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귀족과 예술가들의 휴양지로 잘 알려진 레이크 코모에서는 매년 9월 디자인 페스티벌이 열린다. 올해로 7회를 맞은 이 축제는 코모 지역의 활성화를 위해 조직된 비영리 단체 ‘원더레이크 코모(Wonderlake Como)’가 주최한다. 지난 9월 14일부터 21일까지 열린 이번 행사의 주제는 ‘Fragments’. 축제의 설립자이자 예술 감독인 로젠조 부티(Lorenzo Butti)는 조각 또는 파편의 의미를 지닌 이 단어가 파손이 아닌, 재생의 행위로서 재건과 재연결, 재발견의 기회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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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s of Memory

올해의 메인 전시장인 ‘빌라 델 그루멜로(Villa del grumello)’에서는 주로 유명 이탈리아 디자이너와 유서 깊은 브랜드의 유산을 조명하는 그룹 전시 <Fragments of Memory>가 열렸다. 페스티벌의 테마인 ‘조각들(Fragments)’을 중심으로, 역사적인 건축 공간 속에서 기억과 시간, 공간의 새로운 의미를 탐구하는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었다.

전시의 시작은 이탈리아 현대 미술의 부흥을 일으킨 트란스 아방가르드의 대표주자 엔조 쿠치(Enzo Cucchi)였다. 전시장 중앙에는 로마 분수를 재해석한 조각들을 설치하고, 벽에는 코모의 유명한 판화 제작사 에디치오니 리토스(Edizioni Lithos)와 협업한 드로잉을 걸어, 마치 과거와 현대가 상상의 도시에서 대화를 나누듯 연출했다.

이 전시의 특징 중 하나는 코모 지역을 기반으로 한 기업들과의 협업이다. 코모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텍스타일 브랜드가 된 아르키비오 만테로(Archivio Mantero)는 첫번째 프로젝트 기록인 ‘UNANNO’를 통해 시간과 기억의 조각을 텍스타일 디자인으로 표현했고, 코모 지역에 본사를 둔 가구 브랜드 캄페찌(Campeggi)는 현대 이탈리아 디자인 거장 비코 마지스트레티(Vico Magistretti)와 클라우디오 캄페찌(Claudio Campeggi)의 협업에서 탄생한 Vico Collection을 다시 한번 선보였다. 캄페찌는 소파 베드와 다기능 가구로 유명하며, 세계 최초로 변형 가능한 가구를 제작한 브랜드다. 이 컬렉션은 사용자가 디자인을 역동적이면서도 기능적인 형태로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빌라의 중심 공간에서는 브라질 프리미엄 가구 브랜드 에텔(Etel)이 클라우디아 모레이라 살레스(Claudia Moreira Salles)의 회고전을 열어 그녀의 독창적 세계를 조명했다. 살레스의 디자인은 절제된 형식미 속에 따뜻한 온기를 담아내는 것이 특징. 나무, 돌, 금속 등 자연 소재의 질감을 세심하게 드러내어 감각적인 경험으로 확장된다. 기능과 조형을 넘어 재료가 곧 언어가 되는 작업 방식은 그녀의 현대적인 감수성을 보여준다.

이탈리아 전통 가구와 디자인 유산을 보존하는 갤러리 에레디 마렐리(Eredi Marelli)는 우아하고 기능적인 가구 디자인으로 20세기 중반 이탈리아를 대표한 파올로 부파(Paolo Buffa)에서부터 이탈리아 최초의 프리츠커 수상자인 알도 로시(Aldo Rossi)에 이르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디자인 아이콘을 선별하여 재조명했다.

빌라의 2층에서는 코모에서 대를 이어 가족이 경영하는 패브릭 하우스 데다르(DEDAR)가 Weaving Anni Albers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이 프로젝트는 독일을 대표하는 예술가 부부인 Josef & Anni Albers Foundation과 협업해 개발되었다. 아니 알버스는 바우하우스에서 요제프 알버스와 함께 공부하고 교수로 활동했으며 실용성과 예술성을 결합한 혁신적인 직물 작업으로 현대 섬유 예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데다르는 그녀의 비전을 바탕으로 한 다섯 점의 자카드 패브릭을 현대적 감각을 재해석해, 실(thread)을 예술과 소재, 기억을 연결하는 언어로 보여준다.

