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거장 이우환, 독일 ‘볼프강 한 미술상’ 수상

제32회 볼프강 한상(Wolfgang Hahn Prize)’ 수상자는?

제32회 볼프강 한상 수상자로 이우환이 선정되었다. 모노하와 단색화를 이끈 그는 점·선·여백을 통해 존재와 관계를 사유하며, 자연 소재와 공간의 관계를 탐구해 동서양을 잇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온 작가로 평가받는다.

현대미술 거장 이우환, 독일 ‘볼프강 한 미술상’ 수상

쾰른 대성당으로 잘 알려진 독일 쾰른 시에는 독일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관 중 하나인 ‘루트비히 미술관(Museum Ludwig)’이 있다. 이는 현대미술 수집가였던 루트비히 부부가 350점의 작품을 쾰른 시에 기증한 것을 계기로 설립된 미술관이다. 시는 이들이 모은 1900년 이후 제작된 방대한 작품들을 전시하기 위해 별도의 독립적인 미술관을 건립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쾰른 건축가 페터 부스만(Peter Busmann)과 고드프리트 하베러(Godfrid Haberer)가 설계를 맡았고, 미술관은 1986년에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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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쾰른 관광청 홈페이지

쾰른의 대표 관광지 바로 옆에 위치한 이 미술관은 독특한 지붕 디자인을 비롯한 조형적인 외관으로 눈길을 끄는 동시에 20세기와 현대미술의 주요 흐름을 대표하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덕분에 쾰른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명소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쾰른과 현대미술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루트비히 미술관을 눈여겨봐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미술관을 후원하는 근대미술협회(Gesellschaft für Moderne Kunst)가 매년 우수한 현대미술가에게 ‘볼프강 한 상(Wolfgang Hahn Prize)‘을 수여하기 때문이다.

볼프강 한상(Wolfgang Hahn Prize)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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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루트비히 미술관 홈페이지

이 상은 쾰른에서 활동했던 수집가이자 회화 보존가였던 볼프강 한(Wolfgang Hahn)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는 유럽과 미국의 아방가르드 예술을 소개하고 보존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근대미술협회의 창립 멤버로서 루트비히 미술관의 작품 보존에 헌신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제정된 볼프강 한 상은 매년 세계 각지의 뛰어난 현대미술가 중 한 명에게 수여한다. 상을 받는 이에게는 최대 10만 유로의 상금이 수여되며, 루트비히 미술관의 작품 소장 및 개인전과 출판물 발간 기회가 함께 부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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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상인만큼, 후보 선정 기준은 엄격한 편이다. 작가가 예술적 경향을 꾸준히 발전시켜 온 동시에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독일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어야 하며 루트비히 미술관이 아직 해당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도 포함된다. 루트비히 박물관 관장, 근대미술협회 이사회 구성원, 그리고 객원 심사위원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은 풍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매년 수상자를 선정한다.

이런 기준에 따라 매해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작가들이 볼프강 한 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어 왔다. 1994년 제임스 리 바이어스(James Lee Byars)가 첫 수상자가 된 이후, 신디 셔먼(Cindy Sherman, 1997년), 피필로티 리스트(Pipilotti Rist, 1999년), 피터 도이그(Peter Doig, 2008년), 케리 제임스 마셜(Kerry James Marshall, 2014년) 등이 수상의 영광을 얻었다.

볼프강 한 상, 역대 수상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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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근대미술협회 홈페이지

한국 작가로는 양혜규 작가가 2018년에 수상의 영광을 얻으며 국내외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서울과 베를린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작가는 동시대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블라인드와 같은 일상적인 사물을 재료로 삼아 빛, 바람, 향기, 소리 등을 투과하는 설치 작업이 대표적이며, 익숙한 오브제를 낯설고 새로운 감각의 경험으로 전환하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주목 받아 왔다. 작가는 볼프강 한 상 외에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싱가포르 비엔날레의 베네세상 등을 수상하며 국제적 위상을 공고히 했다. 또한 세계 여러 주요 미술관의 전시에서 작품이 꾸준히 소개되고 있다.

당시 심사위원이자 하노버 케스트너 협회 관장인 크리스티나 베흐(Christina Végh)는 “그녀는 세계화된 세상 속에서 모순되고 때로는 상충하는 세계관들을 서로 대립시키지 않고 관계 속에 배치합니다.”라며 “일상생활에서 가져온 산업적으로 생산된 오브제들을 본래의 기능에서 분리하여 대규모의 새로운 형태로 결합시킵니다. 이러한 정교한 배치는 동서양의 문화적 코드가 나란히, 그리고 서로 대화하는 추상적인 새로운 구조로 변모하며, 독특한 고대적 요소가 드러나게 합니다.”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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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근대미술협회 홈페이지

지난해에는 회화, 영상,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동서양의 미학을 교차시켜 온 아티스트 에블린 타오청 왕(Evelyn Taocheng Wang)이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어 올해 11월 7일에 루트비히 미술관에서 그녀의 작품이 공개되어 이목을 끌었다. 객원 심사위원 수잔 티츠(Susanne Titz)는 “전통적인 중국 서예와 회화 기법을 사용하여 제작된 그녀의 드로잉은 서양 문화에 대한 비평을 담고 있으며, 틀에 얽매이지 않고 들어본 적 없는 사적인 시처럼 친밀한 느낌을 자아냅니다.”라며 “에블린 타오청 왕은 이주민으로서, 성적인 존재로서, 일상생활을 경험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문화적 소양을 갖춘 사람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작품에 녹여내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습니다.”라고 평했다.

