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에 글자를 수놓고 재조립하기, 서체 디자이너 양희재

라틴 알파벳과 한글 서체 디자인에 특화된 양희재와 장수영이 만나 탄생한 ‘양장점’은 국내 폰트 시장에서 손꼽히는 디자인 스튜디오다. 2016년 10월부터 합을 맞춘 이들은 설립 이래 유수의 기업과 기관 프로젝트의 레터링과 폰트 디자인을 맡으며 실력 있는 스튜디오로 업계에 정평이 났다.

여백에 글자를 수놓고 재조립하기, 서체 디자이너 양희재

양희재와 장수영은 각각의 분야에서 독립적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한다. 2024년 1월호를 기점으로 리뉴얼한 월간 〈디자인〉의 제호 디자인은 라틴 알파벳 디자이너 양희재와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의 협업 결과물. 양희재는 최근 ‘케이타운타입Ktowntype’이라는 라틴 활자 타입 파운드리를 설립해 다양한 디자인 프로젝트를 전개하고 있다. 양장점과는 별도로 오랜 기간 준비한 케이타운타입에 유영범 디자이너가 합류하며 재미난 실험이 벌어지고 있다.

lnterview

양희재

서체·그래픽 디자이너. 단국대학교 시각디자인과와 스위스 로잔 예술대학(ECAL)을 거쳐 서체 디자인 스튜디오 양장점에서 라틴 알파벳 디자인을 맡고 있다. 2015년 라틴 알파벳 폰트 ‘Fifty’, 2017년 ‘Palais’를 출시했다. 활자체 파운드리 케이타운타입을 통해 서체 경험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하고 있다. ktowntype.com @heee88

케이타운타입 웹사이트
양장점 이야기부터 해보자. 장수영 디자이너와 합을 맞춘 지 올해로 9년 차다. 운영 초창기와 현재를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있나?

벌써 그렇게 됐나? 우리가 함께 일한 시간을 체감하지 못할 정도로 바뀐 것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경력이 늘었다고 능숙해져 글자 디자인이 쉬워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아직도 해야 할 것,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예전과 달라진 점은 우리와 함께하는 디자인 스튜디오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초창기에는 양장점이 직접적으로 클라이언트와 소통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요즘은 디자인 스튜디오가 브랜딩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활자체 디자인 파트를 우리가 맡거나 글자의 완성도에 대한 필요가 있는 곳과 협업하는 프로젝트가 많아졌다. 사실 폰트 디자인이 다른 디자인 프로모션에 비해 자극적으로 체감되는 영역은 아니다. ‘돈 쓴 느낌’이 곧장 느껴지는 영역이 아니라는 의미다. 폰트 디자인은 사용자 경험에서 서서히 스며들며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더 높은 퀄리티의 글자체에 대한 수요가 존재한다는 걸 체감하고 있다. 좋은 글자를 나의 창작물에, 혹은 기업의 CI나 미술관의 MI에 적용하고자 하는 수요가 점차 확대되고 있음을 느낀다.

양장점과 별개의 플랫폼인 케이타운타입을 설립한 배경이 궁금하다.

양장점은 2016년부터 지금까지 서체 디자인 스튜디오로서 많은 활동을 해왔다. 이러한 활동이 스튜디오 양장점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미지는 양희재와 장수영, 2명의 디자이너가 만들고 있었다. 나는 글자의 언어적 특성보다 조형적 측면에 관심이 많다. 나는 이 관심 지점이 굉장히 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개인적인 관심을 보여줄, 공동의 영역인 양장점이 아닌 별도의 공간이 필요해졌다. 비공식적으로 나와 오랜 시간 함께 작업해온 유영범 디자이너가 합류하며 이전에 시도해보지 못했던 여러 활동을 전개해보려 한다.

케이타운타입에서 첫 출시한 제품 ‘소노라 펜 홀더’. A부터 Z까지 라틴 알파벳 한 벌의 형태를 모두 제작했다.
라틴 알파벳 ‘소노라Sonora’의 소문자와 숫자 형태를 활용해 ‘소노라 펜 홀더Sonora Pen Holder’를 제작했다.


소노라는 글자의 속 공간과 바깥 공간의 경계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외곽선이 콘셉트다. 선 하나가 바깥에서 시작해 안쪽으로 들어가고 다시 바깥쪽으로 나가는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디자인이 특징이다. 이러한 서체의 유기적 특성을 제품에도 적용했다. 3D 프린팅 기술을 기반으로 층층이 쌓아 올려 만든 제품이라는 걸 굳이 감추지 않고 표면의 단차를 그대로 드러낸 게 특징이다. 프로덕트 쪽에서 글자를 하나의 수단으로 제품을 만드는 경우는 종종 있는데, 역으로 서체 디자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창작자가 제품을 생산하는 경우는 드물다. A부터 Z까지 서체 한 벌을 모두 제품으로 제작했다. 서체 디자이너는 어떤 화법으로 제품을 만들지에 대한 고민이 담긴 제품이다. 소노라 펜 홀더는 3D 기기에 입력한 폰트 데이터를 바탕으로 층층이 쌓아 올려 만들기 때문에 하나를 만드는 데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린다. 현재 케이타운타입이 가지고 있는 3D 프린팅 기계로는 하루 종일 프린팅을 해도 10개 정도밖에 못 만든다. 생산성만 고려하면 프로젝트를 지속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디지털로만 소통하던 폰트 디자이너가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 자체로 생경하면서도 값진 경험이다. 제품 제작을 결정한 이유다.

