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로 빚은 도시의 쉼터, 수연재

제5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가 9월 26일 개막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매력 도시, 사람을 위한 건축’이라는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에 화답하는 파사드 ‘수연재’를 선보였다.

강철로 빚은 도시의 쉼터, 수연재

제5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가 9월 26일 개막했다. 총감독 토마스 헤더윅은 ‘매력 도시, 사람을 위한 건축’이라는 주제 아래 일상에서 마주하는 건축물 외관을 통해 도시를 즐겁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탐구한다. 이번 비엔날레의 방점은 파사드에 있다. 건축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 중 도시의 인상을 좌우하는 파사드에 천착해 미래 도시 건축의 방향성을 모색한다는 취지다. 열린송현 녹지광장을 무대로 열린 주제전에서는 국내외 24팀의 창작자가 ‘일상의 벽’을 주제로 한 파사드 디자인을 선보인다. 건물 입면의 장식 요소가 인간의 내밀한 감정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데, 그중 눈길을 끄는 작품은 단연 ‘수연재(The Healing Wall)’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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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주제전 <일상의 벽>에 참여한 현대자동차그룹의 수연재. 사진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자동차그룹이 디자인한 이 작품은 한국 전통 건축의 개념인 ‘허체虛體’를 표현했다. 특히 자동차 외장재로 사용하는 금속을 활용해 파사드를 단순한 벽이 아닌 건물 전체를 상상하게 하는 매개체로 해석한 관점이 돋보인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열린송현 녹지광장 주변을 둘러싼 북한산, 북악산, 인왕산의 산세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곡선의 처마를 디자인하고, 처마 위로 물이 흐르도록 설계해 그 아래 벤치에 앉아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한국 전통 건축의 대청마루와 같은 여유로운 분위기를 의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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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송현 녹지광장을 둘러싼 주변 산세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스케치 및 3D 모델링 ⓒ현대자동차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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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움직임을 고려한 배치로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광을 받아들여 독특한 인상을 자아낸다. 사진 ⓒ현대자동차그룹

태양의 움직임을 고려한 배치로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광을 받아들여 독특한 인상을 빚어낸 점 또한 눈에 띈다. 모듈화된 금속 패널과 트러스 프레임 사이에 연화문 이스터에그 등 디테일한 요소를 숨겨뒀는데 이를 발견하는 것이 또 다른 관람 포인트다. 하지만 이 파사드의 가장 큰 특징은 다름아닌 금속 소재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자동차 외장재로 사용하는 금속을 활용해 기업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룹사의 핵심 가치인 지속 가능성을 반영했다. 여러 차례 재활용할 수 있는 금속을 도시 구조물에 적용해 지속 가능한 건축의 가능성을 은유한 것이다. 단지 시각적으로만 시선을 사로잡는 구조물이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구축하기 위해 기술적인 부분에도 공을 들였다. 외관상 아름다우면서도 구조적으로 안정적인 파사드를 구현하기 위해 구조 계산, 내부 설계, 분수 시스템과 조경 작업에 이르기까지 디자이너와 시공자가 긴밀히 협력했다. 기술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을 치밀하게 고려해 설계한 수연재는 ‘휴머니티를 위한 진보(Progress for Humanity)’라는 현대자동차그룹의 비전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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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송지현 현대제네시스퓨처디자인팀 팀장, 제승아 현대제네시스디자인이노베이션실 상무, 김동현 현대제네시스퓨처디자인팀 책임연구원 사진 이기태
이번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 참여한 계기가 궁금하다.

제승아 ‘인간 중심의 디자인’이라는 주제가 현대자동차그룹의 비전과 맞닿아 있다고 봤다. ‘휴머니티를 위한 진보’라는 현대자동차그룹의 비전은 단순히 기술과 비즈니스의 발전이 아닌, 인류의 진보와 행복을 위한 발전을 의미한다. 모든 혁신과 변화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철학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자동차를 만드는 일 역시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수단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의 디자인 언어인 ‘아트 오브 스틸Art of Steel’은 바로 이러한 철학을 구현하는 조형 언어다. 우리는 강철이라는 산업적 소재를 통해 가장 인간적인 감성을 표현하는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이를 통해 기술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근본적 가치를 표현하고자 한다. 미래 도시에서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인간 중심의 공간이 될 것이다. 자율주행 기술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이동 시간을 보다 창의적이고 감성적인 경험으로 채워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아트 오브 스틸의 콘셉트를 담은 파사드 디자인은 인간 중심적인 도시의 한 면을 제시한다. 차가운 금속에 가장 따뜻한 인간적 감성을 담는 순간, 기계적인 효율성을 넘어선 진정한 예술적 도시가 탄생한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현대자동차그룹의 강철로 빚어낸 감성이 어떻게 도시와 사람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일상의 벽’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해석했나?

