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잔상으로 빚는 디자인, 맛깔손
맛깔손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시네필이다. 그에게 영화는 취미나 기호를 넘어 영감을 길어 올리는 마르지 않는 우물이다. 맛깔손의 뇌리에 남은 영화의 잔상은 평면 위 글자와 이미지로 이어지고, 그의 손을 거친 영화는 스크린을 떠나 또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되살아난다.

맛깔손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시네필이다. 그에게 영화는 취미나 기호를 넘어 영감을 길어 올리는 마르지 않는 우물이다. 어릴 적 눈에 담아두었던 고릿적 흑백 영화는 아직도 그의 디자인 곳곳에 편린처럼 숨어 있다. 맛깔손의 뇌리에 남은 영화의 잔상은 평면 위 글자와 이미지로 이어지고, 그의 손을 거친 영화는 스크린을 떠나 또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되살아난다.

무비랜드 상영작으로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골랐다.
고등학생 때 처음 접한 작품이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군사독재 이전의 짧은 틈새에서만 간신히 탄생할 수 있었던, 1960년대 한국 사회의 금기를 정면으로 찌른 영화다. 물론 좋아하는 영화는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하녀〉를 고른 건 특유의 독창적인 미장센 때문이다. 맨발의 여자가 남자의 구두를 밟고 올라탄 모습이라든지, 남자의 다리를 붙잡고 끌려가며 계단에 머리를 찧는 장면이라든지. 가부장적 시선 안에서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이 신선하다. 정제된 이미지보다는 일상에서 벗어난, 날것의 느낌에 매료되는 편이다.
어려서부터 시네필의 면모가 다분했던 모양이다.
10대 시절 교환학생으로 일본에서 몇 달을 지낸 적이 있다. 타지에서 무료함을 달래고자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오시마 나기사, 구로사와 아키라, 이마무라 쇼헤이 등 1960~1970년대를 대표하는 일본 감독들의 작품을 찾아보다가 당대 동아시아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김기영 감독도 그렇게 해서 알게 되었고. 서울로 돌아온 후론 낙원상가에 있던 시네마테크를 자주 드나들었다. 사실 코미디나 블록버스터 영화도 좋아하는데, 그에 비하면 옛날 영화는 솔직히 지루하다. 그래도 문득 떠오른 극 중 장면이 영감을 주는 경우가 있어서 쓰디쓴 약을 먹는 심정으로 공부하듯 봤다. 요즘 들어 유년기에 열심히 보았던 영화들이 잔상처럼 남아 여전히 작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더욱 실감한다.
영화를 소재로 작업을 한 건 언제부터였나?
미공개 영화음악을 모은 믹스테이프를 만든 적이 있다. 이때 처음 플레인아카이브와 인연을 맺었다.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친분을 이어가다가 자연스럽게 블루레이 디자인을 맡게 되었다. 플레인아카이브는 영화인의 보물 창고 아닌가. 여러 영화감독과 협업하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꼭 박찬욱 감독과 봉준호 감독의 작업에 참여하고 싶다고 틈나는 대로 어필했다.(웃음) 그 덕에 〈기생충〉과 〈아가씨〉 작업이 들어왔을 때 기회를 붙잡을 수 있었다.

2020년에 작업한 〈기생충〉 각본집과 스토리보드 북이 베스트셀러에 올랐을 때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워낙 봉준호 감독의 팬이다. 영화 〈마더〉가 개봉했을 때 팬 카페에 가입까지 했을 정도다. 〈기생충〉 각본집과 스토리보드 북은 작업 기간이 굉장히 길었는데도 내내 설레는 마음이었다. 기획 단계 때부터 두 권의 책이 이어져 보이길 바랐다. 스토리보드에서 발췌한 봉준호 감독의 스케치와 배우의 클로즈업 신을 일대일로 대응시킨 표지를 통해 스토리보드와 각본의 선형적인 구조를 드러냈다. 사진과 스케치를 나란히 놓고 보니 스케치가 빈약해 보이는 감이 있어 큰마음 먹고 봉준호 감독에게 다시 그려달라고 부탁했는데, 너무 공을 들이다 보니 오히려 스케치의 생생함이 덜해 결국 원작으로 돌아가야 했던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웃음) 〈기생충〉이 세상에 공개되기 전부터 시나리오를 읽으며 책 작업을 했기 때문에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는데, 나중에 보니 스토리보드와 거의 다를 바 없어 놀랐던 기억이 있다.
각본집으로는 보기 드물게 고딕 서체를 사용했다.
각본집은 가독성이 중요한 만큼 당연히 명조체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명조체로 조판해서 감독에게 보여주자 ‘담백한 고딕이면 좋겠다’는 의견이 돌아왔다. 알고 보니 봉준호 감독은 처음부터 고딕체로 글줄 흐름까지 맞춰가며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더라. 오른쪽 흘림으로 문장을 끊는 방식도 감독의 아이패드 속 시나리오를 거의 그대로 살린 것이다. 군더더기 없는 글자로 덤덤하게 조판한 만큼 사소한 부분에서는 포인트를 주고 싶었다. 예를 들어 사선으로 흐르는 듯한 페이지 넘버는 극 중 상징적인 공간인 계단의 구조를 차용한 것이다.



