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자의 기꺼운 밭 고르기, 정은지 × 신선아
신선아와 정은지가 대전에 터를 잡은 지 어언 15년이다. 토박이도 외지인도 아닌, 중간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지역의 관행과 권위에 금을 가하며 도시에 새로운 색을 입히는 중이다.

대전이 한밭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이름처럼 너른 땅에 사람들이 오가고, 누군가는 집을 짓고 밭을 일구며 살아가기 시작했다. 신선아와 정은지도 그 숱한 행인 중 하나였다. 터를 잡은 지 어언 15년, 이제 토박이도 외지인도 아닌 중간자의 눈으로 도시를 읽는 중이다. 무색무취의 도시라는 편견 위에 색을 입혀온 이들은 앞으로 살아갈 토양을 고르기 위해 디자인 생태계 바깥으로 발을 내딛는 중이다. 관행과 권위에 금을 가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지역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고민을 선행해야 할지 어렴풋하게나마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신선아(오른쪽) 대전에서 청년 잡지를 만들다가 공 튀기고 깃발 흔들고 춤추고 연극하고 예능 찍으면서 디자인하는 사람이 되었다. 페미니스트 문화 기획자 그룹 ‘BOSHU’와 비혼 여성 커뮤니티 ‘비혼후갬’을 운영하며, 우유니 디자이너와 디자인 스튜디오 ‘굿 퀘스천’에서 다양한 분야의 구성원들과 협업하고 있다. 좋은 질문을 배우고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는 일, 지역과 나를 이어주는 기획과 실천 방법을 모색하고 삶의 언어로 디자인을 익히는 과정을 좋아한다. goodquestion.co.kr
정은지 대전에는 재미있는 거리 글자가 많아요. 디자이너가 아니더라도 대전 사람이면 누구나 휴대폰에 간판 사진 한두 장은 가지고 있을 정도죠. 원도심 곳곳에는 아직 오래된 간판과 시트 커팅 글자가 남아 있는데, 조형적으로 참 아름다워요.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도시의 흔적이죠.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건물과 글자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어요. 더 늦기 전에 대전의 글자를 모으고, 그 안에 담긴 지역의 정서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기록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대전 안팎의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방식으로요. 그렇게 작년부터 신선아, 우유니 디자이너와 함께 ‘동네 탐정: 대전 글자를 찾아서’라는 지도 기반 온라인 아카이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신선아 탐정처럼 동네를 누비며 거리 글자를 찾는 거죠.(웃음) 지도에 표시된 글자를 찾아다닐 수도 있고, 길을 걷다가 흥미로운 글자를 발견하면 제보할 수도 있어요. 다 같이 만들어가는 지도예요. 지역의 풍경을 흥미로운 이미지로만 소비하는 게 아니라, 직접 와서 보고 걸으며 경험하기를 바랐어요. 내가 사는 도시를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고 각자의 시선으로 기록해보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정은지 거리 글자를 기록한다는 건 결국 도시를 관찰하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저희도 대전에서 나고 자라지는 않았지만, 이 도시를 선택해 머무는 사람으로서 새롭게 보이는 풍경이 많아요.


디자인 신선아, 우유니, 정은지
신선아 제가 대전에 처음 왔을 때는 그 낯섦이 해방감으로 다가왔어요. 크고 시원한 도시라는 인상이었죠. 흔히 대전을 ‘노잼 도시’라고 하는데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해가 잘 안 가요.(웃음) 가끔 답답할 때는 있어요.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분위기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끔은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조심스러워요. 문제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달까. 그런 환경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어요.
정은지 대전에서 페미니즘과 디자인에 관해 활발하게 목소리를 내던 시기가 있었어요. 반응이 크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지역 담론이 서울의 속도나 구조를 그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각 도시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걸 배웠거든요. 2021년 사월의눈 전가경 선생님의 초청으로 대구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대구의 디자이너들을 만나고 나니 오히려 대전의 위치가 선명하게 느껴졌어요. 서울과 비교할 때는 보이지 않던 차이가 대전과 대구를 오가는 대화에서 훨씬 또렷하게 드러나더군요.


