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매개로 한 도시 속 유희, 아사시

배재희 디렉터 인터뷰

을지로의 낡은 건물 4층, 특별한 찻집이 숨어 있다. 낮에는 차, 밤에는 칵테일을 내는 아사시다.

차를 매개로 한 도시 속 유희, 아사시

매일 새로운 찻집이 생겨나고 티 오마카세나 티 바 같은 단어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요즘. 차 문화는 세밀한 취향을 증명하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을지로의 낡은 건물 4층, 특별한 찻집이 숨어있다. 낮에는 차, 밤에는 칵테일을 내는 블렌드 티 바 ‘아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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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구에서 바라본 아사시 공간 전경 © ASASI

지난해 11월 문을 연 아사시는 낮과 밤, 결이 다른 시간을 제안한다. 도시의 분주함과 대비되는 고요한 분위기, 정교하게 설계된 공간과 가구, 동서양의 경계를 넘나드는 메뉴. 이 모든 감각은 어디에서 비롯했을까. 아사시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배재희 디렉터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Interview

배재희 아사시 디렉터
블렌드 티 바 ‘아사시’를 이끌고 있다. 이탈리아어를 전공하고 현지에서 유학 시절을 보냈다. 아사시를 오픈하기 전, 오랜 시간 브랜딩과 디자인 분야에서 에디터이자 기획자로 활동하며 브랜드의 서사를 구축하는 일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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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희 디렉터 © ASASI

무형의 언어가 공간이 되기까지

아사시를 열기 전 어떤 일을 해오셨나요?

브랜드 기획자이자 에디터로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최근에는 고혁준 디자이너와 함께 컴포즈 커피의 전체 리브랜딩을 A부터 Z까지 전담하며 지금의 시스템을 구축했고요. 병원을 비롯한 여러 브랜드의 포지셔닝과 언어적 세계관을 정립하는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언어로 세계관을 쌓는 일에서 직접 공간을 만드는 일로 확장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어느 순간 이 일이 저라는 사람을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를 설명해 주는 배경을 모두 걷어내면 무엇이 남을까’라는 질문에 닿았죠. 저만의 고유한 콘텐츠가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기술과 AI가 인간의 많은 영역을 대체하는 시대일수록 우리가 직접 겪는 물리적인 경험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좋은 음악을 들으며 정성스럽게 내린 음료 한 잔에 집중하는 시간처럼요. 제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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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와 참기름 호지차 크림 라떼 © ASASI
여러 선택지 중에서 최종적으로 ‘차’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결정적 계기 중 하나는 제주 브랜드 ‘코코하’의 리브랜딩 작업이었어요. 카카오 빈이라는 재료가 다뤄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실질적인 재료를 직접 만지는 일에 흥미를 느꼈어요. 텍스트 같은 무형의 가치를 다듬는 작업도 좋지만 한편으로는 손에 쥘 수 있는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물성의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재료에 대한 탐구가 모여 자연스럽게 ‘티 브랜드’에 닿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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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시 로고는 ‘A’에서 시작해 다시 ‘I’로 돌아오는 구조다. 아사시 브랜드가 개인(I)로부터 시작해 다시 개인에게로 귀결된다는 의미가 담겼다. © ASASI
‘아사시’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이름인가요?

처음부터 이 공간을 위해 지어둔 이름은 아니었어요. 회사에 다니고 프리랜서로 일하던 시절부터 “언젠가 내 브랜드를 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거든요. 그러다 7년 전 꿈에서 우연히 ‘아사시’라는 단어를 발견했죠. 일본어처럼 느껴져 검색해 봤더니 인도네시아어로 ‘근원’과 ‘질서’를 뜻하더라고요. 어떤 형태가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의미가 좋아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온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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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희 디렉터 © ASASI
그동안 다양한 브랜드의 서사를 구축하셨지만, 디렉터님의 공간을 만들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이 있다면요?

브랜드 디자인에서 전략적인 결정이 전부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하지만 개인이 만드는 브랜드라면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와 이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외부 환경은 계속 변하지만 ‘나’라는 중심은 쉽게 흔들리지 않으니까요. 아사시를 만들 때도 완벽하게 짜인 계획에 의존하기보다 작업 과정에서 마주하는 불확실성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고자 했어요. 다만 제 자신이라는 중심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했습니다.

낯설지만 기분 좋은 블렌드

‘차’의 개념을 아사시는 다른 시선으로 풀어내는 것 같아요.

아사시에서는 격식을 차려야 하는 귀한 차보다 일상에서 물처럼 마실 수 있고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차를 지향해요. 잎차뿐 아니라 열매나 뿌리를 활용한 대용차까지 차의 범위는 무궁무진하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 차가 사람들의 일상 속에 편안하게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낮과 밤을 나누어 운영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에요. 이런 방식을 택한 이유가 있나요?

