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 고민은 〈첫 여름, 완주〉를 어떻게 디자인했을까?

듣는 것으로 시작해 읽고, 보는 세계로 확장된 소설. 출판사 무제의 ‘듣는 소설’ 시리즈 첫 권 〈첫 여름, 완주〉의 북 디자인과 〈완주:기록:01〉의 전시 아이덴티티를 설계한 스튜디오 고민을 만났다.

스튜디오 고민은 〈첫 여름, 완주〉를 어떻게 디자인했을까?

작가 김금희의 장편소설 〈첫 여름, 완주〉가 지난 5월, 싱그러운 초여름의 길목에서 출간됐다. 배우 박정민이 운영하는 출판사 무제의 ‘듣는 소설’ 시리즈 첫 작품으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으로 먼저 기획된 이 소설은 배우들의 목소리로 구현된 뒤 종이책이라는 형식으로 다시 완성됐다. ​현재 전시와 아트북으로 확장된 이야기는 매체를 넘나들며 하나의 유기적인 세계를 구성해가고 있다. 스튜디오 고민은 이 세계의 시각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파트너로서, 기획 초기부터 북 디자인과 전시 아이덴티티에 이르기까지 프로젝트 전반에 깊이 관여했다.

Interview

이영하, 안서영 스튜디오 고민

‘듣는 소설’의 시작점에서

〈자매일기〉에 이어 무제와의 두 번째 작업이네요. 어떻게 인연이 시작되었나요?

박정민 대표님과 처음부터 인연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어느 날 이메일로 연락을 주셨고, 타 출판사의 추천으로 저희 작업을 살펴보신 뒤 연락 주셨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자매일기〉를 함께하게 되었고, 이후 자연스럽게 〈첫 여름, 완주〉로 이어졌죠. 무제는 편집자와 디자이너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외에도 판형, 디자인, 프로모션 등 책 제작 전 과정을 대표님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만들어가는 출판사예요. 대표님은 편집장 겸 기획자 겸 마케터 같으시죠. (웃음) 두 권의 책 모두 외부 편집자가 있었지만 디자인 관련해서는 저희와 직접 소통하셨고, 〈자매일기〉 마감을 앞두고 ‘듣는 소설’ 시리즈에 대해 말씀해주셨어요. 실제 〈첫 여름, 완주〉의 킥오프는 작년 8월 무렵으로, 〈자매일기〉 출간 시점과 맞물려 있죠.

〈첫 여름, 완주〉 작업에서 처음 받은 요청은 무엇이었나요?

대표님은 디자인에 대해 구체적인 피드백보다는 전체적인 방향을 제시해주시는 편이에요. 〈첫 여름, 완주〉에서는 “이 책이 오디오북으로 기획된 프로젝트라는 점이 명확히 드러나면 좋겠다”는 점을 강조하셨어요. 또 시리즈물로서의 연결성과 함께 이 책만의 콘텐츠 특성도 잘 반영되길 바라셨고요. 처음부터 전시, MD, 북 토크, 도서전까지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에 디자인도 단편적인 결과물이 아닌 전반적인 흐름 속에서 바라보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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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io gomin
영하 디자이너님은 프로젝트의 성격을 ‘분류’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고 들었어요. 〈첫 여름, 완주〉는 어떻게 분류했나요?

​‘듣는 소설’ 시리즈의 첫 권이기 때문에 시리즈물로서의 일관된 정체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동시에 매 권 다른 작가와 협업하기 때문에 작가 중심의 매거진 형태로도 분류할 수 있겠고요. 그런 맥락에서 책과 케이스를 분리하는 시스템을 많이 연구했어요.

‘듣는 소설’이라는 개념은 다소 생소해요. 오디오북으로 먼저 출간한 뒤 이를 다시 종이책으로 선보이는 형식이니까요.

저희도 처음엔 어떤 형식이 될지 감이 안 잡혔어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오디오북 녹음 현장에 초대받아 분위기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던 게 큰 도움이 됐어요. 배우분들이 실제 인물처럼 대사하고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이게 듣는 소설이구나’ 하고 현장에서 조금 깨달았던 것 같아요.

녹음실 현장 경험이 정말 인상 깊었었네요.

맞아요. 어두운 공간에서 녹음실 화면만 보이고, 저희는 뒤에서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요. 마치 머릿속에서 영상이 재생되는 듯한 감각이었어요. 그게 이 듣는 소설의 묘미인 것 같아요. 그때 느낌이 책의 표지나 도비라에 반영된 간결한 디자인, 모노톤 이미지, 주인공 손열매의 실루엣 같은 요소들로 이어졌어요.

〈첫 여름, 완주〉를 처음 읽었을 때는 어떤 인상이었나요?

