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브랜드-영화의 상관관계
패션 브랜드가 영화와 관계 맺는 방식은 오랫동안 단순했다. 영화에 의상을 협찬하거나 특정 장면에 제품을 노출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최근 럭셔리 브랜드들의 행보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유명 감독과 협업하는 것은 물론 패션쇼를 영화 상영으로 대체하거나 영화제와 제도적 관계를 구축하기도 한다. 심지어 제작사를 설립해 직접 영화 산업에 뛰어들기도 한다. 자신만의 정체성을 필름 속에 녹여내는 패션 브랜드들의 전략을 살펴본다.

영화적 유산과 생태계에 대한 지지, 샤넬
샤넬에게 영화는 브랜드의 뿌리와 맞닿아 있는 가장 핵심적인 예술 매체다. 창립자 가브리엘 샤넬은 1930년대에 제작자 새뮤얼 골드윈의 제안으로 할리우드에 입성해 배우들의 의상을 디자인했으며 이후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과 깊은 유대를 맺으며 스크린 속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러한 역사적 유산은 오늘날 샤넬이 영화 산업 전체의 생태계를 후원하고 그 예술적 가치를 보존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최근 거장 빔 벤더스와 협업한 2024/25 공방 컬렉션 영상은 샤넬이 추구하는 서정적 미학의 정점을 보여준다. 틸다 스윈튼이 출연한 이 영상은 억지스러운 서사 대신 공간을 채우는 빛과 직물의 질감을 세밀하게 탐구하며, 샤넬 특유의 우아함을 영화적 언어로 치환해낸다.
또한 샤넬은 부산국제영화제(BIFF)와 파트너십을 맺고 ‘샤넬 × BIFF 까멜리아상’을 신설하여 영화 산업계 여성들의 헌신과 기여를 기리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2024년 류성희 미술감독에 이어 2025년 실비아 창 감독을 수상자로 선정한 것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영화의 시각 체계와 정서를 구축하는 여성 예술가들을 직접 조명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나아가 샤넬은 매 시즌 공방 컬렉션 영상 말미에 자수, 깃털, 단추 제작 등에 참여한 600명 이상의 장인 명단을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처럼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패션의 완성 뒤에 숨겨진 숙련된 기술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 샤넬에게 영화는 단순한 홍보 도구가 아니라 브랜드의 문화적 권위를 공고히 하고 동시대 예술가들과 연대하는 소중한 동반자다.
런웨이를 대신한 심리극의 긴장감, 구찌
구찌는 과감히 런웨이를 버리고 영화 상영으로 컬렉션을 발표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2025년 9월 밀라노에서 공개한 단편영화 〈더 타이거The Tiger〉는 새롭게 아티스틱 디렉터가 된 뎀나 바잘리아가 선보이는, 구찌 하우스의 새로운 시대적 방향성을 알리는 선언적인 작품이다. 아카데미 수상 감독 스파이크 존즈와 핼리너 레인이 공동 연출한 이 영화는 바바라 구찌의 저택을 배경으로 한 팽팽한 가족 심리극 형태를 띤다.
세련되고 완벽해 보이는 상류사회 이면의 소외감과 신경질적인 긴장감을 다룬 이 서사는 이번 컬렉션의 주제인 ‘구찌: 라 파밀리아Gucci: La Famiglia’가 담고 있는 복합적인 정서와 맞닿아 있다. 뎀나 바잘리아는 구찌 하우스의 아카이브를 깊이 탐구하여 섹슈얼리티와 화려함을 자신만의 해체주의적 스타일로 재구성했고 이를 런웨이 위의 워킹이 아닌 영화 속 인물들의 갈등과 표정 속에 녹여냈다. 영화는 컬렉션의 화려함을 직접 설명하는 대신 미장센과 조명, 인물 간의 차가운 관계를 통해 관객이 브랜드의 새로운 정서를 몸소 체감하게 만든다.
특히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인물 간의 심리적 단절과 고립감을 시각화하기 위해 광각렌즈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는 공간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인물 사이의 거리감을 확장해 관객에게 기묘한 긴장감을 전달하는 연출적 장치로 기능했다. 패션이 단순한 복식을 넘어 시대의 불안과 욕망을 조형하는 강력한 시각 매체임을 영화라는 장르를 통해 증명해낸 셈이다.
반복과 변주로 갱신하는 제품 이미지, 프라다
2007년에 출시한 갤러리아 백Galleria Bag은 프라다의 역사를 관통하는 타임리스 아이콘이다. 밀라노의 유서 깊은 쇼핑 아케이드 ‘갤러리아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에서 이름을 딴 이 가방은 견고한 사피아노 가죽의 질감과 고전적인 실루엣으로 하우스의 장인 정신을 대변한다. 프라다는 이 스테디셀러를 대중에게 각인시킬 때 단순히 새로운 컬러나 소재를 나열하는 방식에 그치지 않는다. “이 가방이 동시대 사용자의 일상과 태도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며 시각적 실험을 거듭한다.
2017년 어텀 드 와일드 감독과 함께한 〈더 포스트맨스 기프트The Postman’s Gift〉 시리즈에서 가방을 초현실적인 유머와 이야기의 매개체로 다뤘다면, 2025년에 선보인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과 스칼렛 요한슨이 협업한 〈리추얼 아이덴티티Ritual Identities〉는 훨씬 정제되고 고요한 태도를 취한다. 카메라는 가방의 장식적 디테일을 쫓는 대신 사용자가 가방을 들고 내려놓는 일상적인 동작의 지루할 법한 반복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이는 제품을 특별한 오브제로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습관과 정체성이 투영된 ‘삶의 일부’로 정의하려는 시도다.