영화를 소재로 작업할 때 습관이 있나?
배우 얼굴을 클로즈업한 사진을 즐겨 쓴다. 스크린 속 얼굴이 보여주는 각각의 뉘앙스가 흥미로워서 개인적으로 이미지를 수집한 적도 있다. 〈아가씨〉 촬영 현장 사진을 수록한 사진집 〈아가씨의 순간들〉 표지에도 주인공의 눈가를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한 컷을 실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가장 함축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게 배우의 표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버전 말고도 시안을 20개 넘게 만들어서 박찬욱 감독에게 전달했는데, 내심 염두에 두었던 시안이 채택되어 기뻤다. 박찬욱 감독과 취향이 통한 것 같았달까.(웃음)
한국 영화계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각본집을 비롯한 2차 창작물 시장은 여전히 활발한 듯하다.
이상할 건 없다고 본다. 인기 있는 영화와 소장 가치가 있는 영화는 또 다르니까. 영화 자체가 흥행하지 못하더라도 감독의 팬덤이 탄탄하거나 극 중 캐릭터가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은 유독 2차 창작물 시장이 크게 형성된다. 굿즈는 영화의 타임라인을 확장해주는 매체다. 영화를 보던 순간의 기억을 일상으로 이어간다는 점에서 영화와는 또 다르게 매력적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유독 뇌리에 오래 남는 장면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영화의 미장센을 그래픽 언어로 그대로 옮겨오는 게 가능할까?
영화감독과 그래픽 디자이너가 구사하는 언어가 다르지 않나. 영화의 주재료가 움직이는 이미지라면 그래픽 디자인에서는 글자와 스틸 이미지가 기본이 된다. 영화만이 구현해낼 수 있는 미장센이 있고, 마찬가지로 그래픽 디자인으로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이 있다고 본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영화 포스터 중에는 원작의 미장센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는 경우도 많다. 솔 바스의 〈현기증〉 포스터처럼 말이다.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아이덴티티도 디자인했다. 전주국제영화제는 매해 새로운 디자이너와 협업해 아이덴티티를 변주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당시 디자인에서 주안점을 둔 부분은 무엇이었나?
전주국제영화제는 매년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선보이지만, 알파벳 J를 핵심적인 그래픽 언어로 삼는 게 관습 아닌 관습이다. 제24회 영화제의 아이덴티티 역시 알파벳 J에서 출발했다. 축제의 생동감을 유연하게 움직이는 J 안에 담았다. 심벌을 그래픽 시스템으로 확장해 영화제 전반을 시각화하는 작업을 맡았는데, 도시 전역이 우리가 만든 디자인으로 물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곧 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 개막하는 영화 전시에도 참여한다고 들었다. 미리 귀띔해줄 수 있나?
2년여간 시네마테크 브랜딩과 영화 포스터 디자인을 담당했던 터라 ACC와는 워낙 인연이 깊다. 오는 3월에 열리는 〈아시아의 장치들〉은 ACC 개관 1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라 내용이나 규모 면에서 공을 많이 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전시 디자인과 더불어 전시장 입구 부근에 설치된 미디어 큐브에서 상영할 영상을 제작하는 중이다. 이번 전시는 여성 감독 한옥희의 작품을 주축으로 하는데, 대사와 내러티브보다는 상징적 이미지와 메타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게 특징이다. 한옥희 필름 속 흑백 이미지를 활용해 감독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 외에도 디자이너의 흥미를 돋울 만한 작품이 많으니 기대해도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