지난 2월 29일부터 3월 2일까지 서울 종로구 오픈 스튜디오에서 제품을 직접 살펴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원래 양장점은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워크룸의 이경수 디자이너와 사무실을 공유했다. 아직도 그곳에 양장점 자리가 남아 있다. 이와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고자 지난 1월 이 공간을 계약했다. 사무실이면서 비정기적으로 작업을 선보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오픈 스튜디오를 통해 개인적인 소셜 미디어에서만 공개하던 3D 프린팅 작업을 선보였고 방문한 이들과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공간을 마련했으니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많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케이타운타입 오픈 스튜디오
케이타운타입 설립으로 향후 양장점 운영에 변화가 생기는 부분도 있을까?

케이타운타입을 시작했기 때문에 생기는 변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양장점은 변화를 꾀하고 있다.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조금 더 친절하게 바꿔보려고 한다. 양장점은 아직 공식 웹사이트가 없으며 스튜디오를 시작할 때 만든 명함을 소진한 이후 명함도 없는 상태다. 웹사이트는 2018년 〈New Wave ll: 디자인, 공공에 대한 생각〉전과 〈타이포잔치 사이사이 2018-2019〉전 참여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임시로 개설한 게 전부다. 하지만 요새는 디자이너에게 요구되는 역량이 창작물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를 제대로 알리고 사용자에게 닿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올해는 양장점의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는 동시에 웹사이트 개설을 준비하고 있다.

건축 다큐멘터리 <Documentum> Vol.6 표지. 워크룸 이경수 실장과 협력해 제작했다.
폰트 제작에 타이포그래퍼부터 타입 엔지니어까지 다양한 창작자와 긴밀하게 협업한다고 들었다.

글자를 그리는 사람이 타입 디자이너라면 글자를 섬세하게 배열하는 사람은 타이포그래퍼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이 작업하면서 효과적으로 커뮤니케이션했을 때 좋은 결과가 만들어진다. 워크룸의 이경수 디자이너와 사무실을 공유하면서 존경하는 디자이너가 글자를 얼마나 섬세하게 바라보는지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내 작업 완성도의 목표치가 더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글자를 소중히 여기는 디자인 스튜디오와 작업할 때 내 작업을 잘 활용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또 타입 엔지니어 역시 폰트업계에서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디자이너가 글자 디자인을 완성하면, 프로그래밍을 통해 인쇄용이나 화면용으로 유통할 수 있는 폰트 파일을 만들어낸다. 엔지니어링 없이 폰트는 공식적인 완성품이 될 수 없는 셈이다. 폰트 파일이 설치되었을 때 소프트웨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바로잡아주는 거다. 산업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인데,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듯하다.

양희재가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과 함께 디자인한 월간 <디자인> 제호.
인력이 한정되어 있어서 시장이 커지는 데 무리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맞다. 특히 국내 폰트 디자인 개발 영역은 더욱 특수하다. 양장점은 이 인터뷰 시리즈에 함께하는 폰트퍼블리셔 노영권 대표와 긴밀하게 협력하며 작업하고 있다. 많은 폰트가 출시되지만 전문적인 폰트 엔지니어는 소수인 것으로 알고 있다.
폰트가 노출되는 매체가 다양해지는 만큼 서체를 활용한 콘텐츠의 형식도 다각화되고 있다.

과거에는 활자체 회사들이 서체 견본집을 인쇄물로 제작했다. 인쇄된 다양한 크기의 글자 디자인을 보여주고 활자체 제작자가 추천하는 사용 방식을 권하는 것이다. 요즘은 활자체 파운드리들이 웹사이트에 공을 들이는 양상이다. 글자가 소비되는 플랫폼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디지털 환경에서 어떻게 보여질지가 핵심이 됐다. 베리어블 폰트도 그 대표적인 예다. 양장점과 같은 작은 규모의 서체 스튜디오는 대형 폰트 회사가 클라우드 서비스를 속속 내놓고 AI를 활용한 폰트 제작 기술이 발달하는 가운데 많은 서체 디자인 중에서 선택될 수 있는 이유를 계속 고민하고 찾아나가며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양장점 웹사이트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이기도 하다.

‘대우재단 신사옥 오르비스ORBIS’ 전용 활자체 디자인, 2023
사실 타이핑을 주로 하는 에디터로서 폰트에 ‘디지털’이란 수식어를 붙여야 할지 고민되더라.

이 개념에 대한 정립이 중요하다. 폰트는 꽤 오래전부터 디지털로 작업했다. PC 보급 이래로 폰트는 대부분 디지털 환경에서 만들었는데, 이제 폰트를 제작하는 환경을 넘어 폰트를 표현하는 공간이 디지털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 산업의 흐름이다. 내가 글자를 공부하던 10여 년 전만 해도 인쇄되었을 때의 글자 형태가 중요했다. 인쇄물의 결과를 최종이라 생각하고 디자인한 것이다. 요즘은 글자의 최종 행선지가 디지털 환경으로 바뀌는 추세다. 디지털 폰트는 ‘작업을 디지털로 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환경에서 사용하는 글자’임을 강조하고 싶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51호(2024.05)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