여름 배경의 청춘 판타지 드라마를 한 편 완주한 기분이랄까요. 〈폭싹 속았수다〉처럼 아날로그 정서와 노스텔지어가 느껴지기도 했어요. 소설과 각본집 사이에 있는 듯한 형식이잖아요. 대사에 말맛이 살아 있고, 배경 사운드 묘사가 많아 어느새 머릿속에 싱그러운 완주 마을 풍경이 그려지곤 했어요. 영상으로도 보고 싶은 작품이에요. (웃음)

책은 담백하게, 케이스는 흥미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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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름, 완주〉 © studio gomin
디자인으로 해결해야 할 미션이 많았잖아요. 〈첫 여름, 완주〉의 디자인 방향은 어떻게 정립해 나갔나요?

딱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대표님과 유기적으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형성되었다고 생각해요. 회의뿐 아니라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연락을 주셔서 작업 전반이 ‘핑퐁’처럼 진행됐어요. 첫 미팅에서 “책이 카세트테이프처럼 보이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를 주셨고, 거기서부터 비디오테이프 같이 레코딩된 콘텐츠를 담는 저장장치로 생각이 이어졌죠. 결과적으로 책과 케이스를 분리한 형태를 구상하게 되었어요.

‘듣는 소설’ 프로젝트를 위한 로고도 만들었어요.

‘듣는 소설’은 책 한 권에 머무는 게 아니라 다양한 매체로 확장되는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브랜드 아이덴티티 정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광범위하게 사용할 수 있는 ‘REC.NOVEL’ 로고를 만들었죠. ‘레코딩 노블’이라는 의미를 담아 카세트테이프 형태로 도식화했어요. 본 책의 책등과 표지에서 보실 수 있어요.

시리즈물과 ‘듣는 소설’로의 정체성은 본 책이 품고 있는 거군요. 슬라이드 케이스에는 카세트테이프 형태가 아닌 다른 로고가 있던데요?

‘레코딩’이라는 콘셉트 아래 매 호에 맞는 별도의 케이스를 디자인하는 방향을 생각하고 있어요. 책의 내용을 표현하는 장치로서 케이스를 고민한 결과죠. 그래서 본 책에는 고정 로고, 케이스에는 변화 가능한 플레이어블 로고를 적용했어요. 〈첫 여름, 완주〉에는 비디오 가게와 비디오테이프라는 키워드를 반영해 레트로 비디오 자켓과 VHS 스타일 로고를 조합했지만, 다음 권에는 또 다른 형태가 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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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름, 완주〉 케이스 앞면과 뒷면 © studio go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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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름, 완주〉 내지 © studio go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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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름, 완주〉 본 책 표지 © studio gomin
디자인에도 ‘정도 조절’이 중요했다고 하셨죠?

맞아요. 책, 북 토크, 전시, MD, 도서전, 아트북 등 〈첫 여름, 완주〉의 콘텐츠가 순차적으로 공개되기 때문에 밸런스를 맞추는 게 중요했어요. 하나의 소설에서 출발한 콘텐츠를 매체에 따라 새로운 형식으로 받아들이게끔 하는 출판사의 시선이 독자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랐죠. 본 책은 녹음실의 인상을 담아 녹음 현장에서 손에 들고 다니는 대본집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타이틀은 기본 명조체, 본문은 타자기 같은 서체를 사용해 최대한 담백하고 가독성 있게 구성했어요. 책날개도 없고요. 반면 케이스는 〈첫 여름, 완주〉가 더 흥미롭게 보이도록 하는 게 우선이었고, 전시에서 사진이 많이 활용될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러스트로 진행하고자 했어요. 레트로하고 캐주얼하면서도 인물의 특징을 잘 묘사해주시는 장띵 작가님과의 협업이었고, 이는 전시나 본 책과도 다른 결을 가지도록 대표님이 적극적으로 제안하신 부분이기도 해요.

전시로 확장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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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기록:01〉 전시 현장 스케치 © studio gomin
성수의 복합문화공간 LCDC SEOUL에서 6월 9일까지 열리는 전시 〈완주:기록:01〉의 디자인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눠보고 싶어요. 이번 전시에서는 아이덴티티부터 다양한 지류 MD까지 디자인하셨죠.

책이 가지는 친근한 분위기보다는, 전시에서는 디자인 요소를 활용해 좀 더 컨셉추얼한 인상을 주고 싶었어요. 무제가 단지 책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하나의 콘텐츠를 실험하고 확장하는 출판사라는 점을 전달하려 했고요. 단순한 이미지 나열이 아닌 ‘청각 전시(Audible Exhibition)’라는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는 자리라는 점도 강조하고 싶었어요.

‘완주:기록:01’이라는 전시 타이틀도 인상 깊어요. 이것을 시각적으로 어떻게 풀어내셨나요?

타이틀은 조금 늦게 정해졌는데요. 박정민 대표님이 아마 마라톤을 다녀온 날인 것 같아요. 갑자기 “이건 어때요?”하고 제안하셨죠. (웃음) 시간을 기록하는 디지털 시계의 픽셀, 그리고 마라톤 완주라는 키워드를 함께 주셨고요. 이를 바탕으로 픽셀 그래픽과 마라톤 리본, 또는 길처럼 보이는 곡선을 활용해 ‘완주’와 ‘기록’이라는 이미지를 전시 아이덴티티에 담아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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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기록:01〉 리플렛 © studio go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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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한정판 사진 북 커버 © studio go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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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 렌티큘러 엽서, 북마크 © studio gomin
리플렛이나 한정판 사진 북 커버에서도 디테일이 많이 느껴졌어요.

