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리버드 티켓] 실리콘밸리 빅테크의 K-디자이너들

SHARE X INSIGHT OUT 3RD

기술과 자본, 수많은 인재가 모여 일하는 곳, 실리콘밸리. 그리고 그 한복판에서 매일 자신의 역할을 증명하며 커리어를 이어가는 한국인 디자이너들이 있다. 이들이 마주한 고민과 결정의 과정은 지금의 디자인 환경을 읽는 또 하나의 단서가 된다. 이에 월간 〈디자인〉과 디자인 교육 전문 플랫폼 SHARE X는 세 번째 ‘SHARE X INSIGHT OUT’을 통해 이들의 목소리를 모으기로 했다. 오는 2월 6일 열리는 콘퍼런스에 앞서, 실리콘밸리 빅테크 기업에서 일하는 네 명의 디자이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얼리버드 티켓] 실리콘밸리 빅테크의 K-디자이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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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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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그륜

뉴미디어와 테크놀로지를 결합한 비주얼 언어를 탐구한다. 타이틀 시퀀스 전문 스튜디오 엘라스틱에서 HBO Max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작업으로 에미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애플에서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ytok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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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교

프로덕트 디자인과 조직 문제를 넘나들며 서비스와 팀의 구조를 함께 설계해왔다. 리프트와 메타를 거쳐 현재 페이팔에서 디자인 디렉터를 역임 중이다. @thekyo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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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박

기술과 디자인의 접점에서 시스템과 맥락을 설계한다. 구글을 거쳐 현재 마이크로소프트 AI에서 조직의 비전과 프로덕트 경험을 다루는 프린시플 디자인 디렉터를 역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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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킴

인문학을 바탕으로 한 개념적 사고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브랜드와 프로덕트의 레거시를 정립한다. 2×4, Wax Studios, 와이든 앤 케네디, 나이키, 니드 등에서 스튜디오, 에이전시, 인하우스, 스타트업을 넘나들며 다양한 산업과 환경을 경험했고, 오픈AI에서의 실무 경험을 거쳐 현재는 구글 랩스에서 UX 디자이너로 AI 프로덕트와 브랜드를 설계하고 있다. @phillip.windly


실리콘밸리 입성기

실리콘밸리에 뿌리를 내린 계기는 천차만별이다. 누군가는 우연에 가까운 선택으로, 누군가는 반복된 실패 끝에, 또 다른 이는 예상치 못한 기회를 따라 이곳에 도달했다. 출발선은 달랐지만,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불확실성을 선택하며 지금의 삶에 이르렀다.

데이빗 박 중학교 3학년 때 유학 생활 차 혼자 미국에 왔다. 아트센터에 진학하며 디자인에 뜻을 품었는데, 배움의 속도와 방식에 대한 고민 끝에 결국 학교를 중퇴하고 직접 현장에서 부딪히며 성장하는 길을 택했다. 기술의 변곡점마다 불확실한 영역을 선택해오며 디자인을 지속해왔다.

필립 킴 대학을 마치고 바로 미국으로 취업을 하러 왔다. 시민권자라 취업 과정이 비교적 수월한 편이었고, 한국에서 배웠던 경험을 미국에서 잘 활용할 수 있었다. 그 연장선에서 커리어를 이어가게 됐다.

김그륜 사실 처음부터 미국행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그저 ‘미래에 필요한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인터랙티브 아트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인터랙티브 아트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가장 난이도 있고 스토리를 많이 넣을 수 있는 3D 모션 그래픽에 입문하게 됐다. ‘자이언트 스탭’에서 커리어를 쌓던 중 ‘타이틀 시퀀스’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 각종 TV쇼의 인기와 더불어 재차 관심을 받던 시기였다. 한국에는 이를 전문으로 다룰 환경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미국에선 할리우드와 탄탄한 연결고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더 나은 작업 환경을 찾아 미국행을 결정했고, 타이틀 시퀀스 전문 제작 회사인 엘라스틱에 입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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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그륜이 작업한 CJ ENM 모션 그래픽.

