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라이트 성정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디자이너를 만드는 시간

한국인 디자이너 최초로 IDEO에 입사해 화제가 되었던 산업 디자이너 성정기. 그는 디자이너의 성장을 위해 '삶'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데이라이트 성정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성정기의 여정은 하나의 물음에서 시작된다. 사물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그 쓰임은 누구를 향해야 하는가. IDEO에서 시작해 루나 디자인, 데이라이트에서 그는 디자인을 답이 아니라 감각의 언어로 다루었다. 언어의 벽은 그를 가로막지 못했고, 오히려 그것은 단어 하나에 깃든 본질을 추적하는 훈련이 되었다. 기술이 대체할 수 있는 시대에도 그가 믿는 것은 감각이 발견하는 기회의 순간, 사람과 삶을 향한 태도다. 디자인은 결국 사물이 아니라 세계를 대하는 방식임을, 그는 묵묵히 증명해내고 있다.

250911D 19188 1 1
대학생 시절 LG전자 국제 디자인 공모전 금상을 받고 특전으로 LG전자에 입사했지만 6개월 만에 퇴사했다. 그 후 2년 넘게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2004년 한국인 디자이너 최초로 IDEO에 입사하며 화제가 됐다. 루나 디자인Lunar Design을 거쳐 현재는 데이라이트Daylight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근무 중이다. 20여 년간 다수의 국제 디자인 공모전에서 수상했고, 2019년에는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았다. 지난해 〈생각을 만드는 시간〉을 출간했다. junggisung.com daylightdesign.com

IDEO에 입성하다

20250919 074812
엘라스틴 삼푸병 세트. 샴푸, 린스, 트리트먼트 용기 표면에 각기 다른 질감을 적용해 촉감만으로 용도를 구분할 수 있도록 했다. 2002년 LG생활건강 공모전 대상과 2012년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 골드를 수상했다. 디자인 성정기
이제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IDEO 최초의 한국인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은 여전히 ‘디자이너 성정기’를 대표하는 수식어입니다.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아마 지금도 유효하게 들리는 것은 IDEO가 자기 쇄신을 거듭하며 급변하는 산업구조 속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려운 가정 환경 때문에 늦깎이 디자인 전공생이 됐고, 이후 LG전자 국제 디자인 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LG전자에 입사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산업 디자인 전공생이라면 안정적인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은 누구나 원하는 이력이었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막 회사에 들어갈 시점에 우연히 월간 〈디자인〉 기사를 통해 IDEO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습니다. 물론 공모전 수상 당시 IDEO의 공동 설립자 빌 모그리지의 명함을 받긴 했지만, 사실 그 전까진 이 회사의 정신과 태도에 대해 속속들이 알진 못했어요. 이전의 디자인 관련 서적이 대부분 회사의 작업물을 소개하는 데 그쳤다면 당시 기사에는 이들이 왜, 어떻게 일하는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기사를 읽은 후 IDEO 입사가 제 목표가 되었죠.

IDEO의 어떤 점에 끌렸던 건가요?

가장 다르다고 느꼈던 것은 제품을 만드는 것 자체에만 집중하기보다 제품의 필요성, 쓰임에 대해 고민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IDEO에서 출간한 책을 보면 결과물보다 그들이 어떻게 일했고 어떻게 협력했는지에 대해 더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스케치나 엔지니어링 상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담긴 다른 디자인 회사들의 책과 달랐죠. 이런 IDEO의 방식을 깨닫고 그에 맞춰 포트폴리오를 쌓아갔어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이제 이 회사에서 일할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어학은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어요. 사람을 찾아가 관찰하고 인터뷰하는 IDEO의 방식에 따라 도출한 디자인 포트폴리오였기 때문에 내가 디자인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포트폴리오를 발송할 때도 친구의 도움을 빌려 번역했다는 내용을 솔직하고 상세히 기재했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제 어학 능력 때문에 당시 내부에서 이슈가 좀 있었다고 하더군요.

20250919 075719
엘라스틴 삼푸병 세트의 디자인 도출 과정.
제가 가장 의아한 부분도 그것입니다. 스타일링에 집중하는 회사라면 오히려 부족한 어학 실력이 상쇄가 되겠지만, IDEO 같은 회사에선 소통이 무척 중요한 요소였을 것 같거든요.

