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부터 AI까지, 쓰기를 다시 감각하다
제5회 한글실험프로젝트 〈글(자)감(각): 쓰기와 도구〉
국립한글박물관의 다섯 번째 한글실험프로젝트 전시 〈글(자)감(각): 쓰기와 도구〉는 23팀의 작가와 디자이너의 작품을 통해 ‘쓰기’와 ‘도구’가 만들어내는 글자의 질감을 탐구하는 자리다.

디지털화는 쓰기 도구의 변화를 불러왔다.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서 펜으로 종이에 글자를 쓰는 일은 점차 줄었다. 국립한글박물관의 다섯 번째 한글실험프로젝트 전시 〈글(자)감(각): 쓰기와 도구〉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가 잊어가던 ‘쓰기의 감각’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자리다. 이번 전시는 ‘쓰기’와 ‘도구’가 만들어내는 글자의 질감을 중심으로, 23팀의 작가와 디자이너가 참여한 시각, 공예, 제품, 공간, 미디어아트, 설치 등 다양한 작품을 소개한다.

도입부에 자리한 네 편의 문학 작품이 문을 연다. 김초엽, 김영글, 김성우, 전병근 작가가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롭게 쓴 글은 책이라는 매체를 벗어나 하나의 설치물로 자리한다. 종이와 활자의 물성이 전면에 드러나며, 디지털 환경 속에서 희미해진 물리적 읽기 경험을 되살린다. 글을 메시지가 아닌 하나의 물질로 마주하게 하는 장면이다.

도입부를 지나, 전시는 도구와 쓰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따라 이어진다. 한동균의 다큐멘터리 ‘마음 쓰이는 쓰는 마음’은 필사, 일기, 창작의 장면들을 기록하며 ‘왜 우리는 여전히 손으로 무언가를 쓰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연필과 만년필, 노트, 잉크 같은 아날로그 도구들이 단순한 기능을 넘어 개인의 정서와 기억을 연결하는 순간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마음 스튜디오의 ‘함께 쓰는 즐거움’은 쓰기를 함께하는 경험으로 바라본다. 글쓰기 도구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글자로 쓰는 순간, 그 과정 자체가 관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BKID의 ‘쓰고, 그리고, 사유하기’는 쓰기를 사고의 흐름과 닿아 있는 행위로 해석한다. 이들은 17개의 새로운 연필 도구를 제작해 손의 압력과 제스처가 사유의 방식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실험했다. 도구의 형태에 따라 생각의 흐름까지 미묘하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전시 후반부에서는 인공지능(AI)을 포함한 새로운 기술이 쓰기 방식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박제성의 ‘자간’은 글자 사이의 간격이라는 기본적인 요소를 AI와 함께 재해석한다. 간격의 변화가 문장의 호흡과 분위기를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준다. 박윤형의 ‘데이터의 유물: 임의의 반경의 원’은 비인간적 시선이 만들어낸 기록을 다루며 ‘기록의 주체는 반드시 인간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건넨다. 조영각의 ‘기획향’에서는 로봇 팔과 인공지능이 수행하는 쓰기를 통해 인간과 기술 사이의 협력적 관계를 실험한다. 도구가 손에서 멀어질수록 오히려 ‘쓰기의 본질’이 선명해지는 역설적인 감각이 남는다.



이번 전시가 흥미로운 지점은 ‘도구’를 기술의 진화 과정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전시는 도구를 하나의 감각 기관처럼 다룬다. 손으로 무언가를 쓰는 순간, 생각과 감정, 몸의 움직임까지 함께 기록된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동시에 AI라는 새로운 도구가 등장한 시대에 인간의 사유와 표현이 앞으로 어떻게 확장하거나 변형될 수 있는지 질문한다. 과장된 미래 서사나 기술적 환상 대신 지금 우리가 잃어가는 감각과 새롭게 얻는 감각을 균형 있게 바라보도록 이끈다.

한글실험프로젝트는 지난 10년 동안 한글을 둘러싼 다양한 실험을 이어왔다. 초기에는 문자 자체의 조형과 의미를 중심으로 탐구했지만, 점차 ‘쓰기’라는 행위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까지 영역을 확장해 왔다. 이번 전시는 그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글자를 쓰는 일, 기록하는 일, 말과 생각을 남기는 일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한 자리에서 조망할 수 있다.

전시가 열리는 문화역서울284 RTO 역시 인상적이다. 오래된 건축의 질감은 ‘쓰기’라는 본질적이고 사적인 행위를 한층 더 집중하게 만든다. 설치물과 영상, 공간의 어두운 톤이 서로 얽히며 글쓰기의 물성과 감각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전시는 우리가 오래전부터 해온 ‘쓰기’라는 행위를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손에 쥐는 연필에서 알고리즘을 따라 움직이는 기계까지, 도구의 변화는 곧 우리의 인식과 감각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번 전시는 그 변화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