아사시는 ‘블렌드(Blend)’라는 개념에서 출발한 공간이에요. 익숙한 재료를 새롭게 조합해 차와 칵테일의 경계를 넘나드는 음료를 선보이고 있죠. 과거 커피 리브랜딩 작업을 하며 ‘블렌드와 싱글 오리진의 관계’를 깊이 고민했던 경험이 있는데, 그 탐구가 차를 배우는 과정으로도 이어졌어요. 차를 베이스로 우유나 술을 섞어 새로운 맛을 창조하듯, 공간의 운영 역시 상반된 두 시간대를 블렌딩하고 싶었습니다. 낮과 밤이라는 다른 시간 속에서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머무는 장면을 상상하며 지금의 운영 방식을 구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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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즐링 경주 법주와 김스낵. 김스낵은 트러플 소금과 치즈를 더해 익숙하면서도 낯선 맛의 변주를 더했다. © ASASI
메뉴 전반에 ‘블렌드’라는 개념이 긴밀하게 연결된 느낌이에요. 어떤 기준으로 메뉴를 구성했나요?

대부분 저의 개인적인 취향과 경험에서 출발했어요. 한 가지 맛을 그대로 구현하기보다 서로 다른 요소를 섞었을 때 생기는 변화에 더 흥미를 느끼는 편이에요. 어릴 때 어머니가 보리나 옥수수, 결명자 같은 재료를 섞어 차를 끓여주셨던 기억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었고요. 동서양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에도 집중했습니다. 이탈리아식 판나코타에 한국적인 도토리를 더하거나, 제사상에 오르는 법주와 서양의 다즐링 홍차를 조합하는 식이죠. 전통적인 티 하우스나 바와는 다른 아사시만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오픈 이후 반복해서 찾는 단골들이 꽤 많다고요. 기억에 남는 피드백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한번은 어느 손님께 이름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드렸더니 이런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이성과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무의식의 단어로 출발한 이 공간이 마치 다른 세계로 통하는 탈출구 같다”고요. 제가 아사시를 통해 전하고자 한 바를 오롯이 느껴주신 것 같아 정말 기뻤습니다. 저 역시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힘들 때마다 좋아하는 공간에 머무는 짧은 시간들로 버텨왔거든요. 지금은 사라졌지만 10년 가까이 찾던, 창 너머로 인왕산이 보이던 곳이 있었습니다. 아사시를 만들며 그 공간을 자주 떠올렸어요. 이번에는 제가 누군가에게 그런 장소를 내어주고 싶었습니다. 저마다의 고독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곳으로요.

무용하기에 아름다운 공간

아사시는 배재희 디렉터가 추구하는 ‘낯설지만 기분 좋은 것’을 실체화한 프로젝트다. 이곳의 모든 요소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아 있다. 기계적인 공정 대신 인간이 직접 만들던 시대의 낭만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간 디자인팀 아세티크를 주축으로 CNTD의 시공, 조용무 작가의 가구, 김민선 세라미스트의 월 램프까지. 개인의 탐구에서 출발한 공간 위로 여러 창작자의 시선이 겹겹이 쌓이며 아사시만의 독보적인 분위기를 완성했다.

을지로의 낡은 건물, 그것도 간판 없는 4층에 자리를 잡으셨어요.

을지로는 1950~60년대의 오래된 건물부터 가장 새로운 풍경까지 다양한 시간과 문화가 중첩된 동네예요. 아사시가 추구하는 ‘블렌드’와 맞닿는 지점이 많다고 느꼈죠. 분주한 도심 한가운데서 낮에는 여유롭고 한적한 쉼을, 해가 지면 도시의 저녁다운 무드를 제안하고 싶었습니다. 4층이라는 위치 역시 같은 맥락이에요. 손님들에게 발견하는 기쁨을 전하고 싶었거든요. 낡은 건물의 계단을 오르며 잠시 망설이다가 예상치 못한 공간을 마주하는 순간이죠. 그래서 외부에 간판을 따로 달지 않고 건물 입구 벽면에만 작은 단서들을 남겨두었습니다. 공간을 찾아오는 여정부터 아사시의 경험이 시작되길 바랐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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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시 공간 전경 © ASASI
공간 디자인을 맡은 아세티크와 공유한 미학은 무엇이었나요?

‘무용하기에 아름다운 것’에 대한 공감대였어요. 대화의 출발점은 1920년대 아르데코 양식이었습니다. 아르누보의 유려한 곡선과 대비되는 직선의 강렬함, 기하학적인 비례와 균형 속에서 인간이 본능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미학을 공간에 담아보고 싶었죠. 공간을 구상할 때 그 안에 머물 인물들의 모습도 함께 그렸어요. 그들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해서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들에서 영감을 받았고요.