맞습니다. 그런데 많은 대화가 필요하고 많은 협력이 필요한 회사라서 협력을 이루는 방식이 굉장히 다양했어요. 요즘으로 치면 마치 AI처럼 단어의 나열 수준이었던 제 의사 표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회사에서 개인 교습까지 시켜주었지만 사실 어학이라는 게 단 몇 개월 만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어마어마한 장벽처럼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저는 인턴이 아닌 정직원으로 채용된 상태였기 때문에 곧바로 클라이언트 미팅에 투입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럴싸한 문장을 만들려고 노력하기보다 가장 적절한 단어를 찾으려고 애를 쓰곤 했어요. 요즘으로 치면 명료한 키워드를 구사하려고 노력한 셈이죠. 영어 실력이 출중했다면 오히려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본질을 가리는 우를 범했을 것 같아요. 언어가 부족했기 때문에 심사숙고해 소통하고자 했고, 상황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해외 취업을 꿈꾸는 후배 디자이너들에겐 어학 능력을 갖추라고 조언합니다.(웃음)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다양성을 갖춘다는 것은 분명한 장점이니까요.

20250919 075842
20250919 075856
포르쉐911을 소재로 한 헤어드라이어. 기어를 연상시키는 스위치를 올리면 포르쉐911 특유의 엔진 소리를 낸다. 2012년 포르쉐 국제 공모전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디자인 성정기
조언 이야기를 하니 몇 년 전 독일에서 일하는 한국인 디자이너와 나눈 대화가 떠오르네요. 소싯적 해외 취업을 하고 싶어 디렉터 님에게 싸이월드 쪽지를 보냈는데 정말 성심성의껏 답을 주었다고 들었어요. 늘 이렇게 정성스레 어드바이스를 하나요?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조금 앞서 경험한 사람으로서 갖는 책임감 같은 것입니다.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정말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교수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혹은 ‘그때 공모전에서 심사위원으로부터 그런 평가를 듣지 못했다면’ 아마 제 삶은 많이 달라졌을 거예요. 그렇기에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주로 어떤 조언인가요?

대부분 절박한 심정으로 연락을 줍니다. 앞이 막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절박함을 느껴봤기에 그걸 풀어주려고 노력합니다. 앞으로 갈 수 없다면 잠시 뒤로 물러서도 괜찮다, 한 발짝 떨어지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고 말이죠. 물론 현실적인 이야기도 합니다. 보통 해외 취업을 꿈꾸는 이들은 입사까지 생각하고 그다음을 생각하지 못해요. 당장 눈앞에 높은 허들이 있다 보니 그 뒤에 더 높은 허들이 있다는 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죠. 미국은 세계에서 노동 유연성이 가장 높은 나라예요.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한 달 뒤 내 책상이 없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사회입니다. 게다가 우리 같은 이방인은 해고되고 몇 주 안에 재취업하지 못하면 불법체류자 신세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 엄청나게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해요. 최고 기량을 가진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이 더 치열하게 경쟁한다고 하잖아요. 이런 점을 두루 염두에 둬야 해요. 취업보다 더 중요한 건 그곳에서 누구와 무엇을 할지를 생각하는 일입니다. 디자인 역량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의 필요를 파악하고, 이들과 어떻게 소통할지도 고민해야 하고요.

스타트업과 디자인

20250919 080132
루나 디자인 근무 시절 미국의 한 스타트업의 의뢰로 디자인한 아이스크림 스쿠프. 오른손 사용자용과 왼손 사용자용을 독립적으로 디자인했다. 머리 부분을 대각선 형태로 디자인해 손목에 가해지는 부담을 줄인 것도 특징이다. 2014년 미국 IDEA 은상, 2015년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수상했다. 디자인 성정기, 제프 살라자르
IDEO에 입사하고 불과 1년여 만에 루나 디자인으로 이직했습니다. 그토록 열망했던 회사치곤 근속 기간이 짧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산업의 변화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당시 인터넷이 빠르게 확산하면서 제품에 UI·UX 기술을 접목하는 시도가 늘었습니다. 인터랙션이라는 말도 처음 대두됐죠. 이것이 제품 디자이너의 영역인지, 시각 디자이너의 영역인지 말도 많았습니다. 회사도 저에게 UI·UX 쪽을 공부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하더군요. 하지만 그 조언은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이미 그 분야에 선수들이 많다고 생각했거든요. 손흥민 선수라도 갑자기 골키퍼 직책을 맡긴다면 주전 선수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 강점은 제품 디자인이기 때문에 어설프게 다른 영역에 발을 들이는 건 승산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IDEO의 중심이 제품에서 리서치 기반의 전략으로 바뀌면서 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저의 멘토나 함께 일하던 엔지니어도 퇴사한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당시 파트너에게 “나는 제품 디자이너로 성장하고 싶은 열망이 크고, 프로젝트를 따 오는 것은 회사의 몫이니 제품 프로젝트를 수주해 오기 어렵다면 차라리 다른 회사를 소개해달라”고 요청했죠.

