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시즌즈’ 타이틀 레터링을 디자인한 서체 디자이너 채희준 인터뷰
〈박재범의 드라이브〉부터 〈이효리의 레드카펫〉까지!
TV 프로그램의 타이틀 디자인은 대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지만 이것은 예외다. 지난해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후속작으로 기획된 KBS의 심야 음악 토크쇼 ‘더 시즌즈’의 이야기이다.
‘더 시즌즈’는 2023년 한 해를 4개의 시즌으로 나눠 시즌 별 다른 MC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진행한 프로그램으로, 각 MC의 매력이 타이틀 레터링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새로운 MC가 공개될 때마다 보는 즐거움을 더했던 ‘더 시즌즈’의 타이틀 레터링은 채희준 디자이너의 작업. 채희준은 글자를 디자인하고 폰트를 생산하는 서체 디자이너이다. ‘청월’, ‘청조, ‘초설’, ‘고요’, ‘신세계’, ‘탈’, ‘클래식’, ‘기하’, ‘오민’, ‘하이츠’를 출시했으며, 이를 채희준 폰트샵에서 소개하고 있다.
기획 당시 예고되었던 ‘더 시즌즈’ 4개 시즌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에서 프로그램의 매력적인 첫인상을 만든 채희준 디자이너와 타이틀 레터링 작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박재범의 드라이브〉, 〈최정훈의 밤의공원〉, 〈악뮤의 오날오밤〉, 〈이효리의 레드카펫〉의 글자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Interview
채희준 서체 디자이너
2022년 겨울에 KBS ‘더 시즌즈’ 제작진으로부터 타이틀 레터링 작업에 관한 연락을 받았다고요. 제작진은 디자이너님의 어떤 작업을 보고 연락을 주셨을까요? 뮤지션 한희정 씨와의 전시, 장기하 씨와 함께 만든 폰트 ‘기하’를 보면 뮤지션들과 인연이 남다른 것 같기도 합니다.
‘더 시즌즈’의 공동 연출을 맡아 기획한 이창수 PD님께 연락받았습니다. 아마 ‘기하’를 보고 연락주신 듯했어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돌아보니 뮤지션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많이 했네요.
이번 작업은 디자이너님께도 새로운 시도였을 것 같습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1992년 〈노영심의 작은음악회〉에서부터 이어져 온 역사가 긴 음악 프로그램이에요. 한 번쯤 디자인에도 신경 쓴 아웃풋을 보고 싶다는 순수한 호기심에 수락했습니다.
그런데 시작하기 전 “하고 싶은데, 하기 싫다”고도 하셨어요.
사실 글자 디자인만 잘 해낸다고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그 글자를 잘 활용하는 것까지가 완성이에요. 활용에 제가 온전히 참여할 수 없으면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면 하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모로 핸들링할 것들이 많고 피곤할 것 같으니 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레터링 이외의 부분은 어떻게 진행했나요?
포스터 사진을 촬영할 포토그래퍼도 직접 섭외할 수 있도록 협상했어요. 결과적으로 그래픽 디자이너 신건모, 포토그래퍼 황예지, 글자 디자이너 채희준, 이 3명이 한 팀으로 작업하게 된 셈이죠. 다만 마지막 시즌인 〈이효리의 레드카펫〉은 제작진이 교체되어 사실상 글자만 넘기는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4개의 타이틀 레터링 작업에서 공통으로 고려한 게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최정훈의 밤의공원〉 레터링이 공개홀의 무대 배경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고 느꼈는데요. 무대의 연출적인 면도 고려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더 시즌즈’라는 로고의 하위 개념으로 레터링이 들어가다 보니 ‘더 시즌즈’ 로고를 디자인한 신건모 디자이너와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무대 연출은 제작진의 영역이어서 고려할 수 없었어요. 제가 작업한 레터링은 ‘최정훈’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췄고, 무대 연출은 ‘밤의공원’에 초점을 맞춘듯한데 다행히 이 둘의 합이 잘 맞았던 것 같네요.
첫 번째가 〈박재범의 드라이브〉였죠. 박재범 씨의 자유로운 이미지와 자동차의 속도감이 느껴졌는데요. 디자이너님은 어떤 인상을 담고자 했나요?
제가 생각하는 박재범 씨는 굉장히 복합적인 이미지를 지닌 분이에요. 섹시하고 쿨 한 래퍼이며 댄서인 박재범과 다정하고 귀여운 일상의 박재범이 공존하죠. 인물에 대한 이미지와 함께 ‘드라이브’라는 타이틀에도 주목했어요. 예를 들면 낮에 하는 드라이브인지, 밤에 하는 드라이브인지도 중요하겠죠. 〈박재범의 드라이브〉는 도시의 야경을 배경으로 박재범 씨가 드라이브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작업했습니다.
