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패션 디자인이 조화를 이룰 때
기술이 직조한 미래, 패션이 그리는 상상
2025년 파리 패션위크는 전통과 혁신,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무대였다. 특히 언리얼에이지는 LED 섬유, RGB 조명, 자외선 반응 소재 등 첨단 기술을 통해 옷의 경계를 확장하며 미래 패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지난 3월 11일에 막을 내린 2025년 가을/겨울 파리 패션위크에서는 전 세계 패션 팬들의 주목을 이목을 끌었던 순간들로 가득했다. 유명한 패션 하우스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개편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오히려 새롭게 자리를 맡은 디렉터들의 역량을 둘러볼 수 있는 자리가 되어 더욱 화제가 되었다.
주목해야 할 패션위크의 트렌드는?
전반적인 패션위크의 분위기를 살펴보면, 각 브랜드들이 자사의 전통과 헤리티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이를 강조하는 모습이 두드러졌다. 친숙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색다른 디자인이 사람들에게 신선함을 선사했고, 그와 더불어 브랜드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는 분위기를 마련했다.




특히 샤넬은 시그니처인 진주, 트위드, 리본 등을 기반으로 입체감과 믹스 매치를 감각적으로 더해 새롭게 풀어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다양한 크기의 진주를 활용해 다채로운 아이템으로 변주한 아이디어는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를 통해 오랜 전통을 지닌 브랜드일지라도 끊임없는 혁신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었으며, 어떤 시대가 오더라도 ‘클래식은 영원하다’는 메시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현재 최고가를 달리고 있는 미우미우는 이번 시즌 최고의 런웨이로 인정받으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60년 대를 연상케하는 복고풍 꽃무늬 프린트와 고급스러운 모피, 성인적인 면모를 드러냄과 동시에 젊은 감성의 정체성을 확장하는 듯 보이는 다양한 체크무늬 프린트, 밝은 색상, 과장된 테일러링이 조화를 이루며 쇼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 밖에도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생로랑, 스텔라 매카트니는 넓은 어깨선과 잘록한 허리라인을 강조하는 80년 대의 디자인 감성을 그대로 가져오며 대담한 시대의 모습을 재해석한 룩을 선보였다. 이들의 쇼에서는 과거의 향수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발렌시아가와 푸마, 발렌티노와 반스, 코페르니와 레이 밴의 협업은 신선하고 짜릿함 그 자체를 선사했다. 특히 발렌시아가와 푸마의 협업은 공개되자마자 여러 매체를 통해 2025년 트렌드를 이끌 아이템으로 선정되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뎀나 바잘리아의 지시 아래 제작된 이 신발은 발렌시아가의 아방가르드한 미학과 푸마의 레이싱 헤리티지가 결합되어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브랜드도 있었다.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은 ‘듀란 랜팅크(Duran Lantink)’의 쇼였다. 쇼에서는 대담한 동물 프린트의 왜곡된 실루엣으로 무장한 모델들이 선보였기 때문이다. 목이 없어지거나 어깨가 솟은, 또는 가짜 가슴과 엉덩이를 단 모델들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충격을 선사하기 충분했다. 이렇듯 젠더의 경계를 허물며 장난스럽게 신체를 조작하는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는 패션이 단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의 고정관념을 벗어 던지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나 로즈 달튼(Hannah Rose Dalton)과 스티븐 라즈 바스카란(Steven Raj Bhaskaran)이 설립한 ‘마티에르 페칼레(Matières Fécales)’는 독창적이고 전위적인 디자인으로 패션계의 주목을 받았다. 듀란 랜팅크가 신체 비율을 파격적으로 변형시켜 화제를 모았다면, 이들은 우아한 실루엣의 디자인에 극한에 가까운 대담한 헤어와 메이크업을 결합하여 기괴하면서도 매혹적인 컬렉션을 선보였다. 덕분에 혹평과 찬사를 동시에 얻는 영광을 얻었다.
기술로 직조한 패션, ‘언리얼에이지’가 주목 받는 이유

수많은 신진 패션 브랜드와 명품 패션 하우스들이 경쟁적으로 개성을 뽐내는 패션위크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브랜드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언리얼에이지(Anrealage)’였다. 독창적인 형태 탐구, 그리고 최신 기술을 활용한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주목받는 브랜드는 늘 그래왔듯 파격적인 실험으로 찬사를 받았다.


이처럼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명성을 쌓고 있는 브랜드는 2019년 LVMH 프라이즈 우승자이자 현재 주목받고 있는 디자이너 모리나가 쿠니히코(森永邦彦)가 2003년에 설립했다. 독특하게 느껴지는 브랜드 이름은 ‘현실, 비현실, 그리고 시대(A Real, Unreal, and Age)’를 결합한 것으로, 궁극의 차원과 독창적인 개념 및 독특한 요소를 활용하면서도 일상에서 입을 수 있는 ‘진짜 옷’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에서 탄생했다.
디자이너는 ‘디테일에 신이 있다’라는 신념 아래 ‘수공예’, ‘개념적 형상화’, ‘기술’이라는 세 가지 핵심요소를 활용하여 컬렉션을 구성하고 있다. 2005년 도쿄 패션위크에 첫 컬렉션을 선보였으며, 도쿄에서 10년간의 컬렉션을 거쳐 2014년부터 파리 패션위크에 진출했다.


