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디자이너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갈까?
AI와 인간이 공존하는 방법
몇 년 전부터 인공지능(AI)은 사회 전 분야에 스며들며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나가고 있다.

인간을 압도하는 AI의 성과, 그리고 빠른 성장
지금까지는 없었던 기술이 일상을 침범하게 되면서 이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반응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을 기반으로 발전한 기술이 어느새 사람보다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몇 시간, 며칠 만에 완성할 수 있는 작품을 AI는 몇 분 만에 만들어냈다.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데이터 분석 역시 AI에게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생성형 AI로 만든 결과물들이 각종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이를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할리우드에서는 작가 노동조합이 AI를 활용한 대본 작업 가능성과 작가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온라인 아트 커뮤니티는 생성형 AI로 작업한 이미지를 업로드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을 만들어 AI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단순히 이들의 행동을 새로운 기술에 대한 투정으로 치부하기엔, 근거가 있었다.


AI 이미지 검색 엔진 플랫폼 에브리픽셀 Everypixel에 따르면, 매일 평균 3,400만 개의 이미지가 만들어졌으며 2023년 8월 기준 150억 개의 이미지가 생성되었다고 한다. 생성형 AI가 선보인 지 겨우 1년 반 만에 벌어진 일이다. 인간이 150억 개의 이미지를 모으기까지 15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AI가 얼마나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연하게도, 현재는 조사된 시기보다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와 영상이 훨씬 더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정량적으로 인간을 압도한 AI는 이제 정성적으로도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복합문화예술로 불리는 영화에서 AI가 활용되는 것이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게 되었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에밀리아 페레즈’는 AI 사용으로 논란의 여지는 있었지만 각종 영화제를 휩쓸며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영화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다양한 분야에서 이 새로운 도구는 점점 더 환영받고 있는 중이다.

노동력을 수월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감과 달리,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AI의 활약이 두드러지면서 새로운 기술은 환영하고 싶은 동시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각인되고 있다. 이런 반응이 일어나는 이유는 영화를 비롯한 각종 콘텐츠를 통해 새로운 기술이 초래한 디스토피아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기 때문이다. 영화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AI는 우리의 일상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AI와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공존해야 할까?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도구로 활용하기

지난 4월 7일부터 13일까지 진행되었던 밀라노 디자인위크에서 《더블 비전 Double Vision》 전시가 큰 주목을 받았다. 이는 런던을 기반으로 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블론드 BLOND와 뉴욕을 기반으로 하는 그루밍 브랜드* 해리스 Harry’s의 협업으로 진행된 결과물이다. 전시의 핵심은 ‘AI가 독창성, 디자인 장인 정신, 그리고 인간의 손길을 보존하면서 디자이너와 최종 사용자에게 이익을 줄 수 있을까?’와 ‘가까운 미래에 산업 디자인 과정은 어떻게 될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루밍 브랜드 Grooming brand: 개인 관리 및 위생 관련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판매하는 회사로 주로 남성의 그루밍에 초점을 둔다. 해리스의 경우 남성 그루밍 용품(면도 용품, 스킨·헤어 케어 제품) 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 관리 서비스까지 제공하며 성장하고 있는 회사이다.



전시에서는 ‘디자인 과정을 어떻게 진화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이들의 탐구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두 회사는 얼굴 스팀기 Facial Steamer를 개발하며 AI의 사용 유무에 따른 디자인 과정을 비교하고 연구했다. 해리스 팀은 기존의 산업 디자인 프로세스를 그대로 따랐고, 블론드 팀은 AI 툴을 활용하여 디자인을 진행했다. 전시에서는 이 모든 과정과 분석 결과를 함께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디자인 분야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공동으로 개발했다. 이 방법론에는 프로세스의 각 단계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어 AI를 활용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했다. 덕분에 이 방법론은 다양한 분야에서 인공지능의 현재 유용성을 입증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는 지침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블론드의 창립자인 제임스 멜리아 James Melia와 해리스의 디자인 책임자 라이언 도허티 Ryan Dougherty는 전시의 내용이 디자인 과정에서 AI의 사용을 비난하거나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이어 현재 단계는 AI가 디자인 프로세스에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지 이해하는 초기 과정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두 팀이 스팀기를 개발하면서 알게 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두 가지 방법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었으며, 이를 신중하게 혼합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점이었다. 전시를 통해, AI가 위협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디자인 과정을 보다 빠르고 낫게 만들 수 있는 파트너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었다.

AI가 보조자로서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플랫폼인 99designs가 135개국의 약 1만 명의 프리랜서 디자이너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이미 많은 디자이너들이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응답자의 52%가 이미 AI 툴을 사용 중이었으며, 24%는 앞으로 사용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이는 2023년과 2024년 데이터를 기반으로 기술 발전에 따른 태도 변화, 경제적 영향, 미래 전망 등을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한 결과다.

이 새로운 기술이 업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지난날의 우려와 달리 대부분 디자이너들은 인공지능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응답자 중 56%는 생성형 인공지능과 디자인 업계의 미래에 대해 기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결과가 나온 기반에는 생성형 AI의 성능이 향상된 것도 있지만, AI를 활용한 수입이 늘어난 것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보고 있다. 응답자 중 무려 61%가 수입에 영향을 미쳤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윤리적인 문제와 부실한 규제가 여전히 해결해야 하는 과제로 남아있지만, AI가 창출한 새로운 역할에 기대감을 거는 이들이 늘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와 더불어 AI 활용 능력은 이제 선택이 아닌, 디자이너와 창작자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기본 역량이 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놀랍게도 이러한 흐름을 미리 예측한 이가 있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필립 스탁 Philippe Starck은 AI 툴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전부터 이를 활용한 디자인을 선보이며 디자인계의 선구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A.I.’라는 이름이 붙은 이 의자는 디자이너가 가구 회사 카르텔 Kartell을 위해 소프트웨어 회사 오토데스크 Autodesk와 협력하여 완성한 결과물이다. 이들은 AI에게 ‘제한된 재료로 사람이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의자’를 요청했고, 그 결과 군더더기 없는 유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의자가 탄생했다.
이 의자는 세계 최초로 인간과 AI가 합작하여 완성한 가구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디자이너는 이를 “우리의 뇌 밖, 사고방식의 습관 밖에서 설계된 최초의 의자”라며 “다른 곳에서 새로운 세상이 우리에게 열린다.”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생각이나 습관, 문화에 기반하지 않은 디자인은 아름다움과 실용성 모두를 고려해 놀라움을 선사한다. 처음 의자가 공개되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의자는 AI와 인간의 창의적 공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인정받으며, 디자인계의 미래를 미리 엿볼 수 있었던 혁신적인 시도로 다시 평가받고 있다. 언제나 첫 시도는 어렵고 힘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AI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분야가 늘어났다. 한때는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지만, 이제는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도구로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AI와 인간은 자연스럽게 공존을 꾀하고 있다. 기술과 인간 각각이 각자의 고유한 강점을 살려 협력하는 일이 늘어나며, 서로가 윈윈하는 모습에서 희망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은 공감, 윤리, 감성,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데 탁월한 반면,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반복적인 작업을 신속하게 처리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 AI가 만든 창의적인 결과물도 모두 인간의 의견과 판단이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AI와의 공존을 위해서는 기술의 방향보다는 인간의 선택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윤리적인 기준과 정책이 확립되고, 이에 관련된 교육과 설계가 반영된다면 AI와의 미래는 보다 밝을 것으로 예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