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서 브랜드로, 맥시코의 카리뇨 스튜디오
멕시코 과달라하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카리뇨 스튜디오는 브랜드를 사람처럼 디자인하는 내러티브 중심의 마이크로 스튜디오다. 작은 규모를 정체성으로 삼고, 감정과 이야기를 시각으로 풀어내는 카리뇨 스튜디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호세 파블로 살라자르를 만났다.



멕시코 과달라하라에 위치한 카리뇨 스튜디오(Estudio Cariño)는 단순한 브랜딩 스튜디오가 아니다. 이들은 브랜드를 ‘사람처럼’ 만들고, 시각 아이덴티티를 이야기로 풀어내는 내러티브 중심의 디자인 실험실이다. 사랑스럽다는 의미의 ‘카리뇨(Cariño)’에는 이들이 추구하는 디자인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스튜디오의 공동 설립자 호세 파블로 살라자르(José Pablo Salazar)는 ‘디자인은 사람의 일이며, 이야기로 기억되어야 한다’는 믿음 아래,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대한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프로젝트들을 실현해왔다. 그의 파트너 이반은 브랜드의 목소리와 서사를 설계하고, 살라자르는 그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둘은 스튜디오의 규모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마이크로 스튜디오’라는 정체성 자체를 전략으로 삼고 있다. 본 인터뷰에서는 카리뇨의 철학, 창작 방법론, 대표 프로젝트인 ‘떼낄라 데세오(Tequila Deseo)’, 그리고 감정을 중심으로 디자인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호세의 디자인은 질문을 던지고, 웃음을 유도하며, 때로는 무겁고 진지한 주제에도 따뜻함을 불어 넣는다. 자그마하지만 강력한 이미지를 지닌 이 디자인 스튜디오의 세계를 함께 들여다보자.
Interview
호세 파블로 살라자르 카리뇨 스튜디오 창립자 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호세 파블로, 아직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저는 호세 파블로 살라사르이며, 멕시코 할리스코 주 과달라하라에 위치한 마이크로 브랜딩 및 비주얼 아이덴티티 스튜디오 카리뇨(Cariño)의 창립자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입니다. 저는 사카테카스주의 헤레즈(Jerez, Zacatecas)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헤레즈와 이름이 같아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고향입니다. 디자인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과달라하라로(Guadalajara) 이주했고, 2018년부터 ‘카리뇨’ 프로젝트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스튜디오는 규모는 작지만, 주류, 패션, 호텔, 문화 상품 등 다양한 산업 분야의 지역 및 글로벌 브랜드와 협업하고 있으며, 프로젝트마다 깊은 애정을 담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마이크로 스튜디오’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계신데, 카리뇨는 어떤 방식으로 시작되었고, 지금의 규모는 어떻게 되나요?
‘마이크로’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입니다. 현재 스튜디오는 저와 이반, 단 두 명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반(Iván)은 디자이너가 아니라 작가로, 브랜드 네이밍과 카피라이팅, 톤 앤 매너, 내러티브 구성 등 모든 언어적 측면을 담당합니다. 반면 저는 비주얼 아이덴티티, 그래픽 시스템, 응용 디자인, 아트 디렉션 등 시각적인 부분을 맡고 있죠. 원래는 아란자(Aranxa)라는 친구와 함께 셋이 시작했는데, 그녀는 이후 패션 디자인에 집중하기 위해 스튜디오를 떠났고, 지금은 저와 이반 둘만 남아 있습니다. 규모가 작다는 점을 숨기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마이크로 스튜디오’라는 이름으로 당당히 드러내는 것이 저희의 전략입니다.


카리뇨는 밝고 낙관적이며 유쾌한 정서를 지닌 브랜드로 보입니다. 이 스튜디오를 정의하는 공통된 철학이나 가치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우리는 단계적인 메뉴얼보다는 ‘의식적인 즐거움(conscious joy)’이라는 철학을 추구합니다. 디자이너든 아니든, 누구나 “와, 이거 멋지다!”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잖아요. 저는 그런 감탄을 이끌어내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아직 디자인 프로세스를 이해하지 못하던 청소년 시절, 광고를 보고 전율했던 감정이 제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때 느꼈던 감동을 다시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또한, 장례 산업처럼 공식적이고 진중한 분야의 프로젝트일지라도, 그 안에는 분명히 다정한 낙관주의의 여지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역할은 바로 그 감정을 포착하고 증폭시켜 브랜드가 기능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따뜻함을 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더 이상 예쁜 로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브랜드는 이야기와 감정을 전하는 ‘경험’이 되어야 하며, 그 경험을 시각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저희가 하는 일입니다.



