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수집해 만드는 브랜드의 아이덴티티, 키아라 루차나

브랜드의 철학과 감성을 입체적으로 전하는 ‘사운드 아이덴티티’는 디지털 시대에 브랜드를 말하는 또 다른 언어가 됐다. 이 중심에는 사운드 디자이너이자 작곡가인 키아라 루차나가 있다. 알레시, 스와치, 니베아, 라바짜 등 세계적 브랜드와 협업해온 그는 브랜드의 정체성과 감정을 섬세하게 해석하고 이를 고유한 사운드로 번역했다. 작은 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 수집해 브랜드의 ‘목소리’를 만들어내며, 오늘날 사운드 브랜딩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소리를 수집해 만드는 브랜드의 아이덴티티, 키아라 루차나
ChiaraLuzzana SoundDesigner Portrait 001 Low
사운드 디자이너이자작곡가다. 밀라노 살로네 델 모빌레, 베니스 비엔날레 등에서 사운드 아트를 선보이는 설치 예술가이기도 하다. 전 세계 기업 및 에이전시와 협업해 사운드를 만들고, 강연을 통해 듣기의 중요성을 알리며, 도시의 소리를 수집하는 등 다채로운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chiaraluzzana.com
사운드 디자이너의 길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

나는 침묵 속에 태어났지만 주변 세상은 언제나 속삭이고 있었다. 벽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 층마다 다른 발걸음의 리듬, 멀리서 들려오는 세탁기 소음…. 7살 즈음 낡은 테이프로 주변의 소리를 녹음하고 그걸 재생한 적이 있었다. 세상에 악보가 생긴 듯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소리는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란 걸. 우리는 소리를 느끼고 기억하고, 그 소리로 인해 어떤 존재가 된다. 나는 단지 음악을 작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소리로 번역하기 위해 이 길을 택했다.

추상적인 브랜드의 개념과 가치를 몰입감 있는 사운드 아이덴티티로 전환하는 작업을 한다. 사운드 브랜딩에 대한 접근 방식이 궁금하다.

우선 나는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듯 공감과 호기심을 갖고 브랜드를 ‘듣는다’. 각 브랜드는 고유한 호흡과 숨겨진 맥박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브랜드의 감정적 핵심부터 이해하려 한다. 무엇을 파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믿고 있는지 말이다. 그런 다음 완전히 처음부터 사운드 생태계를 구축한다. 브랜드의 원재료를 녹음하고, 질감을 해석하며, 본질을 구현하는 악보를 작곡한다. 나는 브랜드를 위한 새로운 언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방법을 만들어냈다. 이는 브랜드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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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시의 엑스트라 오디너리 메탈 컬렉션을 사운드화한 영상.
많은 브랜드와 협업했다. 협업은 보통 어떻게,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지나?

팀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공간을 거닐고, 제품을 만져보고, 브랜드의 이야기를 이해한다. 그들의 ‘의미’를 듣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녹음을 시작한다. 기계의 쉭쉭거리는 소리, 포장재가 부드럽게 끌리는 소리, 재료가 다뤄질 때의 속삭임 같은 것을 기록한다. 그 후에는 특정 주파수를 분리하고 감정의 흐름을 조직한다. 모든 브랜드에는 서사가 있고, 나의 사운드 디자인은 그 리듬을 따라간다. 날것 그대로의 소음에서 시작해 의도적이고 감성적인 완성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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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치와 협업한 ‘60 BPM-The Sound of Swatch’ 프로젝트
브랜드의 소리를 발견해, 브랜드의 소닉DNA를 형성한다는 말이 흥미롭다.

‘발견된 소리’는 브랜드의 영혼이 남긴 지문이다. 반복될 수 없고, 필터 없이 날것이며, 믿을 수 없을 만큼 친밀하다. 커피 로스터기 소리나 유리 용기에 무언가를 따를 때 생기는 진동을 녹음한다는 것은, 다른 누구도 듣지 못한 브랜드의 심장박동을 포착하는 일이다. 이렇게 구성한 사운드 아이덴티티는 절대 복제될 수 없는 독보적 진실이 된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디자인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밖으로 퍼져 나오는 디자인인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알레시, 스와치, 라바짜 등 다양한 브랜드의 소리를 만들었다. 각각 어디에 중점에 두고 작업했나?

알레시는 언제나 오브제와 시적인 관계를 맺은 브랜드였다. 내게 사운드 아이덴티티를 의뢰했을 때 금속, 증기, 형태가 만들어내는 음악을 통해 그 시를 더욱 증폭시키고 싶었다. 주전자가 내뿜는 김, 구부러지는 강철, 숨 쉬는 기계. 알레시의 공장에서 녹음했고, 생산 라인을 하나의 교향곡처럼 다뤘다. 이때 가장 집중한 것은 디자인의 촉각을 모든 주파수에 담아내는 일이었다. 최종 사운드가 알레시의 제품처럼 촉각으로 느껴지고 우아하게 들리도록. 그 결과 산업과 감정이 나누는 친밀한 이중주가 탄생했다.
스와치의 작업도 흥미로웠다. 나는 시간에 심장박동, 반복, 침묵 같은 고유한 리듬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스와치 시계 안에 마이크를 넣어 그 진짜 리듬을 들었다. 흔한 ‘째깍거림’이 아니라 기계적이면서도 유기적인 박동이다. 이 리듬에 정밀함과 놀라움을 섞어서 브랜드의 장난기 있는 성격을 강조하며 스와치의 디자인 언어만큼이나 대담하고 즐거운 사운드 아이덴티티를 만들었다. 이 결과물은 단순히 시간을 세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개성’을 축하하는 작업이었다.
라바짜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여정’이었다. 나는 콜롬비아 커피 농장부터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로스팅 공장까지 라바짜 팀과 함께 여행하며 모든 과정을 녹음했다. 떨어지는 커피콩, 바스락거리는 잎사귀, 불을 내뿜는 로스팅 기계의 숨결까지. 내 아이디어는 커피의 생애 주기를 하나의 사운드 풍경으로 그려내는 것이었다. 수확은 따뜻함, 로스팅은 깊이, 마시는 순간은 침묵. 이렇게 각 단계마다 고유한 톤이 있기 때문이다. 원산지에서 컵까지 이어지는 감각적인 교향곡이자 질감과 서사로 그리는 풍성한 소리의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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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바자 커피의 여정을 따라다니며 사운드를 수집해 음악을 만들었다.
강력한 비주얼 아이덴티티에 비해 사운드의 기반은 부족한 브랜드가 많다. 이런 브랜드와 작업하며 어려움을 겪은 적도 있었나?

