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디자인으로 문제를 해결하다
전설적인 벤처 투자자 폴 그레이엄은 “좋은 디자인은 올바른 문제를 푼다”고 말했다. 스타트업은 늘 문제에서 출발하고, 디자인은 그 문제를 해결 가능한 경험으로 전환한다. 문제 해결형 스타트업의 출발점은 종종 사소해 보이지만, 그 디자인적 해법은 단순한 기능 개선을 넘어 삶의 질을 뒤흔드는 전환점이 된다.

물이 나오자마자 샤워가 가능하도록, 헤오Heau
냉수마찰로만 목욕을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누구나 경험해봤을 것이다. 뜨거운 물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수도꼭지를 틀어놓는 일 말이다. 그 과정에서 상당한 양의 물이 낭비된다. 벨기에 토목공학과 출신의 필리프 바이넨스(Philippe Bijnens)는 이 문제에 주목했다. 그리고 뜻이 맞는 대학 친구 알렉산더 고위(Alexander Gowie)에게 연락해 곧바로 연구를 시작했다. 그렇게 ‘헤오’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이는 샤워기를 틀면 배관에 고여 있던 찬물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별도의 저장소로 보내, 직전 샤워에서 남은 뜨거운 물로 대체하는 기술이다. 사용자는 기다림 없이 곧바로 원하는 온도의 물로 샤워를 시작할 수 있고, 보일러에서 새로 데워진 물이 도착하면 특허 밸브가 이를 감지해 자동으로 전환한다.
이는 기술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명쾌한 해답이다. 하지만 과제는 남아 있었다. 욕실에 설치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고, 다양한 환경에서 무리 없이 작동하는 ‘제품’이어야 했다. 이 지점을 해결한 것이 바로 디자인이었다. 헤오는 디자인 에이전시 복스데일(Voxdale)과 협업해 기능을 담아낼 형태를 탐색했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 초기 구상한 레트로핏 모델은 설치와 수리는 편리했지만, 시장이 원하는 모양과는 거리가 있었다. 다른 샤워기 브랜드와의 호환성 문제도 거듭 지적됐다. 팀은 그때마다 디자인을 수정해 벽 속에 통합하거나 보편적 규격과 호환되는 형태로 발전시켰다.

결국 최종적으로 완성된 디자인은 기능적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욕실 공간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심미성을 확보했고, iF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하며 그 가치를 입증했다. 헤오는 물 절약이라는 메시지를 내세우지 않고, 대신 디자인을 통해 ‘쾌적하고 기다림 없는 샤워 경험’이라는 언어로 풀어냈다. 그 경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속 가능성이 따라왔다. 이런 혁신을 바탕으로 헤오는 뜨거운 물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그 가능성을 넓혀갈 예정이다. heau.be

필리프 바이넨스
헤오 공동 창업자
헤오에게 디자인은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것의 핵심이다. 시각적 매력을 넘어서 제품의 세부 요소 하나하나를 다듬어 직관적이고 내구성이 뛰어나며 오래도록 편안함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즉시 온수를 제공하는 기술에 우아하고 사용자 중심적인 디자인을 결합해 욕실에서 한층 더 편리한 삶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다.
소비자가 선택하는 죽음의 모양, 타이탄 캐스킷Titan Casket
25년간 관을 만들어온 한 남자가 있었다.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그는 늘 같은 의문을 품었다. 왜 장례 당사자들은 이렇게 불투명한 상황에서 장례를 맞이해야 하는가. 장례 회사가 부르는 가격은 불투명했고, 유족들은 그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이 레몬 시장에 문제의식을 느낀 스콧 긴즈버그(Scott Ginsberg)는 2016년 D2C(소비자 직접 거래)와 온라인 판매를 중심으로 한 장례 서비스, 타이탄 캐스킷을 조슈아 시겔(Joshua Siegel), 엘리자베스 시겔(Elizabeth Siegel)과 공동 창업했다. 그가 바랐던 것은 더 솔직하고, 더 투명하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길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감정적 고통의 순간에 과도한 금전적 부담까지 안아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스스로 장례를 선택하고 관여하려면 무엇이 필요했을까? 바로 디자인이었다. 타이탄 캐스킷은 가장 먼저 관의 맞춤형 커스터마이징 기능을 선보였다. 색상, 형태, 내부 천의 질감, 생분해 가능 여부는 물론, 고인의 얼굴이 어떻게 보이길 원하는지까지 소비자가 직접 선택할 수 있게 했다. ‘마지막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경험은 장례를 둘러싼 불투명한 관행을 깨뜨리고, 소비자에게 통제권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장례를 준비한다는 것은 여전히 낯설고 불안한 경험이었다. 타이탄 캐스킷은 이마저도 디자인으로 풀어냈다. 웹사이트는 상품을 나열하는 공간이 아니라, 차분한 안내와 신뢰를 전하는 언어로 설계했다. 또 관 모양의 캐릭터 ‘모트(Mort)’를 등장시켜, 묵직한 주제 속에서도 웃음과 질문이 허용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나아가 장례업체 최초로 브랜드 앰배서더를 두고, 실제 관을 무대로 한 토크쇼를 진행하는 등 장례의 장벽을 낮추는 새로운 시도를 이어갔다.

