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 너머의 삶을 빚다, 도예가 롱페이 토세이 왕
일상을 윤활하는 오브제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행위를 반복하는 의식인 리추얼(Ritual). 현대인은 저마다의 리추얼을 통해 바쁜 일상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삶의 균형을 되찾는다. 그 순간을 오래도록 함께하는 오브제가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물건을 넘어 일상의 동반자적 존재에 가까울 것이다. 코펜하겐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도예가 롱페이 토세이 왕(Longfei Tōsei Wang)은 이러한 리추얼의 순간에 집중해 오브제를 만들어왔다.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행위를 반복하는 의식인 리추얼(Ritual). 현대인은 저마다의 리추얼을 통해 바쁜 일상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삶의 균형을 되찾는다. 그 순간을 오래도록 함께하는 오브제가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물건을 넘어 일상의 동반자적 존재에 가까울 것이다. 코펜하겐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도예가 롱페이 토세이 왕(Longfei Tōsei Wang)은 이러한 리추얼의 순간에 집중해 오브제를 만들어왔다.

도예를 독학으로 시작한 그는 2020년에 다학제 스튜디오 토세이보(Tōseibo)를 설립하고, 차 도구와 커피 툴부터 인센스 스톤, 화병에 이르기까지 일상과 의식을 연결하는 기물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흙을 빚는 행위는 그에게 내면을 다시 마주하고, 삶의 리듬을 회복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롱페이의 작품은 감각적인 기쁨을 더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 여백을 만들어주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지난 5월, 라이프스타일 커뮤니티이자 공예 전문 공간인 ‘월WOL’에서 열린 롱페이의 서울 첫 개인전은 그의 철학을 고스란히 담아낸 자리였다. 전시 《EARTH & BREW : A Sip of Denmark 덴마크 흙에서, 한 모금의 순간까지》에서는 커피를 내리는 행위가 단순한 기술을 넘어 마음의 의식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고안된 ‘드래곤 스케일 커피 툴’을 중심으로, 차 도구와 식기, 화병 등 다양한 오브제를 함께 소개했다. 작가의 작품 세계를 직접 경험해볼 수 있는 커피 시음회도 함께 열려 더욱 풍성한 시간을 선사했다. 초여름의 기운이 감돌던 무렵, 코펜하겐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나 오브제를 매개로 삶을 가꾸는 태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Interview 롱페이 토세이 왕
토세이보(Tōseibo) 설립자, 작가

ㅡ 도예를 시작하기 전에는 어떤 삶을 살아오셨고, 어떻게 이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클래식 바이올린을 전공하며 음악과 가까운 삶을 살았어요. 그러다 20대 초반, 순수미술과 다큐멘터리 사진에 매력을 느껴 진로를 바꾸게 되었죠. 사진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는 단편 영화와 TV 프로그램, 광고 등 다양한 시각 콘텐츠를 제작하는 영상 프로덕션 회사를 설립해 운영했습니다. 그러던 중 다도를 배우게 되면서 일상의 의식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깊어졌고, 핸드드립 커피도 제게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차와 커피를 둘러싼 도구에 매료되다 보니, 언젠가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도예를 시작하게 되고, 어느덧 5년이 훌쩍 지났네요.

ㅡ 중국에서 태어나 덴마크에서 성장하셨죠. 이러한 다문화적 배경은 작가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덴마크에서 성장하면서 저는 점점 더 동아시아 문화와 고대 문명에 깊은 끌림을 느끼게 되었어요. 사진작가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30개국을 여행하며 수많은 역사 박물관을 찾았고, 그 경험을 통해 다양한 문화적 전통을 배우고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학습과 사유의 과정이 지금의 예술적 감수성을 서서히 빚어낸 것 같아요. 흙이라는 재료에 애착을 느끼게 된 것도,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죠.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점토는 사실 수백만 년 전 식물과 생물의 잔재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 사실만으로도 흙은 제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가장 원초적이고, 자연적인 매체이자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 주는 매개체라고 생각해요.