물론이다. 하지만 가장 보람 있는 도전이기도 하다. 비주얼 언어가 강하지만 사운드가 없는 브랜드를 만날 때, 나는 그걸 마치 ‘영화를 시로 번역하는 일’처럼 다룬다. 타이포그래피, 컬러 팔레트, 움직임 등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이걸 소리로 표현한다면 어떤 느낌일지 자문한다. 진정한 성공은 사운드가 비주얼과 경쟁하지 않고, 비주얼을 고양시킬 때 찾아온다. 감각의 순환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감정, 정체성, 기억. 이 세 가지가 일치할 때 사운드 브랜딩 협업이 비로소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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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베아와의 협업을 통해 피부의 소리를 녹음해 독창적인 사운드트랙을 만들었다.
당신의 사운드는 종종 영상이나 공간과 결합된다. 본인이 생각하는 ‘사운드와 비주얼의 관계’는 무엇인가?

소리는 이미지에 영혼을 부여한다. 보이진 않지만, 우리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인식을 완전하게 형성한다. 물리적 설치 작업을 할 때 나는 주파수를 마치 건축처럼 설계한다. 기둥을 감싸고 유리를 가로지르며 춤추는 식으로 말이다. 영상 작업을 할 때는 모든 컷과 프레임이 ‘소리의 의도’를 갖고 숨 쉴 수 있도록 신경 쓴다. 소리와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는 온몸으로 느끼는 경험이다.

도시의 정체성을 사운드로 포착한 ‘더 사운드 오브 시티The Sound of City’ 프로젝트도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시작된 프로젝트인가?

‘더 사운드 오브 시티’는 ‘장소를 보는 것 이전에 듣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다. 상하이는 어떻게 숨 쉬고, 베네치아는 어떻게 잠들며, 도쿄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마이크와 직감만을 지닌 채, 지도 없이 며칠씩 도시를 걷는다. 교통 패턴, 엘리베이터의 ‘삑’ 소리, 골목에서의 속삭임, 심지어 침묵까지 녹음한다. 그다음 모든 소리를 단어로, 모든 레이어를 기억으로 구성해 하나의 ‘초상’을 작곡한다. 그 결과물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공간화된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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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정체성을 사운드로 포착한 ‘더 사운드 오브 시티’ 프로젝트.
‘소리를 진정으로 듣는 방법’은 무엇인지, 이것이 왜 우리 삶에 중요한지 궁금하다.

진정으로 듣는다는 건 취약해지는 일이다. 세상을 판단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듣는다는 건 가장 친밀한 행위’라고 말한다. 우리는 시각적으로 과잉된 시대에 살고 있는데, 반면 청각적으로는 소외된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를 태아 시절 자궁과 연결해주고 대지와, 서로와 이어주는 것은 바로 소리다. 깊이 듣는 순간 우리는 공감, 기억, 상상을 불러올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가르치고, 글을 쓴다. 잊힌 ‘듣기의 예술’을 사람들에게 다시 돌려주기 위해서.

앞으로 사운드 브랜딩은 어디로 향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미래의 사운드 브랜딩은 적응하고, 몰입하며, 살아있는 것이 될 것이다. 손님의 감정에 따라 음이 바뀌는 매장, 기분에 맞춰 실시간으로 사운드트랙을 생성하는 AI 등 우리는 공간이 우리에게 반응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브랜드는 더 이상 소리를 장식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사운드는 살아 있는, 감정적인 인터페이스가 될 것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오히려 더 원초적인 감각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소리를 통해 ‘나는 보인다,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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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님 브랜드 이스코와 함께 청바지의 사운드를 만들고 전시도 진행했다.
계획 중인 프로젝트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

이 이야기를 처음으로 월간〈디자인〉과 나누게 되어 영광이다. 2026년 1월, 내 인생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인생의 전환점이 될 프로젝트를 공개한다. 프로젝트명은 소나르티코Sonartico다. 북극권을 항해하는 요트 위, 나 혼자만의 탐험이다. 나와 마이크, 차가운 공기, 그리고 광활한 미지의 공간만 있는 여정이기도 하다. 속삭이듯 갈라지는 얼음 소리, 기억처럼 공기를 깎는 바람, 침묵 그 자체의 모습까지, 나는 사라져가는 지역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섬세한 소리를 포착할 예정이다. 소나르티코는 단순한 사운드 프로젝트가 아니다. 사라지기 전 공간이 지닌 ‘소리의 영혼’을 보존하기 위한 사명이다. 고독과 경외감, 깊은 경청으로 이루어진 이 여정은 이미 내 안에서 시작됐다. 손대지 않고 여과하지 않은, 온전히 소리의 본질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이 작업을 세상과 나눌 날이 너무나 기다려진다. 지금껏 꿈꿔온 프로젝트 중 가장 울림이 크고, 어쩌면 가장 필요한 프로젝트일지도 모르겠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66호(2025.08)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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