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레이 ‘회전문’의 직조된 세계

<Man Ray: Revolving Doors Tapestires>전

뉴욕 맨해튼의 한복판, 5번가의 분주함 위에 자리한 보카라Boccara 갤러리에서는 현대미술사의 한 장을 다시 여는 특별한 전시 ‘만 레이: 회전문 태피스트리(Man Ray: The Revolving Doors Tapestries)’가 진행중이다. 사진, 영상, 오브제 등 다양한 매체적 실험으로 널리 알려진 만 레이의 예술 세계 속, 대중에게는 비교적 덜 알려진 태피스트리 작업만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기회로, 이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대규모 회고전과 시기를 함께하며 그동안 잘 조명되지 않았던 섬유예술가로서의 만 레이를 발견하게 해 준다.

만 레이 ‘회전문’의 직조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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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포스터 © Boccara Gallery

이번 전시가 가진 의미는 특별하다. 1916년 종이 콜라주로 시작된 ‘회전문(Revolving Doors)’ 연작이 1973년 파리의 아틀리에 3(Atelier 3)에 의해 태피스트리 형태로 완성된 후 미국에서 ‘완전한 시리즈’로 선보이는 최초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주요 공공 미술관 중 10점 태피스트리 전부를 소장한 곳은 한 곳도 없으며 대부분이 개인 컬렉션에 머물러 있었기에 이번 전시는 학계, 컬렉터, 디자인 연구자들에게도 매우 뜻깊은 기회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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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전경 © Boccara Gallery

만 레이(Man Ray, 1890–1976)는 미국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활동한, 다다와 초현실주의를 잇는 가장 독창적인 실험가다. 회화, 조각, 사진, 디자인, 영화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미지란 무엇인가’를 평생 질문했던 그는 덜 알려졌지만 1920년대부터 꾸준히 장식예술과 텍스타일에도 관심을 두어 왔다.

아방가르드가 장식예술과 결합하던 아르데코 시대의 미학 – 기하학적 형태, 선명한 색채, 대담한 구성 – 을 탐구하던 그는 마치 회화나 사진을 다루듯 직조라는 매체를 하나의 평면 실험으로 바라보았다. ‘회전문’이라는 독특한 제목을 가진 연작은 1916년에 출발됐다. 그는 색지(construction paper)를 잘라 붙여 10점의 콜라주를 만들었고, 직선 대신 색과 면의 충돌, 회전하듯 움직이는 구도, 과도기와 전환의 이미지를 실험했다. 1919년 뉴욕 다니엘 갤러리에서 열린 첫 전시에서, 이 콜라주들은 ‘회전하는 스탠드’ 위에 걸려 관객이 직접 돌려볼 수 있었는데, 이는 오늘날 ‘인터랙티브 전시’의 초기 형태로도 해석된다. 회전하는 이미지, 끊임없는 위치 이동, 구심력과 원심력이 만들어내는 화면의 유희 – 이러한 장치들은 훗날 스텐실, 석판화, 그리고 태피스트리로 이어지는 연작의 다양한 변주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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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레이의 작업실. 뒤에는 태피스트리 디자인 시초 중 하나인 lithographs series가 걸려있다. © Boccara Gallery

‘회전문’ 연작이 다시 태어난 것은 만 레이가 생애 말년을 보내던 1973년, 파리의 아틀리에 3(Atelier 3)와의 협업을 통해서다. 이 공방은 현대미술작품을 태피스트리로 재창조하는 데 특화된 곳으로 당시 세 공동 설립자 – 프레데리크 바샬리, 페터 쇤발트, 미셸 슬라그노피 – 의 손을 통해 평면의 콜라주 작업은 울(wool)이라는 물질, 직조의 결, 두께, 온도를 얻게된다. 조형적으로는 원본의 선명하고 평면적이던 색과 면이 더 큰 스케일 속에서 입체적 깊이를 갖게 되었고, 이는 촉각성을 예술적 요소로 확장하려는 만 레이의 오랜 관심과도 이어졌다. 그는 텍스타일 작업을 통해 이미지가 종이 위에서 느껴지던 속성과 전혀 다른 감각인 촉각적 회화를 구현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당시 각 작품별 단 6점씩만 직조되었으며, 만 레이의 직접 승인 하에 제작된 점에서도 역사적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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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 걸린 태피스트리 Orchestra와 아내 줄리엣의 모습 © Boccara Gallery

이번 전시를 주최한 보카라 갤러리는 뉴욕과 파리를 기반으로 현대, 고전 태피스트리와 공예 협업 프로젝트에 특화된 국제 갤러리다. 피카소, 르 코르뷔지에, 칸딘스키 등 주요 현대미술 작가들의 직조 작품부터 현대 텍스타일 작가 그룹까지 폭넓은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갤러리 대표 디디에 마리앵(Didier Marien)은 지난 10여 년간 아틀리에 3와의 긴밀한 협업을 이어오며 만 레이 태피스트리의 보존, 연구, 전시를 위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만 레이의 추상적 구성은 지각을 흔들고 무한한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아틀리에 3와의 협업을 통해 우리는 이 혁신적 텍스타일 작업이 현대적 맥락에서 다시 평가될 수 있도록 노력해왔습니다.

디디에 마리앵

그렇게 이번 전시는 단순한 작품 소개를 넘어, 텍스타일이 어떻게 현대미술의 독립적 매체가 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중요한 장이기도 하다. 전시에는 다음 10점의 태피스트리가 모두 공개됐다. 모두 1916년 콜라주 디자인을 기반으로 1973년 직조된, 79×59인치(200×150cm)의 대형 작품들이다.

‘만 레이: 회전문 태피스트리Man Ray: The Revolving Doors Tapestries’는 만 레이가 평생 천착해온 이미지의 본질에 대한 연구가 태피스트리라는 물질적 매체에서 어떻게 전화되는지 질문하는 전시다. 그의 사진이 빛으로 기록된 그림자라면 태피스트리는 실로 직조된 빛의 단면이 아닐까. 전시 속 작품들은 회전문처럼 종이와 섬유, 움직임과 정지, 평면과 입체 등 다양한 경계들을 보여주며 전시장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내고 있다. 2025년 겨울 뉴욕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보카라 갤러리를 통해 만 레이가 평생 추구한 예술 실험의 확장을 내보인다. 이 두 전시는 서로를 보완하며 관객에게 완전히 입체적인 만 레이를 경험하게 해 줄 것이다.

Information
만 레이: 회전문 태피스트리(Man Ray: The Revolving Doors Tapestries)
주소 보카라 갤러리Boccara Gallery, 303 Fifth Avenue NY
기간 2025년 11월 5일 – 2026년 2월 1일
웹사이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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