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존재의 텅 빈 사유, 피에르 위그 〈Liminals〉 전

LAS 파운데이션은 ‘Sensing Quantum’ 프로그램의 두 번째 커미션 작가로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를 초대해 신작 <Liminals>(2025)를 공개했다. 위그는 1990년대 ‘관계미학’을 대표했지만, 일찌감치 인간 중심의 관계에서 벗어나 비인간 존재들의 감각과 지각으로 관심을 옮겼다.

얼굴 없는 존재의 텅 빈 사유, 피에르 위그 〈Liminal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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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lle am Berghain © Stefan Lucks. Courtesy the photographer and Berghain Ostgut GmbH.

베를린 베르크하인 할레(Halle am Berghain)의 캄캄한 어둠 속, 얼굴 없는 생명체가 부유한다. 더 정확히는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거대한 공허가 뚫려 있다. 그는 손끝으로 빈 얼굴을 더듬으며 감각의 흔적을 찾지만, 감각할 얼굴 자체가 없다. 이내 바닥을 기어오르고 허공을 응시하거나 손가락으로 땅에 구멍을 내며 무언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지대가 흔들리면 모든 몸짓은 무너지고, 작은 돌들이 튀어오르며 만들어낸 진동은 벽면 가득 펼쳐진 영상을 뒤흔든다. 그 앞에 선 관람객은 낯선 감각으로 이를 경험하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의지의 폐허에 선 비인간적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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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Huyghe. Photo © Ola Rindal.

LAS 파운데이션은 ‘Sensing Quantum’ 프로그램의 두 번째 커미션 작가로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를 초대해 신작 <Liminals>(2025)를 공개했다. 위그는 1990년대 ‘관계미학’을 대표했지만, 일찌감치 인간 중심의 관계에서 벗어나 비인간 존재들의 감각과 지각으로 관심을 옮겼다. 철학자 트리스탄 가르시아(Tristan Garcia)는 이러한 위그의 작업 방식을 ‘의지의 폐허(Ruins of the Will)’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 작가가 작품을 완전히 통제하는 독재적 설계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시스템과 생물체가 스스로 반응하고 진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두는 것, 그 비워진 공간에서 비로소 인간 너머의 새로운 세계, ‘근본적인 외부’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Untitled (Human Mask)>(2014)는 폐허가 된 일본 식당을 배회하는 인간의 얼굴 가면을 쓴 원숭이를 통해 인간의 행위를 모사하지만,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는 존재의 의식(의식을 보여줬다.  <After ALife Ahead>(2017, 뮌스터 조각프로젝트)의 경우는 버려진 아이스링크장을 박테리아, 인공신경망, 암세포가 뒤섞인 자율적 생태계로 제작했다. 기술과 생물이 융합된 하이브리드 환경은 베니스 푼타 델라 도가나에서 선보인 <Liminal>(2024)에서도 지속되는데, 위그는 실험실에서 배양한 합성 신경회로, 즉 뇌 오르가노이드를 영상 형상과 실시간으로 연결하여 인간 신경계와 영상을 결합했다. 복수형으로 제목이 확장된 이번 전시작 <Liminals>은 그 지점을 ‘양자 불확정성’으로 밀어붙인다. 특히 이번 작품의 중심에는 양자물리학자 토마소 칼라르코(Tommaso Calarco)와의 협업이 있었다. 이들은 율리히 연구센터의 100큐비트 파스칼(Pasqal) 양자컴퓨터로 물질의 진동을 시뮬레이션하고, 이를 사운드로 변환했다. 또한 철학자 토비아스 리스(Tobias Rees)와 함께 ‘인간 존재론의 바깥’을 개념화하며, 양자 노이즈를 기반으로 특정 시퀀스를 생성하는 AI 모델을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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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Huyghe, Untitled (Human Mask), 2014, Film, color, stereo sound, 2 min. 66 sec. Running time: 19 min.
Courtesy of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London, & Anna Lena Films, Paris © Pierre Huyghe, VEGAP, 2017.