특히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스칼렛 요한슨의 즉흥적인 감정 변화를 가감 없이 담아내기 위해 리허설 없이 35mm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으며, 필름 특유의 거친 입자감과 우연성을 통해 브랜드가 지향하는 리얼리티의 미학을 극대화했다. 프라다는 이러한 영화적 변주를 통해 갤러리아 백을 유물이 아닌 현재의 공기 속에서 살아 숨 쉬는 현대적 아이콘으로 매번 새롭게 갱신한다.
아카이브로 쌓아가는 여성의 서사, 미우미우
미우미우의 브랜드 필름 ‘우먼스 테일Women’s Tales’ 시리즈는 2011년부터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지속해온 패션계의 이례적인 장기 예술 프로젝트다. 매년 두 차례씩 세계 각국의 여성 감독을 초청해 제작하는 이 시리즈는 일시적인 캠페인에 그치지 않고, 여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독자적인 예술적 아카이브를 구축해왔다.
미우미우는 참여 감독에게 제품 노출에 대한 상업적 제약을 거의 두지 않으며 오직 여성의 삶, 욕망, 신체에 대한 자유로운 탐구만을 독려한다. 아녜스 바르다부터 에바 두버네이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시네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이 시리즈는 각기 다른 개성을 지녔음에도 결국 ‘여성의 주체성’이라는 하나의 목소리로 수렴된다. 이렇게 완성한 영상은 단순한 온라인 배포를 넘어 국제 영화제 상영과 미술관 전시를 통해 예술적 기록물로서 가치를 인정받는다.
작품 속에서 미우미우의 의상은 인물의 움직임과 서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기능할 뿐 상업적인 연출은 철저히 배제되어 영상미를 해치지 않는다. 브랜드는 영상 공개 시점에 맞춰 베니스 영화제 등 주요 현장에서 각 감독의 인터뷰와 미공개 스틸컷을 정교하게 편집한 소량의 한정판 도록을 배포하며 프로젝트의 서사를 물리적인 아카이브로 남긴다. 소비자들은 미우미우의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브랜드가 오랜 시간 정성껏 구축해온 여성 예술의 역사와 가치관을 공유하고 지지하는 일원이 된다.
1분의 영상에 담긴 시각적 충격, 젠틀몬스터
젠틀몬스터는 제품의 기능적 소구보다 브랜드가 정교하게 설계한 장면과 감각적 경험을 소비자에게 제안하는 데 집중했다. 매장을 마치 설치 예술 공간처럼 꾸미는 파격적인 실험 정신은 브랜드 필름의 문법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2025년에 공개한 단편 영상 〈더 헌트The Hunt〉는 이러한 브랜드 기조를 1분 내외의 짧고 강렬한 문법으로 압축해냈다. 나디아 리 코헨이 연출하고 모델 겸 배우인 헌터 샤퍼가 출연한 이 영상은 고전 호러와 누아르 영화를 연상시키는 과장된 색감과 연출을 통해 강렬한 시각적 자극을 선사한다. 여기서 아이웨어는 단순한 액세서리가 아니라 인물의 인상을 완전히 재구성하고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조형적 오브제로 활용된다.
영상 속 제품인 2025 가을 컬렉션의 ‘라임스 02’, ‘힐스 01’, ‘캘리 02’ 등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강렬한 이미지로 뇌리에 각인된다. 젠틀몬스터는 영상 기획 단계에서부터 틱톡과 인스타그램 릴스처럼 고속으로 스크롤되는 디지털 환경을 철저히 분석하여 시청자가 이탈하지 않도록 매 3초마다 시각적 반전이나 연출의 변화를 주는 치밀한 편집 전략을 활용했다. 이는 짧은 순간에 소비자의 주의를 사로잡아 브랜드 세계관으로 이끌고, 이를 곧바로 디지털 플랫폼 구매로 연결하려는 효율적인 인터페이스 전략이다. 젠틀몬스터에게 브랜드 필름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와 소통하는 가장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언어다.
제작사 설립으로 영화 산업에 진입한, 생로랑
생로랑은 패션 하우스가 단순히 영화를 후원하는 단계를 넘어 직접 영화 제작의 주체가 되는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2023년 아티스틱 디렉터 안토니 바카렐로의 주도로 설립한 생로랑 프로덕션Saint Laurent Productions은 패션 홍보용 단편을 넘어 실제 극장 개봉과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을 목표로 하는 독립적인 영화 제작사다. 2023년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스트레인지 웨이 오브 라이프Strange Way of Life〉를 시작으로, 2024년 칸영화제에서는 생로랑이 제작에 참여한 세 편의 장편영화가 동시에 경쟁 부문에 진출하는 쾌거를 거뒀다. 특히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뮤지컬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Emilia Perez〉는 심사위원상과 여자배우상을 동시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영화들 속에서 생로랑의 스타일은 인물의 성격과 장면의 미학적 분위기를 결정짓는 핵심적 장치로 작동한다. 생로랑 프로덕션은 단순한 자본 투자를 넘어 안토니 바카렐로가 직접 영화의 공동 제작자로 나서 감독의 시나리오 개발 단계부터 미학적 피드백을 공유하며 영화의 시각 체계를 초기부터 함께 설계한다.

이러한 방식은 패션 디자인이 영화 제작 시스템 안에서 단순한 코스튬을 넘어 영화 전체의 예술적 통일성을 부여하는 핵심적인 구성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실질적인 결과물로 증명한다. 생로랑은 이를 통해 패션 하우스가 단순히 트렌드를 만드는 곳을 넘어, 동시대의 미학적 가치를 생산하고 기록하는 능동적인 문화적 주체임을 선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