김영교 나에게 미국행은 일종의 도피였다. 미국에 오기 전의 나는 방랑자 같았고, 실패자처럼 느껴졌다.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미국행 티켓을 끊었다. 미국에 도착한 뒤에는 닥치는 대로 인턴 자리에 지원했다. 대략 300번쯤 지원과 낙방을 거듭한 끝에 부동산 플랫폼 질로우Zillow에 합격했다. 하지만 합격이 끝은 아니었다. 언어가 문제였고,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이 시기에 내 팔뚝에 실리콘밸리 지도를 문신으로 새겼다. 내가 일한 회사를 하나씩 표시해가며, 보물을 찾는 지도처럼 생각했다. 그렇게 리프트Lyft와 메타를 거쳐 지금의 페이팔까지 오게 됐다.

데이빗 박 구글 입사 초기, 비정규직(TVC)에서 정규직(FTE)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기억에 남는다. 이는 단순한 신분 변경이 아니라, 평가 메커니즘이 바뀌는 경험이었다. 에이전시나 비정규직 시절에는 ‘완성된 크래프트’가 증명의 대상이었다면, 정규직 전환 인터뷰에서는 ‘문제 해결의 논리’와 ‘조직 적합성’을 처음부터 다시 입증해야 했다. 포트폴리오를 재정의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었다.

필립 킴 사실 미국에 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매 순간 쉽다고 느낀 적이 없다. 다만 나는 비교적 빠르게 흐름을 타는 편이었다. 처음에는 에이전시에서 디자인 역량을 쌓았고, 이후에 창업도 경험했다. 마케팅에 관심이 생겨 광고 회사 와이든 앤 케네디에서 브랜드 디자인을 맡기도 했다. 이후 AI가 막 태동하던 시기에 이를 활용하는 스타트업에서 일하며 자연스럽게 프로덕트 디자인으로 넘어왔다. 개인적으로 브랜드 디자인이 논술에 가깝다면, 프로덕트 디자인은 수학에 가깝다고 느꼈다. 문제를 정의하고, 구조를 이해하며 하나씩 풀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런 경험들이 이어지며 오픈AI와 구글 랩스로 오게 됐다.

김그륜 과거에 나는 비교적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타이틀 시퀀스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에미상을 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2024년, HBO Max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타이틀 시퀀스로 그 꿈을 이뤘다. 목표를 달성한 이후에는 또 다른 질문이 생겼다. 나의 꿈인 ‘미래에 도움이 되는 디자인’은 어떤 형태일까. 뉴미디어와 뉴테크를 결합한 디자인을 고민하던 연장선에서 애플에 합류하게 됐다.

증명의 방식

결과만 놓고 보면 간단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네 명의 디자이너는 자신을 갈고닦으며, 스스로를 증명할 방법을 계속해서 찾아왔다. 그렇게 각자의 선택과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 포트폴리오와 인터뷰가 만들어졌다.

데이빗 박 포트폴리오는 결과물보다 사고 과정에 대한 제안서에 가까워야 한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어떤 문제를 정의했고, 어떤 데이터를 통해 팀을 설득했으며, 그 결정이 비즈니스에 어떤 임팩트를 주었는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잘 만드는 것은 기본이고, 그 이상의 맥락을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을 선호하는 것 같다. 마이크로소프트 AI로 이직할 때 제출했던 내 포트폴리오는 약 60장이었는데, 실제 작업물은 48페이지 이후에 한두 개 정도만 넣었다. 앞부분은 대부분 이 시스템을 만들기까지의 사고 과정과 판단에 대한 설명이었다. 결국 기업은 조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을 갖고 있는 인재인지를 보고 싶어 한다.

김그륜 그래서 ‘일반적인 디자이너’로 보이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인터랙티브 코딩이나 웹3, 블록체인, NFT 아트처럼 내가 관심을 가져온 영역들, 그리고 무언가를 나누는 걸 좋아하는 성향까지 모두 합쳐서 하나의 캐릭터를 만든다. 포트폴리오에는 그런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묻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립 킴 맞다. 포트폴리오를 보다 보면 이 사람이 진심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가 느껴질 때가 있다. 디테일한 결과물보다도, 마음가짐이나 태도 같은 것이 먼저 보일 때가 많다. 결국 이 사람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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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킴이 진행한 나이키 코리아 브랜딩. 나이키의 DNA에 한국적 요소를 가미해 새롭게 탄생시켰다.