송지현 파사드는 건물의 입면이자 한 건물의 인상을 드러내는 얼굴과 같다. 우리는 파사드를 단순한 벽이 아닌 건물 전체를 상상하게 하는 가능성의 매개체로 해석했다. 흔히 건물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건물 전체보다 파사드를 더 자주 마주하게 된다. 파사드가 도시의 인상을 결정 짓는 이유다. 우리는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인상을 각인시키면서도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상상하게 하는 파사드를 만들고자 했다.

평면적인 파사드를 넘어 파빌리온을 연상케 하는 입체적인 공간으로 디자인했다.


김동현 단지 바라만 보는 파사드가 아니라, 시민들이 내부로 들어와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의도했다. 벤치에 앉아 여유롭게 쉬는 동안 마치 대청마루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휴식을 취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특히 능선 아래쪽 금속 패널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바람이 지나가는 상쾌함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자연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공간에서 시민들에게 잠깐의 쉼과 여유를 선사하고 싶었다.

파사드에 고안한 여러 기술적 디테일이 돋보인다.

김동현 자동차에 주로 사용하는 금속을 활용했는데, 소재 특성상 다소 차갑게 느껴질 수 있어 조명 시스템을 탑재했다. 또한 파사드 자체에서 순환하는 분수 시스템을 적용해 최소한의 물을 사용하면서도 감성적인 효과를 연출했다. 자동차 기술을 직접적으로 접목하기보다 현대자동차그룹의 지향점과 고객을 생각하는 브랜드의 철학을 공간 곳곳에 녹여내고자 했다. 이러한 접근이 현대자동차그룹이 추구하는 미래지향적 가치와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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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드 자체에서 순환하는 분수 시스템을 적용했다. 사진 이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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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재 구조 다이어그램. 사진 ⓒ현대자동차그룹
시공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다면?

김동현 우리는 자동차 회사의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건축가의 접근 방식과 분명 차이가 있다. 제작의 난이도도 상당히 높은 편인데 함께 제작할 협력사를 찾는 과정에서 이 파사드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알게 되었다. 여러 건축 시공사에서 우리의 작업을 부담스러워했기에 결국 기존에 자동차 디자인 목업을 만들던 협력사에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 협력사 모두 건축은 처음이었지만, 그간 자동차 디자인 모델을 제작하며 쌓은 노하우와 집요한 열정으로 수많은 회의와 반복적인 수정을 거쳐 파사드를 완성할 수 있었다. 특히 사람들이 직접 들어와 머물 수 있는 공간이면서 분수와 조명 시스템까지 탑재하다 보니 강성과 안전을 강화하는 부분에서 챌린지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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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줄 왼쪽부터) 아이솔 김재성, 현대자동차 송지현, 스틸박스 고경선, 스틸박스 공주석, 현대자동차 배종열, 현대자동차 김동현, 아이솔 김영일, 현대자동차 정한비, 오리엔탈정공 신협, 오리엔탈정공 이현근 (아랫줄 왼쪽부터) 오리엔탈정공 엄기문, 플로바 김은준, 현대자동차 제승아 사진 이명수
24개의 파사드 디자인 중 수연재만의 차별점이 있다면?

송지현 모든 파사드에는 문이나 창문이 있기 마련인데, 우리는 이 부분을 조금 다르게 해석했다. 문이란 결국 두 개의 다른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이므로 특정 형상이나 소재에 국한될 필요가 없다고 봤다. 좀 더 유연한 동시에 기존 열린송현 녹지광장에 없던 자연 소재를 찾다가 물을 떠올리게 됐다. 허채의 공간에 자연을 적극적으로 들여야 했는데, 열린송현 녹지광장에는 자연 요소 중 빛과 바람, 산과 들은 있었지만 아쉽게도 물이 없었다. 부족한 요소를 더해 자연스러운 조화를 만드는 것이 감성적으로 더 편안한 느낌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처마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가 가상의 벽과 길을 만들고, 그 길을 통해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한다는 개념을 적용했다. 그렇게 탄생한 수연재의 처마 밑 공간은 지친 일상에서 회복으로 이동하는 통로이자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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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재의 처마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가 가상의 벽과 길을 만들고, 그 길을 통해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한다는 개념을 적용했다. 사진 ⓒ현대자동차그룹
금속 구조 사이에 숨긴 연화문 이스터에그도 인상적이다.