ㅡ 독학으로 도예를 익히기 시작해 스튜디오까지 설립하셨어요. 그 과정은 어떠했는지 듣고 싶습니다.
도예를 시작했을 무렵, 일본 민예 운동의 대표 작가인 가와이 간지로와 하마다 쇼지의 작품에 깊이 매료되었어요. 필 로저스 또한 제게 큰 영향을 주었고요. 처음에는 이들의 스타일을 따라 만들어보며 그 안에서 제 목소리를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들의 작품을 반복해서 분석하고 손으로 따라 해보며, 도예가 무엇인지 스스로 익혀갔습니다. 도예를 시작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몰입의 순간’을 경험했어요. 마음이 고요해지고, 모든 감각이 손끝에 집중되는 경험이었어요. 흙 속의 작은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까지도 생생하게 느껴졌죠. 그 순간, 왜 도자기를 만들고 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깊은 집중을 통해 명상 상태에 이르고, 흙과 침묵 속에서 교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가 이 길을 걷게 된 가장 본질적인 이유였습니다.
ㅡ ‘토세이보’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토세이(桃青)’는 일본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가 사용했던 호(號)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그는 중국 시인 이백(李白)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도(桃)는 이(李)에, 세이(青)는 백(白)에 대응시켜 이 이름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죠. 시에 대한 정진 속에서도 늘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 했던 바쇼의 태도가 고스란히 담긴 이름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같은 마음으로 ‘토세이’를 제 작가명으로 삼았고, 작업실의 이름도 ‘토세이보(桃青坊)’라 지었습니다. 이는 선대 시인에 대한 경의이자 흙을 대하는 자세를 잊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흥미롭게도 일본어로 ‘도(とう)’는 ‘도자기(陶)’와도 발음이 같아, 제게는 창작의 본질을 늘 상기시키는 상징처럼 다가옵니다.

ㅡ 작업할 때 어떤 기준을 우선순위로 삼나요?
기능을 가장 우선에 둡니다. 손으로 빚는 과정에서 직관에 따라 형태를 결정하고, 그 오브제가 어떤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할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하죠. 만들고, 사용하고, 실험해 보는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 비로소 형태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릇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사용될 때 불러일으키는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일상의 루틴과 의식을 통해 내면의 고요에 닿을 수 있다고 믿고, 나아가 그것이 명상에 가까운 상태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지점이 제 작업이 지향하는 진짜 본질입니다.

ㅡ 그렇다면 작업 초기와 비교해 현재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초기에는 유약의 표면감에 관심이 많아 주로 유광 유약을 사용했어요. 하지만 점차 덴마크의 야생 점토가 지닌 질감과 물성에 더 깊이 끌리게 되었죠. 흙과 직접 대화하듯 작업하고 싶었고, 그 거칠고 생생한 감촉이야말로 대지와 이어지는 진짜 연결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그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에 더 가까워졌습니다.

ㅡ 덴마크 전역에서 야생 점토를 직접 채집해 사용하는 방식은 공예에서 흔치 않은 접근입니다. 작가님께 이러한 재료적 경험은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인상 깊은 점은 흙의 성분이 지역마다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땅이 저마다의 기억을 품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 땅에 어떤 생명이 깃들었고, 어떤 기후와 역사, 자연적 요소들이 스며들었는지에 따라 흙의 성질이 달라집니다. 또한 가마를 지나 불을 통과한 뒤에는, 그 기억이 고유한 질감과 색, 성격으로 드러납니다. 결국 점토는 저마다의 목소리를 지닌 존재인 셈이죠. 저는 ‘공예’의 본질이란, 이처럼 지역의 재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과 대화를 나누며 작업하는 데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지난 100여 년간 산업화와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재료와 장소에 뿌리내린 지역적 표현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저는 덴마크의 야생 점토를 다루는 과정에서 이 땅이 지닌 고유한 질감과 기억을 가능한 한 온전히 존중하고 싶습니다.

