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밤에 열린 미술관, 라익스뮤지엄의 선택
배려를 설계로 확장한 뮤지엄 운영 방식
라익스뮤지엄은 감각 자극에 민감한 관람객을 위해 조명 소음 동선을 조절한 센서리 프렌들리 관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관람 인원 제한과 사전 정보 제공을 통해 예측 가능한 환경을 만들며 접근성을 특정 프로그램이 아닌 조직 전체의 핵심 가치로 확장하고 있다.


렘브란트의 〈야경〉과 페르메이르의 〈우유 따르는 여인〉 등 네덜란드 거장들의 대표작을 소장한 암스테르담의 라익스뮤지엄(Rijksmuseum). 연간 230만 명 이상이 찾는 유럽 최고의 미술관 중 하나다. 뮤지엄 입구에 늘어선 줄은 어떤 이들에게는 기대와 설렘의 시간이다. 그러나 감각에 민감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 기다림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미술관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시작되는 소음과 혼잡은 긴장과 불안, 나아가 두려움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목소리와 발소리, 반복되는 안내 방송이 만들어내는 소음, 끊임없이 움직이거나 깜빡이는 화면, 과도한 안내 문구에서 비롯되는 시각적 자극, 타인과의 좁은 신체적 거리, 그리고 동선을 예측하기 어려운 비좁은 공간 구조로 인한 방향 감각의 혼란까지. 감각 처리 방식에 차이를 지닌 이들에게 이러한 자극이 한꺼번에 겹치는 순간, 미술관은 더 이상 감상을 위한 공간이 되기 어렵다.

이러한 자극의 조합은 곧바로 감각 과부하(sensory overload)를 유발해 관람을 중단하거나 공간을 떠나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감각 친화적 관점에서 혼잡은 단순한 ‘불편함’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이 특정 사람들을 배제하는 가장 강력한 메커니즘 중 하나다. WHO 집계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약 16%에 해당하는 이들이 중대한 장애를 겪고 있다. 이 가운데 시각·청각 등 감각 기능과 관련된 장애 역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우리 중 약 여섯 명 중 한 명이 혼잡하고 소란스러운 환경에서는 일상적인 활동조차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해 12월 말, 모든 관람객이 미술관을 떠난 토요일 오후 늦은 시간. 암스테르담 라익스뮤지엄의 하이라이트 전시 공간인 ‘갤러리 오브 아너(Gallery of Honor)’에 조용히 조명이 켜지며 사람들이 하나둘 입장하기 시작했다. 부모의 손을 꼭 잡은 어린아이부터 휠체어에 앉은 노인까지, 연령도 성별도 인종도 서로 달랐다.

이날의 특별한 관람객들은 자폐 스펙트럼, ADHD, PTSD, 치매 초기 등 감각 처리 방식에 차이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미술관은 이들을 위해 잠시 속도를 늦추고, 소음을 낮췄다. 라익스뮤지엄이 보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이들을 위해 마련한, 오직 그들만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라익스뮤지엄의 ‘센서리 프렌들리(Sensory Friendly) 관람 프로그램’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처음 시작됐다. 많은 뮤지엄이 강제 휴관에 들어갔던 그 시기가 오히려 새로운 관람 방식을 실험하고, 접근성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야경 투어(The Night Watch Tour)’ 역시 팬데믹 기간에 출발했다. 요양원이나 노인 시설 등에서 생활하는 이들 가운데 신체적 제약이나 건강 문제로 미술관을 직접 방문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프로그램이다. 라익스뮤지엄은 ‘관람객을 기다리는 뮤지엄’이 아니라, ‘관람객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미술관’을 선택했다.

라익스뮤지엄에서 뮤지엄 접근성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카테라인 데네캄프(Cathelijne Denekamp) 매니저는 ‘센서리 프렌들리’ 프로그램의 최초 기획자다. 그는 “우리 주변에는 빛이나 소리 같은 자극에 민감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며 “뮤지엄은 늘 혼잡하다는 인식 때문에, 오고 싶어도 방문을 포기하는 이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자폐 스펙트럼, 뇌 손상, 치매, 그리고 코로나19 이후 나타난 다양한 후유증 등 이유는 다양하지만, 이들에게 소음과 혼잡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두려움을 유발하는 요소가 된다. 데네캄프 디렉터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최소한 이 시간만큼은 미술관이 붐비지 않는다는 점을 보장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그 예측 가능성을 믿고 안심하며 방문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프로그램의 취지를 밝혔다. 관람은 주로 토요일 오후 6시 부터 9시까지 진행된다. 정규 관람 시간보다 입장 인원을 대폭 제한해, 관람객이 마치 박물관을 혼자 사용하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아트리움과 전시실의 조명은 한층 낮추고, 별도의 교육을 받은 뮤지엄 직원들이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안내한다.