아사시의 아이덴티티에 영감을 준 대상이 있다면요?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에요. 설계자 사후에도 공사가 계속되는 모습을 보며, 완성된 결과보다 여전히 지어지고 있는 ‘과정’ 자체를 사람들이 함께 바라보고 감탄한다는 점이 인상 깊었거든요. 성당 내부에 예수의 행적을 설명 대신 숫자의 조합인 마방진으로 풀어낸 신비로운 장치들도 매력적이었고요. 그런 과정의 즐거움을 형상화한 것이 지금 아사시의 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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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작업 스툴과 빈티지 스피커. 이 밖에도 공간 전반에 사용된 다채로운 수종이 어색함 없이 어우러진다. © ASA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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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로운 우드톤을 차분하게 정돈하는 아사시의 바닥은 독일에서 항공으로 공수한 카펫이다. 파랑과 보라 등 여러 색실이 섞인 블렌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 ASASI
로고부터 가구 디테일까지, 공간 곳곳에 ‘검은 사각형’이 반복해서 등장해요. 이 형태는 어떤 맥락에서 시작됐나요?

아르데코 디자이너들의 가구를 저희 나름대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흑단의 사각형’이라는 조형 언어가 도출됐어요. 흥미로웠던 건 공간 팀과 로고 디자이너가 따로 작업했는데도 로고와 좌석 모두 아홉 개의 검은 사각형으로 맞아떨어졌다는 점이에요. 완벽하게 의도된 설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기분 좋은 우연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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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모든 가구는 아세티크와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캐비닛 메이커’ 조용무 작가의 작품이다. © ASASI
공간에서 가장 큰 인상을 차지하는 요소가 기둥이에요. 구조적인 기능을 전제로 하는 기둥을 아사시에서는 어떤 관점으로 해석했나요?

아사시의 기둥은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지 않아요. 기능하기보다 ‘무용하기에 아름다운 것’으로 존재하길 바랐습니다. 이 공간이 신전처럼 성스러운 분위기를 지니길 원했어요.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독립적으로 서 있을 때, 기둥은 구조물이 아닌 일종의 신화적인 상징이 된다고 생각했죠. 상업 공간에서는 흔히 시도하지 않는 상상력을 구현해보고 싶었고요. 그런데 막상 운영해보니 이 기둥이 손님들 사이에서 심리적인 가림막 역할을 하고 있더군요. 혼자 방문한 분들이 유독 기둥 근처 자리를 선호하세요. 기둥이 공간 안에서 새로운 기능을 부여받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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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용도의 선반부터 입장 경험을 완성하는 문과 문틀에 이르기까지, 경첩의 작동 방식과 이음새의 디테일 하나하나에 ‘아사시다움’을 향한 디자인팀과 작가의 고민이 담겨 있다. © ASASI
보통의 상업 공간에서는 테이블을 나눠 배치하는 경우가 많죠. 아사시에서는 하나의 큰 테이블을 선택했어요.

저와 손님 사이의 거리, 그리고 이 테이블이 공간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고민했어요. 처음부터 이곳에서 다양한 활동이 일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거든요. 일종의 ‘무대 장치’로서 테이블이 필요했습니다. 작은 테이블이 흩어져 있는 구조보다 하나의 큰 테이블을 공유하는 방식이 더 적합하다고 느꼈죠. 또 보통의 바처럼 운영자와 손님이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되면 서로를 계속 의식할 수밖에 없어요. 필요한 동선이 확보될 만큼 테이블을 벽 쪽으로 밀어 의도적인 거리감을 만들었습니다. 저와 손님 사이의 접점을 최소화해 각자의 시간에 더 깊이 집중할 수 있길 바랐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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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TD의 섬세한 시공으로 벤자민 무어 페인트를 세 번 덧칠해 완성한 벽면. 벽지를 바른 듯 완벽한 질감으로 공간의 정제된 인상과 완성도를 더했다. © ASASI
시각적 요소만큼이나 귀에 닿는 사운드도 섬세하게 느껴져요. 오디오 구성에도 공을 많이 들이신 것 같아요.

아사시의 사운드 시스템은 1960~70년대에 제작된 탄노이 ‘채스워스’ 스피커와 마란츠 7, 8B 앰프로 구성되어 있어요. 빈티지 오디오는 소리가 충분히 잘 들리면서도 과시하지 않고 부드럽게 스며드는 매력이 있죠. 이 공간에서는 오래 머물러도 귀가 지치지 않는 소리를 들려드리고 싶었어요. 요즘은 음악조차 너무 쉽게 소비되는 시대잖아요. 조금 불편하더라도 그것이 처음 만들어졌던 방식 그대로를 경험해보는 일은 여전히 중요해요.