리플렛은 전시 타이틀을 전면에 배치하고 접지를 펼쳤을 때 정보가 시야에 확 들어오도록 구성했어요. 처음 전시가 어두운 공간에서 청각 중심으로 진행되는 만큼 리플렛을 통해서도 어떤 ‘펼쳐짐’의 감각이 느껴지길 바랐어요. 오디오북을 들으면 그려지는 햇볕이 쏟아지는 숲은 녹색과 노란색으로 표현했고요. 뒷면은 대표님도 수집하시는 영화 전단의 무드를 반영했습니다.

​그리고 로버트 D. 앤더슨의 사진을 활용한 한정판 사진 북 커버는 포스터 형태의 띠지를 기존 케이스에 끼우는 형식인데요. 박정민 대표님이 직접 A4용지를 자르고 실험한 아이디어로 탄생한 커버입니다. 집에서 여러 방식을 실험해보신 것 같아요. 그 영상을 공유해 주셨죠. 사실 이런 아이디어를 주고받을 때 경험적으로 현실화가 까다로울 수 있겠다 싶은 부분이 예상되는데, 그렇게 어렵겠다고 생각한 부분을 실현하는 대표님의 의지와 능력에 여러 번 놀랐어요. 렌티큘러 엽서는 자연스러운 장면 전환이 되는 사진을 대표님이 직접 골라주셨는데, 단순히 예쁜 컷이 아닌 스토리텔링에 중점을 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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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형태의 전시 한정판 사진 북 커버. 로버트 D. 앤더슨(박정민 대표)이 그리는 상상 속의 완주 마을 풍경을 담았다. © studio gomin
로버트 D. 앤더슨 작가가 박정민 대표님이시죠? (웃음) 사진을 그렇게 잘 찍으시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저희도 놀랐어요. 처음엔 “몇 장 찍어보겠다”고 하셔서 가볍게 생각했는데, 파주나 양평 등 촬영을 위해 직접 장소를 찾아다니셨더라고요. 폴더를 보면 장소가 정말 다양한데, 그런 열정이 대단한 것 같아요. 로버트 님의 사진을 더 많이 보고 싶으시다면 곧 나올 아트북을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웃음)

끝나지 않은 완주

처음 이 긴 프로젝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기억나세요?

설렘이 컸던 것 같아요. 대표님은 굉장히 열려 있고 아이디어도 풍부하신 데다 그걸 실행하는 추진력까지 갖추고 계시거든요. 결정과 피드백이 빠른 점도 늘 인상적이었고요. 함께 작업하면서 긍정적인 자극을 많이 받았고, 그래서 이 시리즈가 계속되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에 대한 기대도 커요.

먼저 주고받은 이메일에서 이번 작업이 두 분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고 하셨죠. 어떤 점에서 특히 그렇게 느끼셨나요?

하나의 소설을 다양한 매체로 확장해 나가는 과정이 정말 즐거웠어요. 세계관을 점차 넓혀가는 일은 저희도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고, 작업마다 주는 만족감이 달라서 전체적으로 의미 있는 여정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이를 통해 종합 예술을 선보이는 듯한 기분도 들고요. 소설이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들과 연결되는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어요. 전시, 북 토크, 그리고 SNS를 통해 올라오는 반응을 실시간으로 접하는 것이 큰 기쁨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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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기록:01〉 전시 현장 스케치 © studio go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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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기록:01〉 전시 현장 스케치 © studio gomin
이번 프로젝트와 관련해 꼭 덧붙이거나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아마도 저희보다 박정민 대표님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실 것 같아요. 대표님은 책이나 전시의 기획과 디자인의 방향성, 아이디어 등 모든 과정에 깊이 관여하시며 솔선수범하는 분이에요. 정말 열정이 넘치는 출판인이시죠. 저희는 그런 방향을 보다 명확하게 구현해내는 역할에 집중했고요. 협업자를 대하는 태도도 물론 훌륭하시지만, 독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무척 섬세하고 사려 깊으시다는 점을 꼭 이야기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요즘은 어떤 작업에 집중하고 계신가요?

사진가 표기식 작가님과 스튜디오 고민의 출판 레이블 ‘LASTzCOPY’의 두 번째 사진집을 준비하고 있어요. 올해 언리미티드 에디션이나 도쿄 아트북 페어에서 선보일 예정이에요. 이전에 출간한 사진집 〈umipodo〉도 여러 북 페어에서 계속 소개하고 있어요. 출판, 앨범, 매거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파트너십으로 함께하는 분들과도 계속 협업 중이고요. 〈첫 여름, 완주〉도 아직 완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서전과 아트북까지 잘 ‘완주’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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