하지만 이러한 거대한 기술적 장치는 감각적으로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 못했다. 건축/디자인 잡지인 도무스는 ‘한겨울 시멘트 공장 잔류 냉기 속에서 55분간 영상을 보는 경험은 거의 신체적 고문(waterboarding)에 가깝다’고 평했고, 독일 주간지 디 자이트는 ‘위그의 머리가 이렇게까지 비어 있었던 적은 없었다’고 평가하며 작품 속 얼굴 없는 존재를 위시해 작가의 사유 없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는 ‘얼굴 없는 존재가 왜 여성의 신체로 드러나야 하는가’라며 시각적 코드의 모호함을 지적했다. ‘인간 존재론의 바깥’을 사유하는 존재, 정체성 없음을 상징하는 존재가 왜 여성의 가슴과 골반, 흰 피부를 지닌 신체로 등장해야 하는가.

기술적 야심과 미학적 공허 사이

양자물리학이 예술에 던지는 질문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 ‘양자 컴퓨터를 사용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확정성, 중첩, 얽힘 같은 개념이 우리의 인식과 존재 방식을 어떻게 재구성하는냐에 있다. 위그의 이번 신작에 대한 실망도 그 연장선에서 비롯된다. 그가 꾸준히 던져온 질문들, 인간 바깥의 감각과 비인간 존재의 시점, 인식의 흔들림 등은 언제나 기술을 넘어선 차원에서 작동해왔으며, 그 설득력은 기술의 새로움이 아니라 그것이 촉발한 존재론적인 질문에 있었다. 그러나 <Liminals>는 시리즈임을 감안하더라도 외형상 2024년작 <Liminal>과 크게 다를바 없을 뿐 아니라, 양자 세계의 본질을 감각적으로 조우하기보다 그것을 재현하려는 기술적인 제스처에서 멈춰섰다. 그 결과, 러닝타임 내내 그가 수십 년간 구축해온 조형 언어와 미학적 전략이 중심에 놓이고, ‘양자’는 그 위에 얹어진 이론적 외피처럼 보이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양자 중첩상태가 왜 ‘얼굴 없는 신체’로 번역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필연성 또한 끝내 설득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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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Huyghe, Liminal. (temporary title) (2024–ongoing; detail), Courtesy the artist and Anna Lena Films, Paris; © Pierre Huyghe/SIAE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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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Huyghe, Liminals, 2025. Filmstill. In Auftrag gegeben von LAS Art Foundation und Hartwig Art Foundation. Mit freundlicher Genehmigung des Künstlers.
© Pierre Huyghe / VG Bild-Kunst, Bonn, 2026.

반대로 ‘양자’라는 거대한 개념적 프레임이  작가 고유의 미학을 잠식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LAS의 첫 ‘Sensing Quantum’ 전시에서 선보인 로르 프루보스트(Laure Prouvost)의 전시 <WE FELT A STAR DYING>(2025)은 양자 AI 시스템을 활용한 대규모 설치 영상과 사운드를 선보였다. 그러나 제작 과정에서 동원된 과학 이론과 협업 구조, 기술적 프로세스는 이론적으로는 정교했으나, 정작 작품은 복잡한 개념을 단순한 감각적 자극으로 환원하는 데 그쳤다. 그 속에서 사실과 허구를 유머러스하게 교차시키는 프루보스트 특유의 섬세한 감각은 오히려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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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시 머지않아 ‘양자역학’을 주제로 한 작품과 전시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미 세계 상위권의 양자컴퓨팅 인프라와 기술력, 그리고 새로운 매체에 민감한 미술 생태계를 갖춘 한국 미술계가 이 흐름을 외면하긴 어려워 보인다. 그런 점에서 위그의 이번 전시를 포함한 LAS의 ‘Sensing Quantum’ 프로그램은 중요한 선례이자 동시에 경고로도 읽힌다. 양자컴퓨터가 계산한 데이터를 사운드로 변환하거나, AI가 생성한 이미지를 전시장에 걸어 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양자적 사유를 시각화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첨단 기술을 사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양자적 세계관이 우리의 존재 이해와 인식 방식을 어떻게 전환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기술은 예술의 언어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예술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피에르 위그 〈Liminals〉 전
장소 베를린 할레 암 베르크하인(Halle am Berghain)
기간 2026년 1월 23일 – 3월 8일
웹사이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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