공간 브랜딩을 업으로 해오셨기에 직접 디자인하고 기획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여러 팀과 협업을 선택한 이유와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둔 기준이 궁금해요.

아사시의 상상력을 제 안에서만 완결 짓고 싶지 않았어요. 혼자서 만들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분명하다고 느꼈거든요. 함께 작업하는 분들께 ‘완전히 해석되지 않는 미스터리’를 남겨달라고 요청드렸어요. 조명, 가구, 시공 각자의 시선과 비밀이 공간 안에 숨어 있기를 바랐죠. 그런 요소들이 모여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사시만의 묘한 기운을 만들어주기를 기대했어요. 협업 기준은 분명했어요. 아름다움 이전에 상업 공간으로서의 기능이었습니다. 적은 요소를 얼마나 완벽하게 구현하느냐가 관건이었죠. 아사시는 겉보기엔 단순해 보이지만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 수직과 수평을 바로잡는 기초 작업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거든요. 아세티크의 실용적인 감각과 CNTD의 정교한 시공이 밑바탕이 되었기에 아름다운 공간을 쓸모 있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 속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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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내릴 때 가장 자주 손이 가는 주전자. 일본 무형문화재 공방 교쿠센도의 작품이다. 사용할수록 청록빛이 사라지고 황동색으로 변한다. 아사시와 함께 시간을 쌓아가는 오브제. © ASASI
티 바를 운영하지 않는 날엔 주로 어떤 일과를 보내시나요?

일주일 중 월요일 하루를 온전히 개인적인 시간으로 보내고 있어요. 최근에는 웹진에 고정 칼럼을 기고하고 있는데요. 조지아 오키프부터 아키 카우리스마키까지 저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에 대해 매주 한 편씩 글을 쓰는 데 집중합니다.

인스타그램과 스레드에 세상의 다양한 아름다움에 대해 기록하고 계시죠. 디렉터님에게 ‘기록’은 어떤 의미인가요?

오랜 시간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어요. 이성이나 효율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각들이 분명히 존재하잖아요. 그런 질문들에 스스로 답을 내리고 정리하기 위해 기록을 시작했습니다. 무용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것들, 그 대상을 천천히 들여다보며 쌓아온 시간이 결국 아사시라는 브랜드를 만드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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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희 디렉터 © ASASI
아사시가 오래도록 지속되기 위해 지키고자 하는 태도나 가치가 있나요?

타인의 브랜드를 기획할 때는 늘 5년, 10년 후의 목표를 묻곤 했어요. 그런데 정작 제 브랜드를 운영해 보니 미래는 생각보다 훨씬 불확실하더라고요. 그래서 먼 계획보다는 현재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은 때로 시지프의 노동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비슷한 하루를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럼에도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한 인간으로 상상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저 역시 일상의 굴레 속에서 찰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태도를 잃지 않으려 합니다.

앞으로 아사시는 어떤 방향으로 확장될까요?

개인적인 경험과 열망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될 것 같아요. 다만 2호점 같은 물리적인 확장보다 지금의 공간을 매개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해외 예술가나 DJ와의 협업, 책과 관련한 프로그램도 구상 중이고요. 잡지를 오랫동안 좋아해 온 사람으로서 오늘날의 라이프스타일을 다루는 아사시만의 매체를 만들어보고 싶기도 합니다. 2026년에는 이런 기획들을 하나씩 실행에 옮겨보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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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성복 브랜드 pan과 협업해 제작한 숍코트. 1960~70년대 유럽의 작업복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goeasygohard
아사시가 사람들에게 어떤 공간으로 기억되길 원하나요?

아주 고전적인 공간 경험을 전하고 싶어요. 오래됐지만 좋은 음악을 듣고, 음료를 마시고, 책을 읽으며 보내는 시간. 저는 그런 순간을 ‘도시 속의 유희’라고 불러요. 개인적으로 라벨의 「물의 유희」를 좋아하는데요. 물의 일렁임과 반짝임을 유려하게 그려낸 그 곡처럼, 아사시도 누군가에게 낭만적인 유희의 공간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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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희 디렉터 © ASASI
아사시를 나서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곡이 있다면

팻 매스니의 ‘Last Train Home’. 비 오는 날 아사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 곡의 앨범 커버가 떠올랐어요. 빗물에 젖은 유리창 너머로 겹쳐 보이는 신호등과 도시의 불빛이 그 앨범의 이미지와 무척 닮아 있었거든요. 이 곡을 들으면 하루를 마친 사람들이 쓸쓸하면서도 다정한 마음으로 귀가하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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