김영교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넣느냐보다, 그 내용을 어떻게 전달하느냐인 것 같다. 완성된 화면이나 결과물만 나열하는 것보다, 이 작업이 어떤 문제의식에서 출발했고 어떤 판단과 선택을 거쳐 현재의 형태가 되었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결과물이라도 어떤 질문을 던졌는지, 어디에서 방향을 틀었는지, 무엇을 포기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또 포트폴리오는 항상 충분한 시간과 집중 속에서 읽히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핵심 메시지는 짧고 명확해야 하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반복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한두 장만 보더라도 이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어떤 기준으로 결정을 내리는지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포트폴리오는 영화와 비슷하다. 장편이든 예고편이든, 짧은 줄거리만으로도 이야기가 전달돼야 한다.

저마다의 생존

미국의 고용 환경은 안정적이라 말하기 어렵다. 잦은 레이오프와 팀 개편, 예고 없이 바뀌는 프로젝트의 우선순위 속에서 커리어는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네 명의 디자이너는 이런 불확실한 환경을 전제로 자신만의 생존 방식을 연마해왔다.

필립 킴 결국 우리는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디자인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디자인을 잘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 나는 디자인의 완성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늘 ‘리틀 제스처’와 ‘서프라이즈 엘리먼트’를 고민한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한 번 더 고개를 들게 만드는 와우 포인트를 설계하려고 한다.

김영교 회사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는, 어떤 역할과 태도가 조직에 더 분명하게 보이는지가 드러난다. 그럴 때 조직이 주목하는 사람은 단순히 주어진 일을 잘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질문을 던지며 방향을 만들어내는 사람, 즉 주체성을 가진 사람이다. 오더를 기다리기보다 지금 조직에 무엇이 필요한지 먼저 고민하고, 자신의 역할 밖에서도 임팩트를 만들어내야 한다. 나 역시 그런 방식으로 커리어를 이어왔다. 리더십은 직함이 주어져서 생긴 것이 아니라, 필요해 보이는 순간 먼저 손을 들고 책임을 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또 빈 역할이 보이면 외면하지 않고, 어떻게든 채워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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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교와 그의 팀이 메타에서 진행한 메타 Shop 디자인.

김그륜 나에게 가장 큰 무기는 속도였다. 한국에서 일할 때는 일이 너무 많아 늘 밤을 새웠는데, 미국에 와서는 그 절반만 해도 “천천히 하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일종의 모래주머니 효과였다. 대신 이곳에는 정말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이 속도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했다. 아이디어를 빠르게 가시화해 보여주고, 비주얼로 설득하는 방식이다. 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솔루션을 눈앞에 보여주면 설득은 훨씬 쉬워진다.

필립 킴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해진다. 매 순간 어떤 이야기를 하고, 무엇을 수용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 혼자 잘하는 것보다, 교집합을 만들고 협업을 통해 서로를 업 리프트하는 방식이 실리콘밸리에서는 더 중요하게 작동한다.

데이빗 박 우선 내면의 건강이 중요하다고 본다. 타인의 말을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다. 타인의 성공을 시기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또 하나는 ‘지적 정직함(Intellectual Honesty)’다. 일정 레벨 이상 올라가면 스킬의 우위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실리콘밸리에는 뛰어난 기술자가 이미 넘쳐나니까.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어디까지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는지 투명하게 커뮤니케이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것이 반복되면 조직 내에서 ‘신뢰 자본(Trust Capital)이 쌓인다. 흥미로운 건 이 자본이 쌓이면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애쓰지 않아도 동료들이 나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주는 선순환 구조가 작동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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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소프트 코파일럿의 AI 캐릭터 미코. 데이빗 박이 디자인했다.

필립 킴 그 말에 공감한다. 사실 나는 개발자들이 부럽다. 오픈 소스로 지식을 공유하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디자인은 저작권과 개인의 영역이 강해서 더 예민해지기 쉽다. 그래서 질투도 생긴다. 하지만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디자인의 본질을 바라본다면, 디자인은 개인의 성취를 넘어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젝트와 퍼포먼스

이들이 연마해온 생존 방식은 추상적인 태도에 머물지 않는다. 각자의 선택은 작업 방식과 결과물 전반에 고스란히 반영되며, 실제 프로젝트 안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김그륜 엘라스틱에서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타이틀 시퀀스를 만들 때였다. 프로젝트 초반, 감독에게서 “곰팡이가 자라는 느낌을 구현할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말로 설명하는 대신, 그날 밤 직접 예제 파일을 만들고 테스트 영상을 제작해 두 가지 솔루션을 제안했다. 그 결과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됐고, 결국 그 작업으로 에미상을 받았다. 실행력과 속도가 나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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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O Max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타이틀 시퀀스. 김그륜은 이 작업으로 에미상을 수상했다.

