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과 현실의 기괴한 경계, 데이비드 린치의 미학을 보여주는 소품들
‘데이비드 린치 컬렉션’ 경매에 나온 소장품 5가지
지난 1월 세상을 떠난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의 유품들이 경매로 공개됐다. 영화 채널 터너 클래식 무비(TCM)와 경매업체 줄리엔스 옥션이 주최해 18일 열린 ‘데이비드 린치 컬렉션’ 경매에는 린치가 촬영을 위해 사용한 소품, 대본, 필름, 장비와 함께 그가 직접 만든 가구와 개인 소장품까지 총 450여 점이 나왔다. 이 가운데, 혼란스럽고 기이하며 환상적인 린치의 작품 속 미학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다섯 가지를 골라 소개한다.


지난 1월 세상을 떠난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의 유품들이 경매로 공개됐다. 영화 채널 터너 클래식 무비(TCM)와 경매업체 줄리엔스 옥션이 주최해 18일 열린 ‘데이비드 린치 컬렉션’ 경매에는 린치가 촬영을 위해 사용한 소품, 대본, 필름, 장비와 함께 그가 직접 만든 가구와 개인 소장품까지 총 450여 점이 나왔다. 이 가운데, 혼란스럽고 기이하며 환상적인 린치의 작품 속 미학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다섯 가지를 골라 소개한다.
<트윈 픽스Twin Peaks> 시리즈 속 ‘레드 룸’의 붉은 커튼과 러그

경매에서 가장 첫 번째로 소개된 린치의 소장품은 ‘트윈 픽스’ 시리즈의 초현실적인 공간 ‘레드 룸’의 붉은 벨벳 커튼과 지그재그 패턴 양모 러그다. ‘레드 룸’의 경계를 이루는 붉은 커튼은 연극적이면서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커튼은 현실일 수도, 또다른 초현실일 수도 있는 저 너머의 다른 공간을 극중 인물들이 보지 못하도록 가린다.
붉은 커튼은 린치의 작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테마다. 어두운 이면을 가진 ‘로스트 하이웨이’의 주인공은 종종 집 한 켠에 쳐진 붉은 커튼 뒤로 사라지며,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는 꿈과 현실의 전환점이 되는 클럽 실렌시오의 무대 뒷배경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린치는 이 커튼과 러그를 개인 작업실과 음악 녹음 스튜디오에서도 사용한 적이 있다고 한다..
<트윈 픽스Twin Peaks> 시리즈 속 보안관 사무실의 플로어 조명 세트


데이비드 린치는 집에서 사용할 커피 테이블과 캐비넷, 조명 등을 직접 디자인하고 만들 정도로 가구를 좋아했다. 2024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자신이 디자인한 의자와 액자들이 가득한 공간인 ‘Interiors by David Lynch: A Thinking Room'(데이비드 린치의 인테리어: 생각하는 방)을 선보였을 정도다. 바우하우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찰스 임스 등을 좋아한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 있는 린치는 특히 미니멀리즘과 미드 센추리 모던 스타일에 관심을 가졌다. 경매에 나온 촬영 소품과 개인 소장품에서도 그런 그의 관심과 취향이 드러난다. 1990년 방송된 ‘트윈 픽스’의 첫 번째 시즌부터, 긴 공백을 두고 2017년 제작된 세 번째 시즌에 이르기까지 보안관 사무실에 꾸준히 등장하는 사각 프레임의 플로어 조명도 그 중 하나다.
<트윈 픽스: 더 리턴Twin Peaks: The Return> 속 액자에 담긴 핵폭발 사진


1945년 미국 뉴멕시코에서 있었던 인류 최초의 핵폭발 실험 ‘트리니티 실험’을 담은 대형 흑백사진도 경매에 나왔다. ‘트윈 픽스’ 세 번째 시즌 초반, 린치 본인이 연기한 극중 FBI 부국장 고든 콜의 사무실 벽에 걸려 있던 사진이다. 이후 에피소드에서 이 핵폭발 실험이 작품에서 핵심적인 존재인 악령의 탄생과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린치는 악이 최초의 핵실험에서 기원했다는 아이디어를 한 에피소드 내내 대사가 거의 없는 흑백화면으로 풀어냈으며, 이후 ‘미국 TV 역사상 예술적으로 가장 대담한 에피소드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ive> 속 윙키스 다이너의 메뉴판\

‘윙키스 다이너’는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식당이면서 동시에 이 영화, 심지어는 린치의 모든 영화에서 가장 공포스럽다는 평가를 받는 장면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경매에 나온 메뉴판에는 “언제나 뜨거운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문구가 90년대 스타일의 폰트로 적혀 있다. ‘윙키스Winkies’라는 이름은 린치가 많은 영향을 받은 작품 중 하나로 알려진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한 서쪽나라 종족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영화의 전반부, 주인공들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남성, 댄과 허브가 윙키스 다이너에서 만난다. 댄은 허브에게 그동안 이 식당 뒤편에서 괴물로부터 공격당하는 끔찍한 꿈을 계속 꾸었으며, 그래서 오늘 이곳에 왔다고 고백한다. 이 말을 들은 허브는 직접 확인해보라고 권하고, 이후 관객들에게 엄청난 긴장감을 주는 장면이 이어진다. 맥락이 없고 기괴해 보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윙키스 다이너 장면은 주인공이 꾸는 꿈이라고도 해석된다. 린치는 1970년대부터 비슷한 형태의 프랜차이즈 식당 ‘밥스 빅보이’를 자주 찾아 커피와 밀크 쉐이크를 마시며 창작과 관련된 메모를 했다고 전해지는데, 어쩌면 그 식당에서 이 장면에 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을지 모를 일이다.
<로스트 하이웨이Lost Highway> 속 빈티지 소파


로스앤젤레스의 조용한 주택가에 사는 젊은 부부. 평온해야 할 것 같은 교외에서의 일상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와 비디오테이프의 존재는 이들의 삶에 균열을 낸다. 린치는 OJ 심슨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평범해 보이는 삶의 이중성과 인간의 양면성을 탐구하는 ‘로스트 하이웨이’를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마치 콘크리트 요새처럼도 보이는 영화 속 주인공의 집은 그런 주제를 전달하는 또 하나의 캐릭터다. 집이 등장하는 장면 대부분을 촬영한 이 건물은 당시 린치 개인 소유의 주택으로, 모더니즘 스타일에 영향을 준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아들인 로이드 라이트(혹은 로이드 라이트 주니어)가 설계한 것이다.


린치는 건물 벽에 길고 좁은 창문을 내고 안에는 터널처럼 구불구불한 복도를 만드는 등 개조를 하여 이 집을 주인공의 편집증과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했다. 부메랑 형태의 낮은 소파를 비롯해 드문드문 배치된 가구들은 아늑하기보다는 불균질한 느낌을 낸다. 경매에 나온 소파는 실제 촬영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