송지현 자동차가 점점 더 ‘머무르는 공간(living space)’으로 변화하면서 자동차 디자이너의 역할은 감성적 경험 설계자로 확장됐다. 단순히 멋진 조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람들의 일상에 따뜻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을 설계하는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 이번 파사드에도 그런 요소가 숨어 있다. 바로 이스터에그다. 디자인에서 말하는 이스터에그는 사용자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작은 발견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미소를 짓거나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장치다. 발견과 상호작용을 통해 더 인간적인 순간을 만들겠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수연재 제작 과정에서 구조상 피할 수 없는 파이프 노출 부위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억지로 가리거나 감추는 대신 오히려 새로운 발견의 기회로 삼고 싶었다. 그래서 단청 문양을 활용한 동전 크기의 작은 배지를 디자인해 그 자리에 배치했다. 단순한 보완이 아니라 ‘숨은그림찾기’ 같은 즐거운 발견이 될 수 있도록 의도한 솔루션이었다. 관람객이 가까이 다가가 우연히 그 단청을 발견했을 때, ‘이런 디테일이 숨어 있었네’ 하고 웃음을 짓는 순간을 의도한 것이다. 바로 이런 감정의 전환이 디자인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한다. 수연재의 이스터에그는 작은 장치이지만, 단순히 재미를 넘어 현대자동차그룹이 추구하는 사람을 향한 디자인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이번 비엔날레가 추구하는 ‘더 인간적이고 즐거움이 가득한 도시’도 같은 지향점을 바라본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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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듈화된 금속 패널과 트러스 프레임 사이에 숨은 연화문 이스터에그. 사진 ⓒ현대자동차그룹
총감독 토마스 헤더윅과 같은 외부 파트너와 협업하는 과정에서 현대자동차그룹이 가장 중요하게 본 가치는 무엇인가?

제승아 시대적 변화에 대한 공감대와 비전의 일치다. 최근 AI나 로보틱스 같은 기술의 발전은 빠른 속도로 산업 간의 경계를 허무는 동시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동반하고 있다. 이제 자동차, 건축, 디자인이라는 개별 영역을 넘어 사람과 자연을 중심으로 더 큰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 연대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디자인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외부 파트너십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올바른 미래에 대한 공동의 비전이기 때문에 중장기적으로 ‘휴머니티를 위한 진보’라는 우리의 근본 철학과 파트너의 가치관이 하나의 흐름을 이룰 때, 진정한 시너지가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실행력 측면에서 우리 브랜드의 진화와 고객 가치의 혁신에 함께 기여할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본다. 단순한 협업을 넘어서 실질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변화를 각자의 분야에서 함께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고려한다. 토마스 헤더윅과의 이번 협업은 바로 이러한 비전이 만나는 특별한 순간이다. ‘매력 도시, 사람을 위한 건축’이라는 비엔날레 주제와 현대차의 ‘휴머니티를 위한 진보’ 비전이 완벽하게 조우하면서 미래 모빌리티와 도시 공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아트 오브 스틸’이라는 조형 언어를 통해 함께 그려볼 수 있었다. 열린송현 녹지광장에 방문하는 시민들도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파사드를 통해 직접 경험해보고 우리의 비전에 공감해 주기를 기대한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최근 글로벌 디자인 어워드에서 다수 수상하며 디자인 역량을 인정받았다. 일련의 성과가 이번 비엔날레 참여와 어떤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송지현 국제 무대에서 현대자동차그룹 디자인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많아졌다.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 우리 스스로의 틀을 깨고, 혁신적인 변화를 만들어야 하는 시기인데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그 과정에 한 발짝 다가간 듯하다.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건축물을 아티스틱하게 표현하면서도, 기존에 우리가 추구하던 안전하고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과정이었다. 하지만 좋은 결과물을 통해 우리 디자이너들이 아트와 건축까지 아우르는 디자인 역량을 갖췄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며 현대자동차그룹 디자인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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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에는 은은한 빛이 파사드와 광장을 밝히며 시민들을 환대한다. 사진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자동차그룹이 향후 도시·건축·공공 공간 디자인 분야에서 장기적으로 어떤 비전을 그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제승아 최근 여러 도시 계획을 살펴보면 자연 친화적이고 보행자 중심의 도시 계획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도시가 진정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공간이 되려면, 노약자나 무거운 짐이 있거나 일시적으로 거동이 불편한 다양한 사람들의 이동을 돕는 다양한 형태의 모빌리티가 필요하다. 보행자와 함께 이동하는 마이크로 모빌리티들은 기존에 차가 다닐 수 없던 도시 속 골목길, 심지어 커뮤니티 공간의 실내까지도 진입해 사람들의 이동을 자연스럽게 도와줄 것이다. 또한 수요응답형 모빌리티의 찾아가는 이동 서비스가 활성화되면 고정된 정류장 대신 다른 형태의 교통 연결 시스템이 필요해질 것이다. 이처럼 모빌리티는 단순한 교통수단을 넘어서 도시 공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형태의 인프라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자율주행기술 역시 미래 도시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제승아 자율주행 시대가 도래하면, 사람들은 움직이는 공간이 된 차량의 실내에서 더욱 가치 있는 시간과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자율주행 차량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시 내에서 운영하기 위해선 도시 인프라와의 연계가 필수다. 드라이버가 없는 자율주행 차량의 관제 운영 시스템뿐만 아니라 충전, 청소, 유지보수, 정비 등 기존 도시에는 없던 완전히 새로운 시설과 인프라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이는 도시 자체의 건축적 구조와 공공 디자인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는 변화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이러한 새로운 모빌리티 생태계에 대한 비전과 청사진을 지난 CES를 통해 발표했고, 그 비전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공동의 비전을 추구하는 다양한 외부 파트너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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