필립 킴 헬스케어 스타트업 ‘니드NEED’에서의 작업을 예로 들고 싶다. 암이라는 주제는 늘 무겁고 두려움을 동반하지만, 나는 그 공포를 그대로 전달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게임적인 요소와 배지 시스템을 도입해 사용자가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는 경험을 설계했다. 그 결과 사용 지표와 반응 모두 분명한 변화를 보였다. 사회적 가치를 지닌 디자인이 비즈니스 성과로도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데이빗 박 나 역시 조직 전체에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퍼포먼스를 만든 경험이 있다. 최근 마이크로소프트 AI에서 조직의 중장기 비전을 정리하는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기존의 보고서 형식이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를 영상으로 전환하자는 제안을 했고, 나레이션 역시 성우가 아닌 리더십의 실제 목소리를 담았다. 그 순간부터 이 프로젝트는 개인의 제안이 아닌 조직의 비전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퍼포먼스란 결과물을 만드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조직의 의사결정 라인을 타고 흐르도록 설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영교 결국 모든 이야기는 주체성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리프트에 있을 때도 나는 주어진 문제를 그대로 푸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자율주행 프로젝트 당시 조직은 빠른 론칭을 원했지만, 테스트 과정에서 사용자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문을 여는 상황을 반복해서 목격했다. 몇 초의 차이가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론칭을 멈춰야 한다고 판단했고, 리더십까지 직접 설득했다. 실제로 이후에 한 자율주행 대표 회사가 인명 사고를 내며 택시 사업에서 철수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용자는 언제 ‘지금 내려도 안전하다’라고 느낄 수 있을까. 나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를 떠올렸다. 안전벨트 표시, 안내 방송, 조명처럼 여러 신호가 동시에 작동하며 확신을 주는 방식이다. 이를 차용해 차 안에서도 시각적·청각적 신호를 통해 사용자가 자연스럽게 기다리도록 만드는 솔루션을 제안했다. 문제를 피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 역시 나에게는 디자인의 일부다.

변화 속의 역할

지금 우리는 기술이 범람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그 흐름의 중심에는 빅테크 기업이 있다. 기술 변화의 최전선에서 이를 가장 먼저 마주하는 디자이너들은, 스스로의 역할을 어떻게 다시 정의하고 있을까.

데이빗 박 나는 기술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디자인적 상상력은 기술에 대한 완벽한 이해라는 토양 위에서만 피어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예로 들 수 있다. 사고 실험을 통해 이론이 등장한 이후, 시간과 속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바뀌었고, 그 인식이 축적된 뒤에야 페라리나 포르쉐처럼 기술 집약적이면서도 미학적으로 완성도 높은 제품들이 등장했다. 생성형 AI 역시 마찬가지다. 기술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디자인은 공허한 상상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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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VEO2 디자인에도 데이빗 박이 참여했다.

필립 킴 다소 과격한 표현일 수 있지만, 단순히 AI를 잘 활용하고 창작을 표면적으로 소비하는 디자이너들은 결국 ‘몰살’당하지 않을까 싶다. 주니어 디자이너를 잘 뽑지 않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이제 AI는 웬만한 주니어, 미들 레벨 디자이너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그 이상을 고민해야 한다. 크리에이티브에 깊이를 더하지 못하고, 여전히 핀터레스트에서 레퍼런스를 가져와 변형하는 수준에 머문다면 앞으로 살아남기 어렵다고 본다.