한국과 굉장히 다른 정서군요.(웃음) 그래서 추천을 해주었나요?

총 4개 회사를 소개해주었고, 운 좋게 네 회사 모두 면접을 보았어요. 사실 루나 디자인 이전에 면접을 본 회사가 펜타그램이었습니다. 당시 제 면접관은 펜타그램 샌프란시스코 파트너인 로버트 브루너였습니다. 조너선 아이브 이전에 애플 디자인을 책임지던 분이죠. 그를 만나 제 상황과 원하는 방향에 관해 이야기했더니, 그렇다면 펜타그램에 오면 실망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어떤 회사와 면접 중이냐고 묻더니 루나 디자인으로 가라고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루나 디자인에 입사하고 보니 로버트 브루너가 루나 디자인의 공동 설립자 세 명 중 한 사람이었어요.(웃음) 면접 당시엔 일언반구도 없어 입사 오리엔테이션에서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아마 누구보다 루나 디자인을 잘 알았기에 할 수 있었던 조언 같아요.

미국 디자인 신은 살벌한 한편 섬세한 면도 있군요. 루나 디자인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오래된 디자인 회사입니다. 자연스레 스타트업과 협업할 기회도 많았을 것 같아요.

맞습니다. 사실 한국과 상황이 조금 다를 수 있는데 미국에선 창업자가 자신의 전공 분야 기술을 살려 스타트업을 차리는 경우가 많아요. 클라이언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 의료 기기 스타트업이었습니다. 창업자는 스탠퍼드 대학교 의대를 졸업했는데 안정된 의사의 길을 걷는 대신 창업을 택했어요. 제가 참여한 것은 제3세계에서 사용할 간단한 수술 도구를 개발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미국에서와 같은 고가의 장비 없이도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외과 수술 도구였죠. 그때 스타트업에 관한 문화 충격을 받았어요. 사실 미국에서도 스타트업은 입지가 굉장히 불안해요. 투자를 받지 못하면 100개 기업 중 살아남는 회사는 한두 개밖에 되지 않죠. 게다가 보장된 길을 포기하면서까지 어려운 길을 택했다는 점에서 오너의 진정성이 느껴졌습니다. 다행히 결과물이 잘 나왔고, 회사도 성공적으로 업계에 안착했어요.

현재 디렉터로 근무하는 데이라이트도 여러 스타트업과 일하는 것으로 압니다. 한국과 미국 스타트업에 차별점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경우 현상을 발견하고 그걸 해결하고자 기술을 도입하는 편인 것 같아요. 반면 미국은 보유한 기술을 활용해 문제를 풀려는 의지가 강합니다. 기술에 대한 자부심도 크고요. 에너지 솔루션 스타트업이 대표적입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지역 간 거리가 상당하므로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해결하지 않으면 생활을 영위하기 힘든 환경도 많이 있습니다.

데이라이트에서 컨설팅한 기업 중에도 있나요?

미국 법인에서 루나 에너지라는 스타트업의 브랜딩, 제품 UI·UX를 종합적으로 컨설팅한 적이 있습니다. 창업자들은 테슬라 출신이었는데 그곳에서도 에너지 세이빙 기술을 다루지만 기술 자체가 워낙 고가인 데다 특별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해요. 좀 더 합리적인 가격으로 대중이 이 기술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회사의 목표였습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스타트업은 종합적인 디자인 컨설팅을 필요로 해요. 아무래도 특정 영역에서만 디자인 솔루션을 받는 것보다 종합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성공 확률을 높이는 방법이죠. 그런데 기존에 이런 일을 하던 회사, 예컨대 IDEO 같은 회사들은 스타트업 프로젝트를 수행하기에 규모가 너무 커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데이라이트는 의도적으로 회사 규모를 제한하려고 노력해요. 몸집을 키우면 운영을 위해 규모가 작은 프로젝트를 불가피하게 배제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죠. 반대로 스스로의 철학이나 윤리에 위배되는 프로젝트를 받기도 하고요. 그런 점을 미리 방지하고자 인원을 최소화하려고 합니다.

