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스탁이 창조한 초현실적 환대의 세계, 메종 엘레르
상상으로 지은 하늘 위 호텔
세계적 디자이너 필립 스탁이 프랑스 메스에 선보인 호텔 ‘메종 엘레르’는 그의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이 응축된 작품이다. 소설 속 환상적 장면을 건축으로 구현한 이곳은 9층 타워 위 19세기풍 저택, 시적 오브제, 절제된 객실 디자인으로 완성했다.

거주 가능한 예술 작품
세계적 디자이너 필립 스탁의 호스피탈리티 디자인에는 일관된 키워드가 흐른다. 바로 초현실주의다. 르 루아얄 몽소 라플 파리, 9컨피덴디엘과 같은 럭셔리 호텔부터 투 호텔과 같은 부티크 호텔까지, 그의 프로젝트는 언제나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력으로 완성된다. 올봄 문을 연 메종 엘레르(Maison Heler)는 그 연장선상에 놓인 최신작이다. 스탁 특유의 개념적 건축 언어와 시적인 상상력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이 호텔은 ‘거주 가능한 예술 작품’이라는 그의 디자인 철학이 응축된 공간이다.


프랑스 메스(Metz)의 앙피테아트르 지구에 위치한 메종 엘레르는 스탁이 집필한 소설 ‘만프레드 엘레르의 세심한 삶(The Meticulous Life of Manfred Heler)’에서 출발한다. 1909년 발표된 레몽 루셀(Raymond Roussel)의 작품 ‘아프리카의 인상(Impressions of Africa)’이 영감의 단초가 되었다. 스탁 특유의 시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이야기와 상상의 풍경은 메종 엘레르의 구조와 디테일 전반에 밀도 있게 스며들어 있다.

대표적인 예가 9층 높이의 단일형 타워 위에 얹힌 19세기풍 저택의 형상이다. 이는 주인공 만프레드 엘레르가 겪는 환상적 모험에서 비롯된 상징이다. 어느 봄날, 안락의자에 앉아 몽상에 잠긴 만프레드는 땅이 들썩이며 공원과 저택, 그리고 자신까지 하늘로 솟아오르는 기이한 경험을 한다. 스탁은 이 장면을 “로렌 지방의 역사적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재해석한 저택이자, 만프레드의 상상력이 꽃피는 토양”이라 설명한다.
메종 엘레르의 독창적인 세계관


문을 여는 순간, 메종 엘레르의 환상적인 세계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흰색 세라믹과 짙은 목재 가구가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리셉션 공간을 지나면, 부드러운 핑크빛으로 물든 브라세리 ‘라 퀴진 드 로즈(La Cuisine de Rose)’가 펼쳐진다. 이곳은 만프레드가 상상의 연인 로즈에게 헌정한 공간으로, 천장에 매달린 종이비행기와 실험실을 연상시키는 사진과 오브제가 어우러져 한 편의 낭만적 초현실주의의 장면을 연출한다. 메뉴 역시 로즈의 존재를 은유적으로 담아낸다. 매일 바뀌는 채소 타르트는 그녀의 섬세한 감성을, 피에몬테 헤이즐넛 크림을 채운 에클레어는 그녀를 향한 만프레드의 달콤하고도 집요한 열망을 상징한다.


2층부터 8층까지는 총 104개의 객실과 스위트룸이 자리한다. 대형 대리석 패널과 슬라이딩 거울로 정제된 고급스러움을 담아낸 공간이 주를 이룬다. 스탁은 “불필요한 장식을 모두 덜어낸 거의 금욕적인 공간”이라고 설명하며, “면의 흰색, 콘크리트 천장과 벽의 회색 등 모든 재료가 자신의 색을 드러낸다”고 덧붙였다. 절제의 미학 속에서도 작은 반전은 숨어 있다. 고대 동전, 인용문, 비밀 알파벳처럼 신비로운 디테일들을 곳곳에 배치해 투숙객이 직접 발견하고 사유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객실을 연결하는 복도에는 프랑스 국립기록보관소(National Archives)와 국립과학연구센터(CNRS)가 제공한 이미지들이 전시되어 있다. 소설 속 만프레드가 꿈꾸던 기묘한 발명품의 도면 또한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상층부에는 ‘브레인스토밍 룸(Brainstorming Rooms)’이라 불리는 프라이빗 라운지와 다이닝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총 300㎡ 규모의 이 다목적 공간은 문학적 사유에서 명상, 와인 테이스팅, 창의적 세미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벤트의 유연한 무대로 기능한다.

호텔의 가장 높은 곳, 9층 루프탑에는 메종 엘레르의 정수를 보여주는 레스토랑 ‘라 메종 드 만프레드(La Maison de Manfred)’가 있다. 천연 목재와 가죽 가구, 따뜻한 조명, 테라코타 타일 그리고 장작더미가 어우러진 이곳은 오랜 기억을 품은 집처럼 공간 전체에 깊은 온기를 더한다. 연인과 가족, 친구가 함께 모여 따듯하고 친밀한 시간을 보내기 제격인 장소로, 루프탑 정원과 테라스를 통해 메스 시내와 생트 에티엔 대성당, 퐁피두 센터까지 이어지는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 공간을 위해 스탁의 딸이자 아티스트인 아라 스탁(Ara Starck)은 총 19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제작했다. 그중 하나는 성당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패널로, 레스토랑 메인홀을 찬란한 빛으로 물들이며 공간에 극적인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이 작품을 “거주 가능한 예술 작품의 중심으로 초대하는 창”이라 표현하며, “빛의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시각적 아나모르포시스처럼 공간을 연극적 무대로 변모시킨다”고 말했다.


필립 스탁의 유쾌한 상상력에서 탄생한 메종 엘레르는 현대적 환대의 새로운 장을 여는 프로젝트다. 이야기의 구조를 따라 설계된 건축, 상상력을 실현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디자인 등 모든 요소는 하나의 시적 경험으로 수렴된다. 함께 모이고, 꿈꾸고, 일상의 중력을 벗어나 환상의 서사 속으로 진입하게 만드는 장소. 메스의 하늘 위에서 펼쳐지는 이 새로운 환대의 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향해 열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