브랜드는 세 개의 시기를 거치며 발전해왔다. 첫 번째 시기(2005-2006 가을/겨울 컬렉션부터 2008-2009 가을/겨울 컬렉션까지)는 ‘수작업’에 대한 집착이 중심이었으며, 두 번째 시기(2009 봄/여름 컬렉션부터 2011 봄/여름 컬렉션까지)는 옷의 형태에 주목한 시기였다. 세 번째 시기(2011-2012 가을/겨울 컬렉션부터 2017 봄/여름 컬렉션까지)는 기술을 패션으로 구체화하는 데 집중했다. 이런 노력을 해온 덕분에 패션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중 하나인 LVMH 프라이즈에서 우승의 영광을 얻지 않았나 싶다.




또한 2020년에는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펜디와 협업을 진행했으며, 2020 두바이 엑스포의 유니폼을 디자인하며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컬렉션에서는 독창적인 실루엣과 다양한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독보적인 디자인을 선보여왔던 브랜드는 수많은 협업을 진행하며 대중성까지 사로잡았다.


이번 파리 패션위크에서 진행된 언리얼에이지의 쇼에서는 ‘스크린(SCREEN)’이라는 주제 아래, 원단에 10,000개의 다양한 색상의 LED가 부착된 의상이 등장했다. 모델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빛나는 패턴이 변화하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는 오트 쿠튀르에 디지털 아트를 접목한 ‘혁신적인 작품’이었다.


디자이너는 컬렉션을 통해 옷 자체가 색이나 패턴, 메시지, 그래픽 이미지를 비추는 ‘스크린’이 되는 미래를 그렸다. 그의 상상력에 따르면, 옷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시각적·정보적 흐름을 반영하며 변형되는 하나의 미디어로 진화할 것이다. 그는 옷이 인생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최종적인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스크린 의상은 입은 사람의 기분에 따라 변화하며, CMYK에서 재현할 수 없는 생생한 디지털 RGB 색상을 반영하여 더욱 다채로운 디자인을 선보일 수 있게 된다.


다프트 펑크(Daft Punk)의 멤버 중 한 명인 토마스 방갈테르(Thomas Bangalter)가 제작한 맞춤형 사운드트랙과 함께 공개된 이 컬렉션의 핵심은 디자이너의 독특한 아이디어와 패션계의 미래를 이끌 새로운 기술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쇼에 사용된 직물에는 교세라에서 개발한 지속 가능한 잉크젯 텍스타일 프린터 ‘포어스(FOREARTH)’를 사용하여 프린트가 진행되었다. 이 프린트기를 활용하면 기존의 섬유 인쇄 공정에 필요했던 증기 처리나 세척과 같은 별도의 시설이 필요하지 않으며, 이를 통해 에너지 소비와 이산화탄소 배출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이를 통해 패션 산업에 지속 가능하며 친환경적인 생산 방식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브랜드는 또한 첨단 기술 기반의 크리에이티브 그룹 MPLUSPLUS와 협업을 통해 옷에 시각적 표현을 확장할 수 있는 LED 섬유 및 실을 개발했다. 각 섬유 조각에는 약 10,000개의 풀 컬러 LED가 내장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역동적인 조명 효과를 구현한다.
이 LED 섬유는 일본 섬유 회사 시키보 주식회사가 개발한 ‘아즈텍 AZEK®’이라는 3D 직조 및 니트 원단과 결합되었다. 이 원단은 일본의 고대 신사 건축 구조에서 영감을 받아 빛 투과성을 조절하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으로, 앞에서는 빛을 차단하지만 뒤에서는 RGB 조명이 자연스럽게 투과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아즈텍 원단은 다가오는 2025년 오사카 엑스포의 스태프 유니폼에도 활용되며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언리얼에이지의 2025년 봄/여름 컬렉션의 주제였던 ‘바람WIND’를 반영한 이 유니폼은 옷 하단에 내장된 미니 팬이 작동하여 재킷 전체가 부풀어 오르며 풍선 같은 실루엣을 연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통기성이 뛰어난 원단과 바람을 활용해 부피를 조절할 수 있는 디자인 덕분에 착용자는 시원함을 느낄 수 있으며, 행사를 진행하는 직원들이 더욱 쾌적한 환경에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를 통해 그의 아이디어가 컬렉션을 넘어 실생활에서도 실용적으로 적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첨단 기술을 접목한 옷감은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 아이디어를 뒷받침하며, 패션쇼를 관람하는 이들에게 신선한 놀라움과 즐거움을 선사했다. 방갈테르의 사운드트랙과 더불어 미래적인 분위기를 연상하게 만드는 쇼에 등장한 옷은 매 순간 아름다운 이미지가 나타났다 사라지면서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켰다.


첨단 기술을 활용한 언리얼에이지 쇼가 화제가 된 것은 여러 차례 있어왔다. 그중에서도 국내에서 큰 화제가 되었던 것 중에 하나는 2년 전에 선보였던 2023-24 가을/겨울 컬렉션이었다. 이 쇼에서는 자외선을 이용하여 옷의 색을 바꾸는 작업이 실시간으로 선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디자이너는 인공조명 외에도 자연에 있는 자외선을 통해 의류를 변화시킬 수도 있으며, 이를 통해 패션과 기술이 우리 주변 환경의 연결을 드러내는 장치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어떤 분야든 첨단 기술이 접목되면 자연스레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기술을 이용하면서 감동을 선사할 수 있으려면, 그것을 활용하는 이의 의도가 반영되어야 한다. 언리얼에이지는 독창적인 요소와 첨단 기술을 활용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일상에서 입을 수 있는 옷을 추구한다. 또한, 다소 엉뚱해 보이는 아이디어조차 섬세한 작업을 통해 사람들을 설득하는 힘을 갖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전 세계적인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