레터링 하나하나가 매력적이고 MC, 타이틀과 잘 어울렸어요. 〈최정훈의 밤의공원〉, 〈악뮤의 오날오밤〉, 〈이효리의 레드카펫〉은 각각 어떻게 작업하셨나요?
〈최정훈의 밤의공원〉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최정훈이라는 인물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글자예요. 2019년 ‘렛츠락 페스티벌’에서 본 잔나비의 무대가 굉장히 인상 깊었거든요. 잔나비 공연이 가장 재밌었어요. 저에게 최정훈 씨는 전체적으로 기다란 이미지예요. 팔다리가 길쭉하고, 곱슬머리와 어우러진 약간의 역삼각형 얼굴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느꼈죠. 이런 여러 요소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디자인한 글자입니다.
〈악뮤의 오날오밤〉은, 악뮤는 더 이상 악동뮤지션 시절의 ‘악동’ 이미지를 원하지 않았어요. 디자인적으로 미니멀한 방향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세리프(고딕) 글자로 디자인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여기에 이찬혁·이수현 씨가 발산하는 남매의 장난스러운 느낌도 살짝 넣었는데요. 다르게 보면 음표처럼 보이기도 하고, 운율감이 느껴져서 악뮤의 글자로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이효리의 레드카펫〉은 이효리 씨가 활약한 시대인 2000년대의 이미지를 담았습니다. 물론 지금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셨지만, 그 시절의 이효리 씨가 발산한 에너지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글자의 구조에서 최대한 파워풀한 이미지를 담고자 했는데요. 거칠고 과격한 방향이 아니라 부드러움 속 유연하고 거침없는 이효리 씨만의 에너지를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쉽게 설명해 주셨지만 글자를 디자인하는 과정은 방망이 깎던 노인처럼 오랜 노력과 노동이 들어간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웃음) 이미지를 글자로 표현할 때 고심했던 사소한 디테일을 예시와 함께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이효리의 레드카펫’을 납작펜과 같은 도구로 썼다고 가정할 경우 ‘이응’이 왼쪽 이미지의 ‘이’처럼 기울어지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한데요. 전체적인 인상을 고려할 때 매력적인 건 오른쪽의 ‘이’처럼 바로 선 이응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타당한 방향과 매력적인 방향 사이에서 고민한 결과예요.
진행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혹은 더 애착이 가는 작업이 있다면.
아무래도 첫 시즌인 〈박재범의 드라이브〉가 가장 기억에 남는데요. 저는 작업하는 시간을 굉장히 길게 갖는 편이에요. 그래서 ‘클라이언트 잡’을 많이 하지 않아요. 대개 본인들의 일정에 맞춰서 결과물을 내놓길 원하거든요. KBS는 정신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방송국이라 더 심하죠. 이런 입장 차이를 좁히는 것에도 큰 노력이 필요하더라고요.
사실 타이틀 디자인을 위해서 저를 섭외하는 일 자체가 제작진 입장에서는 특별한 시도인 것 같았어요. 여러 사람이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만큼 제작진 중에는 ‘얼마나 다른 결과가 나오겠어’ 하는 시선도 분명 있었을 거고요. 실제로 〈박재범의 드라이브〉를 처음 전달했을 때 글자 디자인을 특별히 맡겼는데 그냥 글자만 있으니 당황스럽다는 반응도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자동차 바퀴 같은 그림이 있는 이미지를 상상하고 기대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반응이 정말 좋았죠. 1년짜리 장기 프로젝트이고, 대중과 맞닿은 작업입니다. 디자이너님도 반응을 실시간으로 느끼셨을 것 같아요.
글자 디자인으로 연예인의 이미지를 표현한다는 것이 저에게도 흥미로운 도전이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박재범, 최정훈, 악뮤, 이효리의 이미지와 팬들이 생각하는 이미지가 다를 수 있잖아요. 그래도 많이 공감하고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간 프로젝트라는 방식으로 한 해 동안 4개의 시즌으로 나눠서 진행된 ‘더 시즌즈’가 올해에도 이어지는데요. 이번에도 디자이너님께서 타이틀 레터링을 담당하시나요?
아니요. 저는 4개 시즌을 끝으로 종영하는 것으로 알고 진행한 터라 추가 작업 제안은 거절했어요.
아쉽네요. 올해에는 어떤 작업을 이어나가시나요? 마지막으로 올해 계획을 들려주세요.
올해는 좋아하는 일을 더 많이 할 생각이에요. 제가 만화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데,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개인 작업으로 본문형 고딕 폰트 ‘하이츠’도 출시했고요. 여러 개인 작업을 하면서 한 해를 보내고 싶기 때문에 시간 관리를 잘 해낼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