20250919 081731
20250919 081745
데이라이트가 컨설팅한 국내 스타트업 ‘코코지 하우스’. 청각을 자극해 영유아의 상상력을 키워주는 디자인으로 2022년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본상을 수상했다. 디자인 성정기, 다니엘김, 원보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스타트업과 협업하기 위해서는 디자인 전문 회사들도 좀 더 종합적인 역량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쉽지는 않을 거예요. 데이라이트가 종합적인 컨설팅이 가능한 것은 프로젝트의 가장 앞 단인 전략 리서치 파트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디자인 영역을 확장하는 것과 다르죠. 냉정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이미 세상에 너무나 많은 제품이 나와 있어요. 아무리 “우리의 제품 디자인은 다르다”라고 주장해도 실상 소비자가 그걸 느끼기는 어렵죠. 좀 더 근원적이고 종합적인 디자인 전략이 필요해진 상황입니다.

지금까지 진행한 국내 프로젝트 중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나요?

한국 법인의 경우 교육 스타트업 ‘코코지’의 컨설팅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스크린 타임에 할애하게 되는 요즘의 육아 문제를 개선하는 것이 회사의 목표였죠. 시각이 아닌 청각을 자극해 아이들의 상상력을 키우는 방법을 고심했어요. 우리는 아이들을 인터뷰하고, 물건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관찰하면서 이 부분을 탐구했어요. 물건을 대할 때 아이들이 상상력을 동원해 자기만의 왕국을 만드는 것을 발견했죠. 이를 활용해 사운드가 나오는 집 모양 완구와 피겨 등을 개발했습니다. 청각과 촉감을 십분 활용한 제품이죠. 성공적으로 제품을 론칭했고 코코지는 해외 진출까지 이뤘습니다. 데이라이트는 드물게 여러 대륙에서 오피스를 운영하기 때문에 해외 진출까지 고려 중인 스타트업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현지 시장 상황까지 고려한 전략을 수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죠.

T형 인재? I형 인재!

20250919 082954
현대 모터스튜디오 컬렉션. 현대자동차의 브랜드 이미지를 반영한 라이프스타일 제품이다. 이 중 숟가락, 포크, 나이프를 한데 포갤 수 있도록 디자인한 캠핑용 스푼 세트는 2015년 iF 디자인 어워드 골드,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수상했다. 이 외에도 접이식 의자, 컵, 텀블러, 캠핑 의자 등을 디자인했다. 디자인 성정기, 다니엘김, 니콜라스 샤프, 파블로 벨라스퀘스
흥미롭네요. 그렇다면 다른 대륙의 오피스와 협업도 하나요?

경우에 따라 시차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오후 5시쯤 독일 오피스로 바통을 넘기고, 그곳에서 다시 작업을 이어가다 미국 오피스로 전달하는 식이죠. 다음 날 아침 우리가 출근했을 때 미국 오피스에서 진행한 작업을 받아보게 됩니다. 피그마 같은 툴이 등장하면서 커뮤니케이션이 훨씬 수월해진 부분도 있습니다.

기술의 등장은 캔바처럼 디자인 작업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위협 요소가 되기도 하죠. AI가 대표적일 듯합니다.

많은 디자이너가 AI를 작업 툴의 연장선으로 여기는 것 같은데 사실 잘못된 생각입니다. 데이라이트는 AI를 파트너로 보고 있어요. 실제로 예전에 했던 프로젝트를 AI 프로그램에 넣어서 다시 돌려 보고 있습니다. 어떤 결괏값이 나오는지 보고, 우리가 원하는 답이 나오도록 성장시키는 것이죠. 사실 기업들은 2~3년 전부터 AI 시대를 대비하고 있었어요. 올해가 이것이 보편화된 첫해였던 것뿐이죠. 인력을 줄이고 AI의 효율성을 높이는 시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솔직히 디자이너의 업무 중 90%는 AI로 대체될 것이라고 봐요.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데이라이트 내에서 유일하게 AI 기술을 쓰지 않지만.(웃음)

20250919 083458
그건 좀 반전인데요?(웃음) AI를 쓰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글쎄요. 어설프게 사용해보고 다른 영역을 다룰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AI 고수들이 제품 디자이너를 찾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제가 AI 전문가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애초에 될 수도 없고요. IDEO에 근무하면서 느꼈던 것은 정말 자기 영역을 끝까지 파는 전문가들이 득실댄다는 거였어요. 모두 T형 인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요. 우선 자기 분야를 완전히 장악해야 합니다. 샅바만 잡아도 실력을 아는 씨름 선수나 한 수만 두고도 승패를 가늠할 수 있는 바둑 기사처럼 말이죠. 이런 I형 인재들이 모여 있고 이를 연결하는 존재가 있는 게 조직 차원에서도 더 건강하다고 봅니다.

