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 AI를 거부하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AI 비거니즘(AI Veganism)과 기예르모 델 토로

이제 AI와 일상을 함께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AI에 빠르게 적응했다. 어느샌가 우리는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가 써주는 보고서와 과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AI 시대에 AI를 거부하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이제 AI와 일상을 함께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AI에 빠르게 적응했다. 어느샌가 우리는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가 써주는 보고서와 과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루의 스트레스를 잠시 잊게 만드는 숏폼 콘텐츠는 AI가 우리의 입맛에 맞게 골라준 것들로 가득하다. 쇼핑을 할 때도 AI 추천에 따라 결정을 내려버리곤 한다. 이런 일들은 자의적이기도 하지만 타의적이기도 하다. 수많은 플랫폼들이 앞다투어 AI를 활용하라고 권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상황 속에서 골치 아프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어서 편하기는 하지만, 삶의 많은 부분을 내어주고 있다는 기분도 든다. 취향부터 선택, 행동에 이르는 모든 것을 AI가 하라는 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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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Stockcake

AI가 막 우리의 일상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사람이 몇 시간, 며칠에 걸쳐서 하던 창작의 과정을 AI는 단 몇 분 만에 해결했기 때문이다. 창작을 업으로 삼고 있던 이들은 일자리를 빼앗길 것을 우려하며 AI의 확산에 반대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AI 기술은 이들의 불안을 잠재우듯, ‘보조자’의 역할을 자처하며 조용히, 그러나 깊숙하게 일상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창의성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존재감을 위협받고 있다.

초개인화 추천과 자동완성 기능에 익숙해진 우리는 그동안 해왔던 탐색, 비교, 검증과 같은 기본적인 사고 과정을 생략하고 있다. 예전이라면, 아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필요한 정보는 검색창을 열어 검색하고, 여러 번 확인하며 신뢰도를 판단했다. 하지만 이제는 AI에게 단어만 알려주면 바로 답이 나온다.

한때 거짓 답을 내놓는 ‘환각(Hallucination)’ 현상에 대한 우려가 컸지만, 그마저 기술적인 보완이 빠르게 진행 중이다. 심지어 AI의 거짓 근거를 판별하는 ‘AI 거짓말 탐지기 앱’까지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더 이상 AI가 내놓는 답에 의심할 필요도 없어졌다. 『트렌드 코리아 2026』에서 언급된 ‘제로클릭(Zero-click)’이 바로 이런 시대상을 설명한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알고리즘 덕분에 검색이 사라진 ‘선택 없는 선택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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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Stockcake

눈 깜빡할 사이에도 변화하는 초고속 환경에서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활동들은 뒤로 제쳐지기 일쑤다. 그와 동시에 어떤 상황에서도 즉각적인 결정을 요구받는 상황이 펼쳐지면서 우리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AI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속도에 치여 놓친 것들, 미처 확인 못한 것들에 대한 불안감마저 높아지면서 자신감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고 결정을 회피하고 싶은 욕망은 커져만 간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AI가 대신 판단해 주는 것에 익숙해지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게 뇌 스위치를 꺼둔 채 AI가 제시하는 안을 그대로 수용하는 인간형을 가리켜 ‘호모 브레인 오프(Homo Brain-off)’라는 신조어까지 탄생했다.

반대로 AI로 인해 기본적인 사고 과정마저 흐릿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AI 사용을 최소화하거나 아예 회피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마치 건강이나 환경을 생각하며 채식을 택하는 것처럼, AI 의존을 줄이고 인간의 사고 능력을 지키려는 움직임을 ‘AI 비거니즘(AI Veganism)’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름은 거창해 보이지만, AI에 의존하지 않는 방법은 다양하고 쉽다. 휴대폰 사용을 줄이는 것도 방법이다. 영상 자동 재생이나 맞춤 추천을 해제하기만 해도 된다. AI가 내놓는 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 번 더 검증하며 사고의 거리를 확보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는 뇌를 깨우는 일인 동시에 여전히 사유의 주체가 인간에 있음을 되새기는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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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Pexels

AI 활용은 영화계에서도 이미 보편적인 흐름이 되고 있다. 이미 AI를 활용한 영화들이 주요 영화제에서 굵직한 상을 수상하면서, 첨단 기술이 제작의 보조자로서 기대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효율을 추구하는 제작 환경에서는 AI 기술의 도입이 불가피해 보이지만, 동시에 창의적 판단과 예술적 감각이 기술에 종속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창의성의 주체성을 잃지 않겠다는 목소리를 내는 창작자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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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넷플릭스 코리아 유튜브 채널

이런 가운데 〈판의 미로〉, 〈셰이프 오브 워터〉 등을 통해 독창적이고 강렬한 작품 세계를 선보인 영화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가 AI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솔직히 드러내 화제를 모았다.

