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간 디자이너, 정연종

정연종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축하기 위해 빌려온 것은, 고향의 산과 물의 냄새가 스며 있는 한국적 정서였다.

시대를 앞서간 디자이너, 정연종

디자이너 정연종은 1996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라의 금관 무늬가 이태리에서 유행하고 세종대왕 문양이 파리에서 최고의 가격으로 팔리게 할 것입니다.” 당시는 한류 열풍이 불기 한참 전이었다. 드라마를 시작으로 K-팝이 서서히 인기를 끌 때조차, 오늘날처럼 전 세계가 한국 문화 전반에 열광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정연종의 예언은 오늘에 이르러 현실이 되었다. 한국적 스타일로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를 만들고자 했던 그는 시대를 앞서간 디자이너였다.

정연종은 1944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 생활을 하던 중 ‘상업 미술’이라는 분야를 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상경한 그는 강원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포스터컬러를 서울에 와서 처음 접했다고 하니 남들보다 한참 늦은 시작이었다. 서울 학생들에 비해 자신의 작업은 투박하고 부족하다고 느꼈기에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스스로 뒤처진다고 생각했던 정연종의 생각과는 달리 홍익대학교 공예학부 동기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교수들의 질투를 살 정도로 실기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아마도 정연종은 자신의 작업에 만족하고 안주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엄격하게 대하며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연종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축하기 위해 빌려온 것은, 고향의 산과 물의 냄새가 스며 있는 한국적 정서였다. 대학을 졸업한 뒤 1969년에 선보인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979년에는 〈한국 이미지전〉, 1981년과 1982년에는 ‘한국의 미’를 주제로 한 개인전을 열며 활동을 이어갔다. 첫 직장인 금성사에서 3년을 근무하던 중 1970년 한국디자인포장센터가 발족하자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디자인포장센터는 당시 디자인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기 때문에 정연종 역시 큰 기대를 가지고 입사했고, 이때 만난 박재진, 안정언, 유제국과 함께 만든 스튜디오가 ‘크리애드’다.

그가 여러 회사를 거치며 깨달은 게 있다면 디자이너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시장조사가 필수라는 것이었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상품 중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지 않아 촌스러워 보이는 제품들을 골라 새로 디자인해 판매했다. 직접 기획한 제품이 소비자들에게 어떤 반응을 얻을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매대 앞에 서서 지켜보기까지 했다. 코리아마케팅, 바른손 등 여러 기업을 거쳐 선광기획을 설립한 것은 1975년의 일이다. 한국 디자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회사에서 경험을 쌓고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들과 함께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디자인 현장의 최전선에서 끊임없이 탐구하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가 1980년대 서울 지하철 2, 3, 4호선 개통 당시 진행했던 다양한 타일 벽화 작업 중 상당수는 지하철 역사에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한국적 소재를 상품화한 민예품과 브랜드를 만들고자 평생을 노력한 흔적도 여전히 남아 있다. 물론 그가 디자이너로서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국풍81’ 포스터와 ‘로티’ 캐릭터 소송 사건은 그의 평생에 걸친 노력에 그림자를 남기기도 했으나, 정연종이 일평생 고집스럽게 한국적 이미지를 디자인으로 승화시키며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독보적인 디자이너였다는 사실만큼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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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5일부터 12일까지 디자인하우스 모이소 갤러리에서는 선구자 정연종을 기리는 특별 전시가 열린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72호(2026.02)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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