관람 도중 휴식이 필요한 방문객을 위해 조용히 쉴 수 있는 전용 휴식 공간도 마련돼 있다. 일부 공간에는 몸을 누일 수 있는 소파가 배치돼 있어, 감각 자극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안정을 취할 수 있다. 이 시간 동안 뮤지엄 카페와 숍도 운영되지만, 모든 직원은 소음을 최대한 줄이라는 지침을 따른다.

가이드 투어 역시 소규모로 운영된다. 한 그룹당 최대 4명으로 인원을 제한해 관람 중 발생할 수 있는 과도한 자극을 최소화하며, 참여 여부는 전적으로 방문객의 선택에 맡긴다. 이와 함께 방문 전 박물관의 환경과 동선, 관람 방식, 보안 검색 절차 등 세부 정보를 담은 안내 문서도 제공된다. 방문객이 사전에 공간과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종의 오리엔테이션 자료다. 프로그램에 관심 있는 이들은 수개월 전부터 관련 정보를 확인하고 준비할 수 있으며, 모든 내용은 라익스뮤지엄 공식 웹사이트에서도 직접 열람 가능하다. 센서리 프렌들리 관람 프로그램은 연간7회 운영된다. 각 세션당 참석 인원은 약 250명으로, 매년 약 1,750명이 이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고 있는 셈이다.
카테라인 데네캄프 디렉터에 따르면, 오랜 역사와 유산을 지닌 상징적인 뮤지엄을 정규 개관 시간 외에 개방하는 일은 사실 상당한 비용이 드는, 말 그대로 ‘값비싼’ 작업이다. 단순히 문을 여는 것을 넘어, 추가 인력 배치와 시설 관리, 보안 운영 등 여러 제반 비용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안정적인 재정적 후원이 없다면 지속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운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라익스뮤지엄의 센서리 프렌들리 관람 프로그램은 Rijksmuseum 펀드와 개인 자선 재단인 패밀리 드 브라우네 펀드(Family De Bruijne Fund) 의 후원을 통해 운영되고 있다. 주목할 점은 패밀리 드 브라우네 펀드의 설립자 본인 역시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라는 사실이다.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 문화 기관들이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던 감각 민감성(sensory sensitivity) 문제에 주목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문화에 접근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 Jason Brownrigg, Ⓒ 2024 The Museum of Modern Art, NY
사실 라익스뮤지엄이 감각 친화적 뮤지엄 경험 프로그램을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도입한 것은 아니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이미 관련 시도가 보다 활발히 이루어져 왔고, 실제로 카테라인 데네캄프 디렉터 역시 라익스뮤지엄에서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 해외의 다양한 사례를 참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익스뮤지엄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접근성 강화를 특정 부서의 과제가 아니라 뮤지엄 전체의 공동 과제로 설정했다는 점에 있다. 일반적으로는 일부 조직이나 담당자가 전담하는 경우가 많지만, 라익스뮤지엄에서는 교육, 인사(HR), 운영·관리, 마케팅 등 여러 부서가 함께 참여한다. 이 같은 구조는 프로그램을 일회성에 그치지 않게 하고, 보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뮤지엄의 접근성을 전담하는 상근 담당자를 별도로 두고, 이를 조직의 핵심 가치로 삼는 사례 역시 아직은 드물다.
라익스뮤지엄의 센서리 프렌들리 관람 프로그램은 전 세계 뮤지엄계에서 포용적인 문화 접근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한 카테라인 데네캄프 디렉터 역시 뮤지엄 접근성을 주제로 한 국제 컨퍼런스와 워크숍에 참여하며, 현장에서 축적한 경험과 노하우를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실제로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과 대만의 뮤지엄 관계자들과 이 주제를 놓고 세미나를 진행한 경험이 있는 카테라인 데네캄프 디렉터는 “신체적 혹은 정신적 제약으로 문화 향유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할 수 있어 매우 뜻깊다”며 “우리의 작은 시도가 실제로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국에는 루브르나 바티칸에 버금가는 방문객을 맞이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해 훌륭한 뮤지엄이 많다”며 “뮤지엄의 접근성과 포용성을 주제로, 한국의 현장 담당자들과 경험과 지혜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머지않아 생기길 바란다”고 개인적인 바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