 눈을 속이는 방식일지라도 말이다.

각본 Thornton Wilder 연출 Lileana Blain-Cruz 세트 Adam Rigg 의상 Montana Levi Blanco 조명 Yi Zhao 애니메이터 Katerina Vitaly 사운드 Palmer Hefferan 사진 Yi Zhao


각본 Stefano Massini 연출 Arin Arbus 세트 Marsha Ginsberg 의상 Anita Yavich 조명 Yi Zhao 프로젝션 Hannah Wasileski 사운드 Michael Costagliola 사진 Dan Norman & Yi Zhao
한 편의 무대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프로젝션 디자이너가 어느 단계에 개입해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궁금하다.
연출가가 선호하는 작업 방식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세트, 조명을 비롯한 다른 디자인 팀과 동시에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리허설을 시작하기 전 감독과 긴밀하게 협의해 쇼의 전반적인 그림을 구상하는데 이 사전 제작 단계는 6개월에서 2년까지 걸리기도 한다. 프로젝션 디자이너는 이 과정에서 감독, 세트 디자이너와 가장 긴밀하게 협력한다. 영상을 담을 물리적 공간을 파악할 정도로 세트 디자인이 구체화되면 본격적으로 영사 디자인에 착수한다. 세트의 모형 사진을 보며 영사기를 사용하는 모든 순간에 대한 스토리보드를 만든다. 프로젝션 디자이너의 업무는 이 단계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콘텐츠 제작을 도와주는 소규모 팀과의 협업도 스토리보드를 바탕으로 진행하며, 이후 극장에서 기술적 측면을 맡아줄 프로그래머를 만나 모든 미디어의 재생과 ‘큐’를 준비한다. 물론 이 과정에 앞서 감독이 프로젝션 디자인의 필요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음악이 당신의 근간인 만큼 시각 요소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좀 더 폭넓은 감각을 동원한다고 느끼는가?
물론이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경력은 음악의 구조를 시각 예술의 세계에 어떻게 표현할지 탐험하는 데 풍부한 토대가 된다. 특히 오페라, 콘서트, 뮤직비디오에 참여할 땐 음악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악보를 파악하고 곡의 미묘한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는 결국 작품 전체에서 콘텐츠가 어떻게 비춰지고 움직일지 구상하는 기초가 된다. 콘텐츠를 제작할 때도 계속 음악을 들으며 맥락을 파악하고 시각 요소와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전체적인 틀을 이해하고자 한다. 음악을 많이 들을수록 공연과 무대의 층위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나는 이 과정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는 사운드와 비주얼이 하나로 인식되는 경험을 만들고자 한다.


작곡 John Adams 연출 Lileana Blain-Cruz 세트 Adam Rigg 의상 Montana Levi Blanco 조명 Yi Zhao 프로젝션 Hannah Wasileski 코레오그래피 Marjani Forté-Saunders 사운드 Mark Grey 사진 Evan Zimmerman & Yi Zhao

작곡 Ethel Smyth 연출 Thaddeus Strassberger 세트 Erhard Rom 의상 Kaye Voyce 조명 JAX Messenger 프로젝션 Hannah Wasileski 사진 Mark Costello & Chongren Fan
한나 바실레스키의 디자인은 함축적이면서도 풍성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한 편의 서사시를 읽는 것 같달까. 극의 서사와 메타포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 예술 세계의 중심에는 직감이 있다고 믿는다. 무대 일을 하기 전 순수 미술을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당시 내 작업의 원동력은 관객에게 닿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표현과 형식이 아무리 추상적일지라도, 학구적으로 무언가를 알고 있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느껴주길 원했다. 프로젝션 디자이너의 역할은 관객이 소재에 접근할 수 있는 진입점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특정 쇼의 소재는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그만큼 프로젝션 디자이너는 스토리를 전달하거나 감독의 연출 의도를 극대화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다만 내가 디자인에 접근하는 방식은 분석보다는 느낌, 직관에 가깝다. 물론 공연과 무대의 맥락을 꿰뚫기 위한 통찰은 선행되지만 그 과정에서 결코 직감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각본 Thornton Wilder 연출 Lileana Blain-Cruz 세트 Mariana Sanchez 의상 Kaye Voyce 조명 Jiyoun Chang 프로젝션 Hannah Wasileski 사운드 Rucyl Frison 사진 Kate Ducey
연극을 비롯해 공연업계는 다양하게 새로운 시도를 이어나가는 한편 보수적인 틀을 고집하기도 한다. 당신에게 가장 실험적인 작업은 무엇이었나?
확실히 공연업계는 보수적인 측면이 있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실험적 작품이란, 형식은 물론 문화적으로도 기존 틀을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지난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제작한 〈El Nino〉가 그랬다. 기존 프로덕션과는 다른 어법으로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무대를 설계했고, 시대를 기념하는 방식 또한 독특했다. 과거의 무대 공예를 참고해 신구가 조화를 이루는 대담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서사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밀도 높은 작품이었던 만큼 관객들 또한 작품에 깊이 몰입했는데 그 저변에 디자인이 있었다고 자부한다.

각본 Naomi Iizuka연출 Rachel Dickstein 세트 Susan Zeeman Rogers 의상 Ilona Somogyi 조명 Jiyoun Chang 프로젝션 Hannah Wasileski 사운드 Matt Stine 사진 Yi Zhao, Susan Zeeman Rogers & Maria Baranova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무대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개인적으로 아름다운 무대보다는 재미있는 무대를 추구한다. 전제는 관객이 몰입할 물리적 환경을 갖추는 것이다. 입체감이 전혀 없는 영사 스크린이 준비된 무대, 실제 삶을 투영하기에 지나치게 평면적인 무대에는 불만을 갖게 된다. 극의 세계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모를 정도로 건축물과 무대, 시각 요소가 일체를 이루는 공간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프로젝션 디자인을 통해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프로젝션 디자이너의 활동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공연장은 물론 제품, 건축물, 나아가 공공 디자인까지도 당신의 무대가 될 수 있는 셈이다. 앞으로 어떤 분야에 도전하고 싶은가?
기다렸던 질문이다. 일단 대규모 공공 디자인이라면 장르를 불문하고 흥미진진할 것 같다. 박물관 내에 몰입형 공간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만큼 전시 디자인 역시 눈여겨보고 있다. 프로젝션 디자인 과정에서 흥미롭게 느끼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스토리텔링인데 전시 디자인의 본질 역시 이와 맞닿아 있는 듯하다. 예술, 사물,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단순히 정보 전달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명확하고 매혹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게 해주니까. 그 안내자가 되는 일에 기꺼이 뛰어들고 싶다.

연극, 오페라, 뮤직비디오, 음악, 설치미술을 아우르는 아티스트이자 프로젝션 디자이너.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며 공연 예술계에 입문했고, 영국 브라이턴 대학교를 졸업한 뒤 비디오 설치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뉴욕으로 이주해 예일 대학교 연극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본격적으로 프로젝션 디자이너의 행보를 이어나갔다. 현재 베를린과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hannahwasiles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