최근 감독은 넷플릭스를 통해 신작 〈프랑켄슈타인〉을 선보였다. 작품은 오스카 아이작, 제이콥 엘로디, 미아 고스 등 화려한 캐스팅과 더불어 감독 특유의 미장센이 더해져 국내외 영화제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중이다. 2025년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부문 및 베니스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으며, 몽환적이고 서정적인 미장센, 실제 특수효과 등이 올해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컴퓨터로 생성한 이미지, 또는 기타 후반 작업 보다 현장에서 직접 구현하는 물리적인 특수효과를 선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제작 과정을 들여다보면,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감독이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하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배우의 특수분장, 배우가 직접 만지거나 상호작용할 수 있는 미니어처, 기계 장치를 부착한 인형 등을 세심하게 제작하고 촬영하는 과정들은 창작의 영혼이 어디서 피어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감독 특유의 미장센은 이런 집요한 노력 과정에서 탄생했으며, 다른 영화보다 현실감이 높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방식의 창작을 고수해온 그가 AI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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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감독은 NPR 팟캐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에서 생성형 AI를 쓰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라고 단언했다. 또한 진짜 위험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오용하게 만드는 인간의 ‘본질적인 어리석음(natural stupidity)’에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 어리석음이 “전 세계 최악의 문제 대부분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라고 강조하며, 첨단 기술을 둘러싼 무분별한 열광과 그 이면에 있는 책임의 부재를 강하게 비판했다.

AI, 특히 생성 AI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앞으로도 관심이 없을 겁니다. 저는 61살인데, 죽을 때까지는 AI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 얼마 전 누군가 제게 이메일을 보내 ‘AI에 대한 당신의 입장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제 답은 아주 짧았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요.’라고요.

기예르모 델 토로

또한 델 토로 감독은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이 기술을 둘러싼 사회적인 관심이 커지고 있는 상황을 프랑켄슈타인의 주인공이 보여준 ‘오만함’에 비유했다. “저는 빅터(프랑켄슈타인)가 지닌 오만함이 어떤 면에서는 테크 업계의 교만한 개발자들과 비슷하길 바랐습니다.”라며 “그들은 일종의 맹목적 상태예요. 결과에 대한 고려 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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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Pexels

감독의 소신 있는 발언에 대중도 또한 호응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미 영혼 없이 무분별하게 양산되는 AI 결과물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에서는 이번 발언을 계기로 창작 과정에서 AI가 가지는 힘과 영향력, 그리고 그 폭력성까지 다시금 들여다보는 토론의 장이 이어지고 있다. 창의적 인물에게는 작품을 만들어가는 모든 과정이 곧 영감의 흐름이며 AI가 이를 무시한다는 비판적인 의견과 더불어 AI가 필수가 되어 가는 시대를 거스를 수 없다는 현실론이 담긴 의견이 분분했다. 여기에 사진이 발명되어도 예술계가 존재하듯, AI와 인간의 창의성이 공존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의견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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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Pexels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지적한 것처럼, AI로 인해 촉발된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잠시 멈춰 이를 정리할 수 있는 순간이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의 과도기에 서 있다. 이를 한 발자국 물러나 바라보면,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성장통의 연장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사회는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시행착오를 겪었으며, 그 과정에서 기술은 인간의 삶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도구로 자리 잡았다. AI 역시 우리의 생활을 더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개선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과 적용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은 기술을 만들어낸 인간이 해결해야 할 숙제다. 기술을 오용하게 만드는 ‘본질적인 어리석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가 기술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맹신도 회피도 아닌, 스스로 판단하고 주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과하지도, 적지도 않은 ‘중용의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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