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감성 로컬 서점, 타이틀 스토어 TITLE STORE

사라지는 것들을 위한 공간

서리 힐스와 바랑가루에 위치한 타이틀 스토어는 책, 음악, 영화 등 아날로그 콘텐츠를 중심으로 깊이 있는 큐레이션을 선보이는 시드니의 대표 독립 서점이자 문화공간이다. 빠른 소비 대신 느림과 탐색의 즐거움을 제안하며, 디지털 시대에 잊힌 감각과 감수성을 되살린다.

시드니 감성 로컬 서점, 타이틀 스토어 TITLE STORE

오래된 것과 낯선 것의 가치를 천천히 되새기다

시드니를 거닐다 보면 의외로 조용하고 느리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만나기 어렵다. 대형 쇼핑몰, 프랜차이즈 브랜드, 카페 체인이 점령한 거리에서는 책, 음악, 영화 같은 감각적인 것들은 비교적 뒤로 물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분명 그 도시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건 바로 이러한 사소한 사적 취향들이며 이를 정성스럽게 모아놓은 장소는 도시의 문화적 밀도를 가늠하게 해주는 지표가 된다.

시드니 서리 힐스(Surry Hills)와 바랑가루(Barangaroo)에 자리한 ‘타이틀 스토어(TITLE STORE)’가 바로 그런 공간이다. 책과 음악, 영화와 예술 매체에 대한 진지한 애정으로 운영되는 이곳은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오래된 것과 낯선 것의 가치를 천천히 되새기는 방식으로 로컬 문화의 깊이를 더해 온 시드니의 유명한 독립 서점이자 문화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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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Store

타이틀 스토어는 디지털 환경이 제공하는 편리함 대신 느림과 탐색의 즐거움을 택했고 선택의 범위를 넓히기보다는 깊이를 좇았다. 진열된 콘텐츠 하나하나에는 큐레이터의 고집과 애정이 스며 있고 방문객은 그 고요하고 밀도 있는 공간 속에서 자신만의 감각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시드니에 존재하는 수많은 상점 가운데 타이틀 스토어가 유독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 도시가 점차 잃어가고 있는 감수성을 이 공간이 여전히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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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스토어는 2006년에 서리 힐스에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서리 힐스는 시드니에서 예술 창작자들이 가장 밀집한 지역 중 하나로 예술 트렌드를 가장 빨리 알 수 있는 동네이자 세련되고 자유분방한 시드니 사이더(Sydneysider)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가장 잘 보여주는 동네이기도 하다. 오래전부터 독립 출판 서점, 아트북 전문점, 실험적인 전시공간 등이 모여 문화 허브를 이루는 서리 힐스에 문을 연 타이틀 스토어는 처음부터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생각의 궤적을 공유하는 장소’를 지향한다는 철학에서 출발했다.

타이틀 스토어의 설립자이자 음악가인 스티브 쿨락(Steve Kulak)은 새로운 콘텐츠보다 ‘위대한 것들(great works)’, 다시 말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가치 있는 작품들에 집중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타이틀 스토어의 큐레이션은 한눈에 봐도 대중적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가장 잘 팔리는 책이나 최신 앨범 대신 대체로 고전 문학이나 실험 영화, 재즈와 클래식, 전위적인 전자음악, 그리고 소수의 독립 출판물이 이 작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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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Store, Surry Hills

타이틀 스토어가 큐레이팅하는 방식

타이틀 스토어의 서리 힐즈 매장은 작은 규모이지만 밀도 있게 채워져 있다. 서가에 꽂힌 책들은 문학, 철학, 시각예술, 건축, 음악 등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으며 큐레이터의 관심에 따라 매주 구성이 달라진다. 때로는 특정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전면에 걸리기도 하고 어떤 주에는 뉴욕 재즈씬 아카이브가 중심이 되기도 한다. 타이틀 스토어의 매력은 바로 이러한 유동성에 있다. 특정 취향을 전시하되 하나의 테마에 고정하지 않고 그 흐름 자체를 공간의 정체성으로 삼는 태도는 매장을 찾는 방문자에게 일회성이 아닌 반복적인 탐색을 유도하게 하기 때문이다.

진열대 한쪽에는 영문 시집들이 소박하게 놓여 있고 오래된 유럽 아트하우스 DVD와 희귀 비닐 음반들이 그 옆을 채운다. 이러한 구성은 단순히 상품 진열이 아니라 매장 자체가 하나의 세심한 전시 공간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아지트인 이곳에서는 낭독회와 공연 등 소규모 이벤트가 종종 열리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과 예술 애호가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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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Store, Surry Hills

서리 힐즈 지점의 꾸준한 인기 이후 타이틀 스토어는 2017년, 바랑가루에 두 번째 매장을 개점하며 시드니의 다른 문화 축으로 확장을 시도했다. 바랑가루는 시드니 항구 개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새롭게 조성된 고급 상업 및 주거 지역으로 현대적인 건물과 세련된 브랜드 매장이 즐비한 곳이다. 초고층 빌딩이 늘어선 공간 한가운데 타이틀 스토어가 들어섰다는 것은 굉장히 상징적이다.

바랑가루 지점은 유리와 콘크리트를 조합한 현대적인 공간에 클래식하고 비주류적인 콘텐츠를 채워 넣음으로써 타이틀 스토어 고유의 미학을 유지하면서도 도시 재개발 공간 안에서 문화의 다양성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서리 힐즈 지점과 비교했을 때 바랑가루 지점에서는 더욱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로 구성된다. 시각 예술 서적부터 요즘 보기 어려운 음악 다큐멘터리 DVD, 해외 영화감독 특별전 DVD 시리즈, 그리고 세계 각국의 독립 출판물까지 다양한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일본 현대 문학, 동유럽 예술 영화, 재즈와 보사노바 LP 등은 타 상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큐레이션으로 많은 이들이 바랑가루 매장을 목적지 삼아 찾아오게 만드는 힘이 된다.

타이틀 스토어는 콘텐츠의 보존과 감상의 방식을 제안하는 장소로, 특히 최근 몇 년간 스트리밍과 전자책 중심으로 재편되는 문화 소비 환경 속에서 타이틀 스토어가 유지하는 물성 중심의 접근 방식이 더욱 돋보인다. 손으로 넘기는 책의 질감, LP 재킷의 촉감, 영화 케이스에 인쇄된 컬러 톤, 이 모든 것들은 디지털 세대가 잊기 쉬운 감각을 다시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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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스토어가 특별한 이유는 대량생산, 무차별적인 소비, 효율 중심의 판매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대신 느리고 사적인 탐색, 개별적인 경험, 깊은 몰입을 전제로 한다. 이곳은 단지 무언가를 구매하는 공간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과 조우하고, 그 안에 머물며,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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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Store, Barangaroo

타이틀 스토어는 사라지는 것들의 가치를 존중하는 태도로 현대 도시 안에서 잊혀 가는 감수성을 되살리고 있다.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콘텐츠를 보존하는 차원이 아니라 문화가 느리고 진지하게, 반복적으로 소비될 수 있다는 믿음을 실천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책이나 음악을 좋아하고 문화 공간이 갖는 감각적인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다면 타이틀 스토어는 반드시 들러 볼 가치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발견의 기쁨을 주고, 우리가 점점 잃어버리고 있는 일상의 감각을 다시 찾게 해주는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타이틀 스토어는 바로 그러한 시간과 공간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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