이러한 디자인적 장치는 장례를 둘러싼 불안을 덜어내고, 사용자에게 선택의 권한과 신뢰를 되돌려주는 효과를 냈다. 그 결과 타이탄 캐스킷은 아마존에 입점한 최초의 관 브랜드가 되었고, 코스트코에서도 판매를 시작했으며 350만 달러(약 48억 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하며 성장했다. 죽음을 가볍게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타이탄 캐스킷은 디자인을 통해 그 과정을 더 투명하고, 덜 두렵고, 소비자가 주도할 수 있는 경험으로 바꾸었다. titancasket.com

조슈아 시겔
타이탄 캐스킷 공동 창업자
타이탄 캐스킷에게 디자인은 단순히 ‘어떻게 보이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가’의 문제다. 우리는 소비자에게 전통적으로 오프라인에서, 감정적으로, 그리고 낯설게 여겨져온 일을 온라인에서 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바로 장례식을 온라인으로 준비하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이 여정을 따라올 수 있도록, 익숙하고 안심할 수 있는 패턴을 디자인에 담는다. 제품 페이지에서 전화 통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순간은 불안을 줄이고, 사람들이 웃고 질문하고 스스로 상황을 통제해도 괜찮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다. 유머와 디자인이 손을 맞잡고, 낯선 경험을 안전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의 디자인이다.
숨은 인터페이스 드러난 가능성, 어그멘털Augmental
손이 아닌 입으로 모든 것을 제어할 수 있는 기기가 있다는 게 믿어지는가? 교정기처럼 입안에 착용하는 작은 장치 하나로, 사용자는 커서를 움직이고 화면을 스크롤하며 클릭까지 실행할 수 있다. 혀의 미세한 움직임이나 호흡, 머리의 흔들림을 입력 신호로 바꾸는 새로운 인터페이스, 바로 어그멘털의 ‘마우스패드(MouthPad^)’다.
창업자 토마스 베가(Tomás Vega)는 다섯 살 무렵 말을 더듬기 시작했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기술이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고, 열두 살 때부터 프로그래밍을 배우며 장애인을 돕는 인간 증강(human augmentation) 기술 개발에 몰두했다. 결국 이러한 집착이 어그멘털의 창업으로 이어졌다.

어그멘털의 마우스패드는 교정기 제작 방식 그대로 개인의 구강 구조를 스캔해 맞춤 제작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보조 장치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숨은 인터페이스’로, 사용자가 보조 기기를 사용한다는 의식 없이 일상에 기술을 녹여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손을 대체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과 기계가 연결되는 방식 자체를 재설계한 디자인적 발상이다.
사용자 경험 역시 달라진다. 척수 손상이나 팔 마비로 손 제어가 어려운 이들은 마우스패드를 이용해 이메일을 보내고, 공부하고, 가족이나 친구와 자유롭게 소통한다. “어릴 때부터 뇌졸중을 앓아 손 사용이 어려웠는데 마우스패드 덕분에 3D 모델링까지 가능해졌다”, “나와 컴퓨터 기기 사이의 마찰을 최소화해주는 장치” 등의 사용자 후기가 넘쳐난다. 이렇듯 마우스패드는 자율성과 자기표현을 회복시키는 수단이다. 어그멘털은 약 400만 달러(약 55억 원) 규모의 시드 투자를 유치했으며, 현재 FDA 승인 절차를 준비 중이다. 이를 통해 마우스패드는 더 많은 사람들의 일상으로 스며드는 디자인 솔루션이 될 전망이다. augmental.tech

토마스 베가
어그멘털 공동 창업자
현재의 인터페이스 장치들은 인간의 방식에 맞게 설계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인간 대 인간의 상호작용을 방해하고, 우리의 목을 구부리게 하며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어그멘털은 인간-컴퓨터 상호작용이 사실상 ‘손-컴퓨터 상호작용’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트랙패드, 마우스, 터치스크린 등 모든 것이 손 중심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컴퓨터 이전에도 계산하고 글을 썼다. 펜과 종이를 썼고, 타자기를 썼다. 책상에 묶여 세상을 바라봐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사무실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이제 모두를 위한 디자인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유니버설 디자인의 원칙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우리는 마우스패드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우리의 인터페이스는 사용자와 함께 진화한다. 결국 디자인이란 모든 것이다. 디자인은 어그멘털이 만들어가는 보조적 인터페이스란 직물 전체에 엮이는 실과 같다.
균사체로 쓴 디자인의 다음 장, 머시Mush
브라질은 세계 최대 농업 생산국 중 하나다. 그런 만큼 매년 엄청난 양의 농업 부산물이 버려진다. 쌀겨, 옥수수 줄기, 톱밥 등은 대개 방치되거나 폐기되며 온실가스 배출의 원인이 되곤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20년 브라질의 과학자 조셉 브라운(Joseph Brown)과 에두아르두 비텐쿠르트 시드니(Eduardo Bittencourt Sydney)가 머시를 창업했다.
머시는 곰팡이의 뿌리 조직인 균사체에 주목했다. 농업 부산물에 균사체를 결합하면 단단하고 가벼운 생분해성 복합체로 변모해 새로운 자원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더욱이 이 소재는 폐기 후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현지에서 쉽게 조달이 가능하며, 무엇보다 곡면과 유기적 질감을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어 디자인적으로 풍부한 표현이 가능하다.

이 점에 착안해 머시는 균사체 기반 소재를 조명, 가구, 생활 소품 등 제품 디자인으로 확장했다. 인상적인 건 퍼프Furf 디자인 스튜디오와 함께 선보인 유골함 ‘세일Sail’이다.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의 시 구절 중 “항해는 필요하다”에서 영감을 받아 작은 범선 형태로 디자인한 이 제품은, 바다에 띄우면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분해돼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소재 디자인으로 환경 문제를 해결한 데 이어, 그 소재로 새롭게 디자인한 제품은 ‘장례’라는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 인상 깊다. 세일은 2024년 iF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렇듯 머시의 사례는 ‘소재 디자인’이 단순히 친환경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부터 죽음 이후의 순간까지 전혀 예상치 못한 영역에서 새로운 문제 해결의 단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mush.e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