빌라 델 그루멜로의 전시는 선착장(호수 주변의 고급 빌라들은 모두 선착장이 있다)에서 마무리된다. 이탈리아 베네토에서 전통 기술과 현대적인 감각을 결합하는 유리 공예 스튜디오 원더글라스(WonderGlass)가 투명성을 기억의 은유로 탐구하는 유리 작품 컬렉션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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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mporary Design Selection

코모의 역사적인 건축물과 정원을 중심으로 조성된 Chilometro della Conoscenza (지식의 1km)에서 열린 Contemporary Design Selection은 큐레이터 조반나 마소니(Giovanna Massoni)가 기획했다. 빌라 델 그루멜로에서 열린 전시가 이탈리아의 유산을 조명했다면 이 현대 디자인 셀렉션은 공개 모집을 통해 전 세계 디자이너, 예술가, 건축가, 장인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fragment’ 개념이 어떻게 표현되고 해석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도록 초대했다. 참가자들은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중동 등 전 세계에서 모여, 조각(Fragment), 재생(Regeneration), 기억(Memory)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각자의 실험과 작품을 선보였다.

밀라노에서 활동하는 제품 디자이너 루도비카 코르티(Ludovica Corti)의 작업은 자연과 인공의 경계에 놓인 오브제로, 사라져가는 흔적과 과거의 기억을 담아 조각의 시간성을 보여준다.마르타 애보트(Marta Abbott)는 희귀 산호 화석을 전통 기법을 활용한 돌로 재현해, 바다에 담긴 시간과 장소, 역사와 지식을 시각화했다. 료코 나카무라와 트리프틱(Ryoko Nakamura x Triptych)은 일본 부채 예술과 조명을 결합해, 문화와 기억을 담은 램프를 선보였다. 토마스 세루이스(Thomas Serruys)는 금속과 기억의 조각을 결합한 컷 스틸 의자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토마소 스핀지(Tommaso Spinzi)는 로마 유적을 모던하고 위트있는 가구로 재해석하여, 고대 기둥과 1970년대 스페이스 에이지(Space Age)의 감각을 동시에 담아냈다.

자연과 문화, 하이브리드 재료를 활용한 작품들도 눈길을 끌었다. 안시카 망글라(Anshika Mangla)는 전통 대나무 직조를 현대 조명에 접목하고, 누보 스튜디오(Nuvó Studio)는 멕시코 상징과 이탈리아 디자인을 결합해 본질적이면서 상징적인 조명을 만들었다. 스튜디오 리리움(Studio Lilium)은 수작업으로 만든 종이 갓에 코코아 잔여물을 섞어 질감과 색의 깊이를 더했고, 슈퍼 랫(Super Rat)은 나무 껍질을 감귤 타닌으로 처리해 빛에 따라 변하는 새로운 표면을 드러냈다. <We Mediterranean> 프로젝트는 이동식 미니멀 주거 공간을 통해 이주와 환대, 공동체의 의미를 건축학적 언어로 표현했다.

조반나 마소니(Giovanna Massoni)는 이번 전시를 통해 조각이 단순히 불완전한 잔해가 아니라, 서로 다른 기억과 문화를 연결해 새로운 의미를 태어나게 하는 출발점임을 강조한다. 세계 곳곳에서 모인 작품들은 과거와 현재, 개인과 사회, 자연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로서의 조각을 보여주며, 관람객이 익숙한 파편 속에서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하도록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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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do Rossi. Architecture in Fragments

이탈리아 건축가 중 최초로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알도 로시(Aldo Rossi)를 조명하는 전시도 열렸다. 산 피에트로 인 아트리오 교회(San Pietro in Atrio)에서 진행된 전시는 큐레이터 키아라 스팡가로(Chiara Spangaro)가 알도 로시 재단과 협력해 기획했으며, 로시의 1960년대 이후 이론과 건축 실천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Fragments’의 개념을 탐구한다. 제목은 MAXXI 건축 아카이브에 보관된 로시의 글 “Fragments. An Architecture of Fragments, or an Architecture of the Possible”에서 따왔다.

이번 전시는 건축 도면, 사진, 텍스트, 문서를 비롯해 그의 작업 세계를 드러내는 주요 프로젝트들을 소개한다. 1973년 밀라노 트리엔날레를 위해 제작된 실험 영화 <Ornamento e delitto>, 197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발표된 대형 콜라주 <La città analoga>, 그리고 1992년부터 시작된 베를린 Schützenstrasse와 Charlottenstrasse 블록 재건 프로젝트까지, 로시의 작업은 언제나 파편과 단편을 통해 새로운 건축적 질서를 모색했다.