2026년 볼프강 한 상 수상자, 현대미술가 이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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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렌티움’에 선 이우환 작가, 2025, 사진 이재안, 호암미술관 제공

그리고 최근 제32회 볼프강 한상의 수상자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어 화제가 되었다. 이번 수상의 주인공은 바로 한국미술계의 거장 ‘이우환’이다. 그는 1960년대 후반에 일어난 일본의 전위미술 운동인 ‘모노하(物派)’와 197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흐름인 ‘단색화’를 이끈 인물이다. 이를 통해 동서양을 잇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온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작은 점과 선의 철학적 리듬을 표현한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시리즈와 더불어 여백과 관계성을 강조한 ‘조응’ 등이 있다. 종이, 돌, 나무와 같은 자연 소재들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여 물질성을 부각시키고, 사물들이 위치한 공간과의 관계에 대해 주목하는 그의 작품은 서양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에 대한 동양적 해석으로 인정받아 왔다.

올해의 객원 심사위원을 맡은 마미 카타오카 도쿄 모리미술관 관장은 “이우환은 1970년대 독일에서 열린 여러 전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세계 무대에 오르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왔습니다.”라며 “60년에 걸친 그의 작업 여정 전반에 걸쳐 그는 서구 모더니즘을 따르거나 동양의 영적 전통에 머무르지 않고, 동서양을 초월하는 모든 관계 속에서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탐구해왔습니다.”라며 선정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작품은 2026년 11월 7일부터 2027년 4월 4일까지 루트비히 미술관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한편, 세계적인 상을 받은 작가의 신작을 미리 만나볼 기회는 이미 우리에게 열려 있다. 호암미술관은 지난 10월 28일부터 전통정원 희원 내에 작가의 신작을 만나볼 수 있는 전시 <실렌티움(묵시암)>을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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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렌티움(묵시암), 2025, 철판, 자연석, (철판) 320 x 370 x 7cm, (자연석) 91 x 91 x 115cm © Lee Ufan 사진 김상태 이미지 제공 호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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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돌정원’ 전경, 2025 사진 김상태 이미지 제공 호암미술관

이어 호암미술관 옆 옛돌정원 부지에 ‘이우환 미술관’이 설립될 계획도 공개되어 더욱 주목을 받았다. 현재 이곳에는 철과 돌을 매개로 문명과 자연의 조화를 탐구한 이우환의 대형 조각 3점이 먼저 설치되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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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항– 만남’, 2025, 스테인리스 스틸, 자연석, 자갈(스테인리스 스틸), Ø500 x 200cm © Lee Ufan 사진 김상태 이미지 제공 호암미술관

새롭게 들어설 이우환 미술관의 설계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표 전시공간 ‘사유의 방’을 설계했던 최욱 원오원 아키텍츠 대표가 맡았다. 이곳에 관련된 더 흥미로운 소식은 공간의 디자인이 이우환이 직접 연필로 그린 스케치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건축가에 따르면 사각형 두 개를 모아놓은 듯한 단면이 포함된 간단한 스케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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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항– 튕김’, 2025 스테인리스 스틸, 자연석, 자갈, (스테인리스 스틸) 283 x 80 x 248(h)cm (자연석) 70 x 50 x 62(h), 60 x 45 x 60(h)cm © Lee Ufan 사진 김상태 이미지 제공 호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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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항– 하늘길’, 2025, 스테인리스 스틸, 자연석. (스테인리스 스틸) 1000 x 120 x 2cm (2pcs) (자연석) 90 x 125 x 115(h), 125 x 100 x 110(h)cm © Lee Ufan 사진 김상태 이미지 제공 호암미술관

이를 기반으로 사물과 사물의 만남을 중시하는 예술가의 감성이 녹아들 이 공간은 관람객이 그의 작품 세계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2029년 완공을 목표로 한 이 미술관은 일본 나오시마, 부산, 프랑스 아를에 이어 그의 이름을 내건 네 번째 공간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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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우환 인스타그램

루트비히 미술관의 볼프강 한상 수상 소식은 현대미술계에 새로운 감각을 제시해 온 한 작가의 여정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2026년 수상자인 이우환은 동서양의 경계를 넘나들며 미술계의 흐름을 이끈 인물로, 그의 수상은 한국 현대미술이 세계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다시 확인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운 좋게도, 세계 무대가 주목하는 그의 작업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먼저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호암미술관의 신작 전시에서부터 2029년 완공을 목표로 한 이우환 미술관까지, 그의 조형 세계는 앞으로 우리 일상 가까이에서 더욱 깊이 자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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