신선아 서울과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각 도시의 고유한 특성이 ‘지역’이라는 단어 아래 납작해지는데 말이에요. 우리는 여전히 ‘큰 도시의 언어’로 설명하는 습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요. 설명하기 쉽고 효율적이라 조금만 방심해도 금세 대도시의 문법으로 돌아가게 되죠. 소도시에 살수록 그래요. 말해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저도 가끔은 나고 자란 곳을 소개할 때 ‘충주’가 아니라 ‘충북’으로 뭉뚱그려 말할 때가 있답니다. 그래도 작은 도시에서 목소리를 내려면 그 같은 번거로움과 비효율성을 감내해야 해요. FDSC에서 비수도권 행사를 준비할 때 그걸 많이 느꼈어요. 행사 준비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은 서울이나 대전이나 똑같은데, 참여자 수는 확연히 차이가 났거든요. 그래도 적은 인원이 모이니 오히려 서로 더 깊이 알게 되고, 관계의 밀도 속에서 도시를 배워갈 수 있었습니다.
정은지 그때는 정말 열심이었어요.(웃음) 서울 밖에도 디자이너가 있다는 걸 꼭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내가 서 있는 환경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했고, 답을 찾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어요. 그렇게 5년이 지나니 이제는 우리가 하는 일 자체가 지역을 말하는 언어가 되었다는 걸 확실히 느껴요.
신선아 각자 위치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들의 행보를 조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역을 설명할 수 있어요. 개인에게 집중하는 게 오히려 지역을 풍부하게 다루는 방법이 될 수 있는 거죠. 저도 요즘은 일하고 배우면서 다시 천천히 마중물을 쌓고 있습니다. 대전에 산 지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지역의 협업 생태계를 배워가고 있어요.
정은지 결국 ‘함께 일하는 환경’을 고민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지역에서 규모 있게 일하려면 지자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 부당함을 감수하거나 침묵해야 할 때가 있어요. 저는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웃음) 한번은 기관 관계자에게 말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어요. 구조적인 문제를 짚었을 뿐인데 말이에요. 클라이언트 입장도 이해는 해요. 디자인을 의뢰했을 뿐인데 예상치 못한 쓴소리가 돌아오니 당황스러울 수 있죠. 하지만 변화를 이루려면 번거롭더라도 일의 구조를 함께 들여다봐야 해요. 지역에서 일하다 보면 정당한 보수를 지키면서 관계를 이어가기 힘들 때가 있어요. 요즘은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씁니다. 노동과 보수의 기준을 분명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지금은 함께 일하는 사람과의 관계나 업무 환경을 가꾸는 데 힘을 쏟고 있어요. 당장 돈으로 계산되지 않을지라도 언젠가는 그것이 내가 일할 기반이 될 것이라고 믿거든요. 내가 살아갈 땅을 다지고 씨앗을 심는다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어요.

신선아 일을 하다 보면 타협의 순간도 오죠.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반드시 지키고 싶은 가치가 있잖아요. 저에게는 그게 ‘누구와 어떻게 일할 것인가’의 문제예요. 지역에서 일할수록 연대가 중요하거든요. 작년에 대전여성영화제가 성소수자 관련 영화 상영 중지 요구에 맞서 보조금을 반납하고 시민 후원을 받아 자발적으로 행사를 이어갔던 일이 인상 깊었어요. 쉽지 않은 선택이었겠지만 그 덕분에 행사의 정체성과 가치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 것 같아요. 요즘은 기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지속 가능하게 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자주 고민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하며 선택지를 넓혀나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작더라도 안전하고, 내가 온전히 즐거울 수 있는 땅을 가꿔가고 싶어요. 크면 더 좋고요.
정은지 저도 일의 방식을 새로 설계해보고 싶었던 시기가 있었어요. IT 회사에서 오래 일하면서 업의 구조와 태도에 대해 늘 고민했는데, 회사는 그런 고민을 불필요하게 여겼거든요. 그러다 FDSC에서 동료들을 만나면서 일의 구조를 재설계하는 데 품을 들여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때 처음 ‘나도 다른 방식으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스튜디오를 차렸죠. 이제는 ‘대전에서 일한다’는 말 자체가 제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되었습니다. 사실 퇴사를 망설이던 시기에는 서울로 가야 하나 고민도 했어요. 주변에서도 그게 당연하다고 했고요.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내 발로 대전에 왔는데, 결국 더 나은 삶을 위한 답이 서울뿐이라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그러다 가까이에 결이 맞는 동료들이 생기니 이곳에서 하고 싶은 일이 다시 또렷해졌어요. 비로소 정착했다는 느낌도 들고요.
신선아 저희는 엄밀히 말하면 이주민이라, 비슷한 처지의 동료가 곁에 있다는 게 큰 힘이 됩니다. 우리가 대전을 감각하는 방식은 토박이와 분명히 다를 거예요. 도시의 과거와 오늘을 몸으로 겪어온 사람과는 감도 자체가 다르겠죠. 그래도 우리처럼 어중간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도 있다고 생각해요. 대전에 살면 살수록 이곳에 대한 애정이 깊어져요.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지만, 사는 곳을 미워할 줄도 알아야 진짜 사는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