김영교 그 말에 공감한다. 실제로 현장에서 보면, AI 덕분에 시니어 디자이너들이 주니어가 하던 일들을 훨씬 빠르게 처리할 수 있게 됐다. 이전까지 디자이너가 다소 과대 고용된 측면이 있었고, 지금은 그 구조가 다시 조정되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김그륜 AI 관련 콘텐츠를 다루는 유튜브를 운영하다 보니 댓글 반응이 거의 두 가지로 갈린다. “이제 디자이너 끝났다”와 “아직 멀었다”다. 나는 이 두 입장 모두 이해한다. 다만 ‘아직 멀었다’라고 말하는 지점들은 빠르게 채워질 거라고 본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워낙 빠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 AI 기술을 섞어 새로운 형태의 작업, 새로운 장르를 만드는 사람들이 결국 앞서 나가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런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김영교 맞다. 결국 앞서 나가야 한다. 지금 가능한 기술만을 전제로 디자인하는 태도는 쉽게 안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제약 안에서만 문제를 풀게 되고, 미래를 선도할 수 없다.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서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지금 되는 것’이 아니라 ‘곧 될 것’을 기준으로 사고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곧 가능해질 기술을 기준으로 방향을 제안하고 팀과 함께 미래를 설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김그륜 앞서 나가기 위해선 배워야 한다. 예전에는 그래픽카드, 렌더링, 4K처럼 배워야 할 게 정말 많았고, 하나를 익히는 데 몇 년씩 걸리기도 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AI의 러닝 커브는 굉장히 짧다. 대부분은 한 번 써보면 감이 온다. 그래서 배움에 대한 부담이나 트라우마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계속 배우는 사람이고, 발견하는 사람이다’라는 태도로 기술을 대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데이빗 박 우리가 만드는 생성형 AI 툴의 목적은 창작 기술의 ‘보편적 접근성’, 즉 전문가의 전유물이었던 기술을 민주화하여 시장 전체의 퀄리티 바닥(Floor)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제 툴의 장벽은 무너졌다. 누구나 텍스트 몇 줄로 3D와 실사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모두가 크리에이터가 된 세상에서, ‘프로 디자이너’의 가치는 어디서 오는가? 전설적인 음반 제작자 릭 루빈의 사례를 이야기하고 싶다. 그는 악기를 연주하지도, 작곡을 하지도, 믹싱 콘솔을 다루지도 않는다. 대신 수많은 트랙 앞에서 무엇이 본질인지 정확히 골라내고, 어떤 순서로 배치해야 하나의 앨범이 되는지를 판단한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듣는 귀와 판단력’이라고 말한다. AI가 수만 가지 시안을 쏟아내는 시대, 디자이너 역시 시대의 맥락과 브랜드의 철학에 맞는 것을 골라내고 조율하는 큐레이터이자 오케스트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리콘밸리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들의 이야기는 해외 취업을 권하기 위한 가이드가 아니다. 대신 각자가 어떤 질문을 품고, 어떤 선택을 통해 이곳에 도달했는지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건네는 조언을 전한다.

김그륜 사실 취업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인지 먼저 고찰하는 일이다. 나의 경우에는 ‘글로벌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는 목표가 분명했고,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한 과정 속에서 해외 취업이라는 선택지가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이제는 회사가 아니라 개인에 포커싱해야 하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세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이건 저 사람이 아니면 안 되겠다”라고 느끼게 만드는 이유. 그 이유를 스스로 먼저 찾고, 꾸준히 키워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김영교 나 역시 왜 해외 취업을 해야 하는지가 가장 먼저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가고 싶다면, 나는 주저 없이 비행기표부터 사라고 말하고 싶다. 옵션이 많아질수록 결정은 늦어진다. 내가 미국에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능력 때문이 아니라, 먼저 실행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와서 실패해보고, 부딪혀보고, 그 과정에서 목표가 생겼다. 해외 취업은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일 수 있다. 때로는 계산보다 먼저 저지르는 실행력이 다음 기회를 만든다.

필립 킴 조언을 하기보단 나에게 큰 도움을 줬던 두 권의 책을 추천하고 싶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김훈의 〈칼의 노래〉다. 이 책을 읽으며 디자이너로서 무엇을 만들 것인가 이전에, 어떻게 살 것인지를 먼저 고민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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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킴은 헬스케업 니드NEED의 디자인을 통해 암이라는 주제를 좀 더 편하게,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

데이빗 박 해외 취업의 본질적인 가치는 회사 타이틀보다 문화적 대역폭의 확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낯선 환경과 다양한 관점 속에서 사고가 확장되는 경험은 이후 어디에서 일하든 자산이 된다. 현실적으로는 지금 미국 본사 직행의 문이 좁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목적지는 분명히 하되, 경로는 유연하게 설계하라고 말하고 싶다. 글로벌 허브에서 경험을 쌓고 우회하는 전략도 충분히 유효하다. 중요한 건 어디로 가느냐보다, 어떤 시야를 얻게 되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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