— 최근 서울의 갤러리 WOL에서 열린 개인전이 큰 성과를 거뒀습니다. 모든 작품이 판매된 결과를 넘어, 이 전시가 작가님 개인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도 궁금합니다.
서울에서의 개인전은 저에게 있어, 제 작업 세계와 철학을 외부와 본격적으로 나누는 첫 번째 계기였습니다. 앞으로 더 먼 여정의 시작점이기도 했고요. 어떤 여정이든 시작과 끝이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는 법인데, 이번 전시에서 모든 작품이 판매되었다는 사실은 조용한 확신처럼 다가왔습니다. 그 안에 담긴 수년간의 사유와 감정을 많은 분들이 고스란히 느껴주셨다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시 기간 동안 많은 분들이 제 작업을 보고 마음이 평온해졌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것이 바로 제가 작업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본질입니다. 자연의 이치와 조화를 이루는 상태죠. 지금 이 시대에 가장 결핍되어 있으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감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전시의 제목인 ‘EARTH & BREW’는 그 자체로 상징적입니다. 이 두 단어의 조합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는지 궁금합니다.
이번 전시 제목은 갤러리 WOL에서 한국 관객들에게 더 직관적이고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기획한 이름입니다. ‘얼스’는 덴마크 야생 점토와 그로부터 탄생한 고유한 유약의 질감을 상징하고, ‘브루’는 전시의 핵심 작품인 드래곤 스케일 커피 세트와, 현장에서 진행된 커피 테이스팅 이벤트의 의미를 담고 있어요. 제게 전시는 단순히 작품을 진열하거나 판매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건 전체적인 경험이죠. 관람객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실제로 차나 커피를 마시며 그릇을 체험하게 되는 과정의 그 모든 순간이 작품의 진정한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 전시의 중심이 되었던 ‘드래곤 스케일 커피 세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점은 무엇인가요?
드래곤 스케일 커피 세트는 제가 커피와 그 추출 과정에 품어온 깊은 애정에서 출발했어요. 최근 몇 년 사이, 수많은 커피 브루잉 도구들이 등장하면서 ‘정밀함’과 ‘완벽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졌지만 제가 커피에 매혹된 이유는 기술적 완벽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끌린 건 추출의 순간, 물과 향기, 그리고 집중이 함께 흐르는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행위 그 자체였죠. 그것은 균형과 고요를 찾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기의 경우, 기능성과 사용 편의성을 가장 우선에 두었습니다. 보다 많은 이들이 차 문화를 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도록 돕고자 했죠. 커피 세트는 오랜 시간의 디자인 연구와 실험을 거쳐, 향과 바디의 균형을 이루는 하나의 완성된 시스템으로 설계했습니다. ‘절제 속 조화’라는 원칙이 이 작업의 중심입니다.
— 그래서 작가님의 커피 철학을 담아 ‘나만의 커피 의식(Way of Coffee)’을 만드신 것이군요.
네, 사용자가 커피의 향과 물 흐르는 소리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전파하고자 했어요. 마치 다도처럼 일상 속 명상과 내면 수양을 위한 도구이자 의식인 셈이죠. 저는 집에서 직접 원두를 로스팅하고, 덴마크의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라 카브라(LA CABRA)와도 인연을 맺으며 커피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있게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실험과 테스트를 거친 끝에 드리퍼와 서버의 디자인을 완성했는데요. 드리퍼는 바디감과 향의 균형을 중시했고, 서버는 반복적인 비율 조정을 통해 가장 이상적인 크기와 비례를 찾아냈어요.

— 테이블웨어나 화병에는 어떤 관점이 담겼나요?
차와 커피, 꽃 그리고 향 등 여러 분야의 의식용 오브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는 제가 문화를 바라보고, 철학과 디자인 그리고 공예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하나의 기반이 되어줍니다. 화병은 인간과 자연의 대화를 상징해요. 저는 정원을 가꾸며, 생장을 해치지 않는 여분의 가지와 꽃만을 수확해 꽃꽂이를 합니다. 식물의 생명에 대한 존중이 곧 작업의 태도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향은 제 작업의 정신적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재료를 배합하는 순간부터 향을 피우는 시간까지, 그 모든 과정이 저에겐 하나의 명상이자 내면과의 대화입니다.


— 작가님에게 일상 속 의식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그것이 창작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제게 일상 속 의식은 일종의 명상에 이르는 입구입니다. 그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단순하고 순수한 절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작업할 때는 도구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내고, 본질적인 기능만 남기려 합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사용자의 ‘의도’가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도록요.

— 작가님의 루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죠. 작업의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지키거나 혹은 제한하려고 하는 것이 있을까요?
코펜하겐 북부 해변 근처에 저희 가족이 함께 머무는 별장이 있어요. 바쁜 한 주를 마치고 매주 금요일 그곳으로 향해 주말 동안 휴식을 취합니다. 별장에는 1,000제곱미터가 넘는 정원이 있고, 사계절 내내 돌봐야 할 50여 종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어요. 계절마다 해야 할 일이 다르고 손이 많이 가지만, 이 정원을 돌보는 시간이야말로 저희에게 가장 큰 위안이 되는 순간들이에요. 자연과 가까이에서 호흡하고, 그 흐름을 이해하는 일은 우리 마음을 치유해 주는 약과도 같습니다. 주말 동안 자연에 안기는 것만으로도 도시에서의 바쁜 일상,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소진된 에너지를 완전히 회복하게 해주죠.
— 최근 재료나 형태 측면에서 새롭게 탐구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요?
오랫동안 혼합 매체(Mixed Media)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점토를 기본으로 삼되, 언젠가 목재나 금속 재료를 결합한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 요즘은 어떤 일에 집중하고 계신가요?
최근에는 뉴욕, 파리, 베이징, 도쿄 등 네 도시에서 열릴 전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스튜디오 밖에서는 사유와 내면 성찰에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고요. 저만의 예술적 철학을 계속 다듬고, 새로운 작업을 구상하는 일은 늘 저와 함께하죠. 낮과 밤의 경계 없이 이어지는 일이기도 해요.

— 마지막으로, 향후 어떤 비전을 품고 있는지 들려주세요.
스튜디오 토세이보가 단순히 도자기를 만드는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제가 믿는 가치와 철학을 전파하는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동시대 감각으로 진화해 나가며, 현대인의 일상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오브제를 만들고 싶어요. 제가 만드는 오브제가 소란스러운 일상을 잠시 멈추고,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시간 속에 존재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믿는 진실이자, 제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