전시는 크게 세 파트로 구성된다. 첫 번째 파트는 영화 <Ornamento e delitto>에 집중한다. 다큐멘터리적 콜라주 형식으로 건축과 맥락, 인간 존재의 관계를 탐구한 이 작품은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았으나, 오늘날 로시의 대표작 중 하나로 재평가되고 있다. 두 번째는 <La città analoga>로, 역사적 도시 지도와 로시의 프로젝트, 상징적 이미지를 중첩시킨 대형 콜라주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개발 과정 일부와 더불어, 2015년 마스트리흐트 보네판텐 박물관에서 공개된 다리오 로디게로(Dario Rodighero)의 지도 버전도 함께 소개된다. 마지막 파트는 Artforum을 위해 기획된 Fragments 프로젝트로, 도시를 완결된 전체가 아닌 건축적 단편들의 집합으로 바라보며 가능성의 공간으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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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IO DESIGN ICO PARISI

이코 파리시(Ico Parisi) 디자인 아카이브 협회는 레이크 코모 디자인 페스티벌을 맞아 코모 Via Diaz 11에 파리시의 업적을 기리는 본부를 새롭게 열고, 이를 기념하는 회화 전시를 선보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제작된 대형 회화 시리즈 Crolli edificanti – Tavole di provocazione가 처음 공개되었으며, 단편적 이미지가 불러오는 혼란스러운 인상을 통해 파리시의 디자인 철학을 드러낸다.

20세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이코 파리시는 어린 시절 코모로 이주해, 이탈리아 건축의 거장 주세페 테르라니(Giuseppe Terragni)의 스튜디오에서 수련을 받았다. 이후 아내이자 디자이너인 루이사 아이아니(Luisa Aiani)와 함께 디자인 스튜디오 라 루오타(La Ruota)를 설립하고, 건축과 디자인, 예술을 아우르는 융합적 작업을 이어갔다. 그는 코모 지역에서 산타 안토니오 아파트, 비니 하우스, 벨로지아 빌라 등 다양한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가구 브랜드 카시나(Cassina)와 협업해 ‘폴트로나 우오보 813, ‘카페 테이블 751’ 등 기능성과 미학을 겸비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이러한 작업들은 인간 중심의 설계와 공간, 형태의 조화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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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COLI RAZIONALISTI AT ASILO SANT’ELIA

코모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테마 중 하나는 이탈리아의 ‘합리주의 건축(Rationalist Architecture)’이다. 1920~30년대에 등장한 이 건축 양식은 화려하기 그지없던 이탈리아 특유의 장식을 배제하고, 기하학적 단순성과 구조적 명료성, 기능 중심의 설계를 강조한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코모는 주세페 테르라니(Giuseppe Terragni)를 비롯한 합리주의 건축가들의 주요 실험 무대였으며, 공공 건축과 주거 건축을 통해 형식과 기능의 균형을 보여주는 사례가 풍부한 지역이다.

특히 테르라니가 설계한 카사 델 파시오(Casa del Fascio)는 현재 코모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합리주의 건축을 대표하는 공공 건축의 상징적 작품이다. 또한 아실로 산텔리아(Asilo Sant’Elia)는 어린이의 교육과 심리적 안정을 고려해 설계된 대표작으로, 합리주의 건축의 사회적 역할을 잘 보여준다. 이번 축제 기간 동안 원더레이크 코모(Wonderlake Como)는 아카데미 오브 리틀 아티스트(Academy of Little Artists)와 협력해 리틀 레셔널리스트(Little Rationalists) 프로젝트를 선보이며 아실로 산텔리아를 대중에 개방했다. 2024년부터 약 1년간 1,400명이 넘는 초등학생이 코모의 합리주의 건축을 탐험하는 과정을 기록한 이 영상은 래셔널리스트 시티(Rationalist City)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합리주의 건축 공간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확장될 수 있을지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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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ice on Water

지난해 처음 레이크 코모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소개된 프로젝트 <Water Landscapes>는 알프스 지역의 호수들을 탐구하며, 물이 풍경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이자 인간이 만든 국경과 영토적 단절을 초월해 연속성을 부여하는 존재임을 보여줬다. 이러한 맥락을 이어 올해는 새로운 설치 작품〈Voices on Water>를 선보였다.

스테파노 라로톤다와 니콜로 네시가 큐레이팅한 이번 프로젝트는 물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며, 다양한 전문가들의 증언과 기여를 하나의 여정으로 엮어냈다. 특히 이미지를 대신해 목소리로 이야기를 전한다는 점에서, 시각적 재현을 넘어 청각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에 방점을 찍었다. 전시는 빌라 수코타 선착장의 건축적 공간 안에서 구현되었으며, 안개 기법 전문 회사인 네포스 스위스 포그(Nephos Swiss Fog)의 기술 지원을 받아 물리적 형상을 얻었다. 작품은 물을 단순한 자연적 요소가 아닌 경계와 기억, 정체성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제시하며, ‘물의 풍경’을 바라보는 새로운 감각적 접근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