카리뇨에서는 프로젝트를 어떤 방식으로 시작하고 완성하나요? 구체적인 작업 과정을 단계별로 소개해 주세요.
좋은 질문이에요. 저희는 프로젝트를 네 가지 단계로 나누어 진행합니다. 1단계는 몰입과 라이브 브리핑입니다. 설문지에 의존하지 않고 고객과의 실시간 대화를 통해 맥락, 대상, 목표, 그리고 무엇보다 브랜드의 잠재된 개성을 탐색합니다. 질문은 진행하면서 구체화되고,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분석이 이루어집니다.
2단계는 내러티브 스크립트로, 이 단계에서 중심은 이반입니다. 그는 브랜드의 목소리 톤, 사용해야 할 단어와 피해야 할 단어, 주요 순간들, 극적인 구조까지 모두 담은 긴 텍스트 문서를 작성합니다. 저는 이 작업을 영화의 대본처럼 생각합니다. 브랜드의 이야기 구조가 이 단계에서 명확하게 정리됩니다.
그래픽 스토리보드 작업이 3단계입니다. 이제 저는 내러티브에 기반하여 시각적 해석을 시작합니다. 상징, 색상 팔레트, 타이포그래피, 일러스트 스타일, 캐릭터, 모션, 사운드 등 모든 구성 요소를 스토리보드 형태로 정리하죠. 이 스토리보드에 따라 어떤 프로젝트는 10개의 로고가 필요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엔 의도적으로 흐릿하고 식별하기 어려운 로고가 필요할 수도 있어요. 규칙은 내러티브가 만들고, 디자인은 그 규칙에 시각적 옷을 입힙니다.
4단계는 구현 및 사용자 경험 설계죠. 패키징, 사인, SNS 콘텐츠, 인테리어 등 브랜드가 등장하는 모든 접점에서 사용자가 무엇을 보고 느끼게 될지를 상상합니다. 브랜드와의 접촉 전, 중, 후에 각각 어떤 경험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예상치 못한 작은 놀라움을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저희는 음악, 영화, 여행, 예술에서 끊임없이 영감을 얻습니다. 24시간 동안 스토리를 소비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디자인의 원재료가 됩니다.

‘가장 좋아하는 자식’ 같은 프로젝트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어떤 프로젝트가 내게 가장 깊은 흔적을 남겼느냐고 묻는다면, 조금 부끄럽지만 ‘테킬라 데세오(Tequila Deseo)’를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작은 대학 시절 친구의 의뢰였습니다. 그는 단순히 새 술을 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대에 걸쳐 이어온 가족 유산을 되살리고자 했죠. 흥미로운 건 ‘Deseo’라는 상표가 이미 존재했지만 등록이 만료된 상태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되찾기 위해 법적 절차를 밟았고, 그렇게 이름부터가 ‘욕망’을 실현하는 첫 행보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테킬라를 ‘파티용 술’이라는 틀에서 꺼내, 한 모금마다 소원을 빌고 다짐을 새기는 의식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할리스코는 테킬라의 발상지답게 아름다운 병과 화려한 스토리가 차고 넘치는 곳. 차별화를 위해 우리는 손·도구·별자리라는 상징을 활용해 ‘함께 노력하면 꿈이 실현된다’는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테킬라 데세오는 우리 스튜디오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작품이 되었고, “데세오 프로젝트를 보고 연락드립니다”라는 첫 인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카리뇨의 대표작으로 남아, ‘노력과 스토리텔링이 깃든 욕망은 결국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확산 속에서 디자이너로서 어떤 방향을 잡고 계신가요?
저는 인공지능이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나 인터넷처럼, 분명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기술이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모든 AI 모델은 결국 인간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최근 AI가 만든 ‘미발표 비틀즈 노래’에 대한 스티븐 윌슨의 말처럼, 기술이 주는 신기함이 감동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패스트푸드처럼 몇 초 만에 생성되는 브랜드도 있겠지만, 정성을 들여 천천히 조리되는 ‘고급 요리’ 같은 브랜드도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트리밍이 바이닐을 죽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되살렸듯, 디지털 기술의 쓰나미는 오히려 활판 인쇄나 수작업 일러스트레이션, 조각 같은 아날로그 작업의 가치를 재조명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카리뇨(Cariño)가 추구하는 차별점은 바로 그 ‘애정(cariño)’에 있으며, 오늘날의 AI가 아직 다다르지 못한 진짜 삶의 내러티브에서 비롯됩니다.


라틴 아메리카 디자인에는 어떤 정체성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분명 존재합니다. 라틴 아메리카 디자인은 감정과 표현력이 강한 시각 언어를 갖고 있어요. 높은 채도의 색상, 보컬적인 타이포그래피, 대담한 레이아웃, 그리고 멕시코의 거리 간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필레타도, 페루의 치차 포스터 등 대중문화에서 유래한 참조들이 그 예죠. 또한 라틴계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카피와 내러티브 구성에서도 일종의 ‘장황하지만 매력적인 스타일’을 공유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럽, 호주, 아랍권의 고객들이 저희 작업을 찾는 이유도 바로 이 ‘작은 따뜻함’ 때문이에요. 제 첫 100% 해외 프로젝트는 2020년 팬데믹 한가운데 푸에르토리코에서 시작됐고, 이후 스페인, 독일 등에서 지속적으로 의뢰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지역만의 감성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 인터뷰를 읽게 될 한국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제가 꼭 전하고 싶은 말은,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겁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시간과 마음, 개인적인 헌신을 조금 더 보태면 결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어요. 저는 디자이너이기 전에 ‘사람’입니다. 그 인간적인 면이 작업에 녹아들 때, 그 차이가 만들어지고, 저는 그것이 앞으로 기술이 점점 정형화되어 가는 시대에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해독제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