20250919 083605
20250919 083615
불편한 디자인 시리즈. 사용자와 비사용자가 아닌 사용자와 예비 사용자를 구분해 디자인의 지속 가능성을 탐구하는 개인 작업이다. 예를 들어 의도적으로 바닥과 평행하게 설치한 수전은 필요 이상으로 세게 틀면 사용자에게 물이 쏟아진다. 불편함을 의도해 물을 절약하게 만든 것이다. 일정 시간 이상 사용하면 달아오르듯 색이 변하는 헤어드라이어도 흥미로운 디자인이다. 디자인 성정기

생각을 만드는 디자인, 디자인을 만드는 생각

20250919 083935
2021년 DDP에서 열린 성정기의 개인전 〈생각을 만드는 디자인〉.
AI 이야기를 좀 더 나눠보죠. 그렇게 많은 부분이 AI로 대체될 수 있다면 미래의 디자이너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AI가 예측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디자이너가 필요해질 것이라고 봐요. 사실 디자이너는 애초에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시대의 흐름에 평행선을 그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산업이 변화하면서 도구로 전락했던 것이죠. 도구로서의 디자이너는 더 좋은 도구가 나오면 대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다시 디자이너의 본질로 돌아갈 시기가 됐습니다. 이를 위해선 먼저 자기 감각을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 해요. 제가 하는 프로젝트 중에 ‘영감 수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감각을 연마하도록 돕는 수업이죠. 디자이너는 결국 가치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 가치는 문제를 정의하고 기회를 발견한 뒤 해결하는 프로세스로 만들어지죠. 그런데 시대가 바뀌면서 이 과정 과정마다 기술이 대체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진 것입니다. 데이터에 근거해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역할은 이제 AI 몫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차별화할 수 있는 방법은 기회를 발견하는 지점에서 감각을 접목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나요?

감각이라는 것은 결국 새로움이 사용자에게 가닿는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청각, 색, 형체, 향기, 질감, 무게, 사용자 경험이 차례대로 전달되죠. 각 과정마다 디자이너는 어디에 비중을 둬야 할지 가늠해야 합니다. 소리를 고민해서 포르쉐 자동차 소리가 나는 헤어드라이어를 디자인할 수도 있고, 무게와 형태를 고민해 왼손잡이용 아이스크림 스쿠프를 개발할 수도 있죠. 이 모든 것과 교감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수업의 목표인데 영감 수업은 자기 감각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요. 오래전 입시 미술을 하면서 이상하다고 느낀 점이 있어요. 석고 소묘를 할 때 분명히 내 눈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 묘사했는데 선생님이 그걸 고치는 거예요. 마치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처럼. 그런데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보이는 게 정상이거든요. 앞으로 이런 다름을 극대화해야 디자이너도 살아남는다고 생각해요. AI만큼 감각을 잘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관점이 책 〈생각을 만드는 시간〉에 담겨 있습니다. 솔직히 지난해 발간 소식을 들었을 때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특강 외에는 출강도 잘 하지 않아서 디자인으로만 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이 또한 책임감이라고 생각했어요. 달필가는 아니지만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 전해줄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디자이너가 성장하기 위해선 디자인만 해선 안 되잖아요. 저는 삶이 필요하다고 봐요. 그 삶에 관해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디자인을 이야기하는 자리는 이미 많죠. 이 디자인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회사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하지만 일 외에 나머지 절반의 삶은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말하는 자리는 드물어요. 예전에 저 역시 무엇을 하느냐가 디자이너로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못지않게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중요하더군요. 결국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곧 그 사람의 철학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생각을 담담히 기록해두고 싶었습니다.

19x19X31 with Info
2019년 삼일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MBC가 의뢰한 독립운동 사적지 표지석 디자인. 재능 기부로 표지석을 디자인했고 MBC는 이를 러시아 상트페테르쿠브크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 외벽에 설치했다. 금속 테두리 안에 청동으로 만든 가로·세로 각각 19cm, 두께 3.1cm의 태극 상징물을 비스듬히 배치했다. 디자인 성정기
그 말에선 선배로서의 강한 책임감이 느껴지네요.

중년이 지나면 성장을 멈추잖아요. 아니, 멈추는 것을 넘어 기능이 하나둘 소멸하기 시작하죠. 모든 것이 다 없어지기 전에 책을 통해 ‘여기까지의 삶은 이런 것입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거창한 디자인 철학을 늘어놓거나 프로젝트를 화려하게 수놓은 작품집이 아니라. 사람마다 상황은 조금씩 달라도 누구에게나 인생의 벽은 존재하잖아요. 막막하게 느껴질 때 그 벽을 때로는 우회하거나 물러서도 되고. 그걸 일러주는 것이 결국 멘토이고, 훌륭한 멘토가 되는 게 사회적으로 선순환을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68호(2025.10)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