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의 살아있는 전설의 모든 것
37년, 한 브랜드의 미학을 완성한 베로니크 니샤니앙의 기록
에르메스 남성복 아티스틱 디렉터 베로니크 니샤니앙은 37년간 한결같은 미학으로 브랜드의 정체성을 다져온 인물이다. 조용한 럭셔리와 절제된 우아함을 구현해온 그녀의 마지막 컬렉션과 함께 에르메스 남성복이 걸어온 시간의 깊이를 되짚는다.

지난 몇 년 동안 패션계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는 장기간 누적된 실적 부진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한편으로는 지지부진한 브랜드의 이미지에 새로운 분위기를 선사하기 위한 전략적 전환이기도 했다. 브랜드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였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의 연이은 퇴임과 새로운 인물들의 부임 소식은 패션을 사랑하는 이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는 설렘과 기대감으로 전환되었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던가. 그렇게 한차례 거센 폭풍이 지나간 후 맞이한 패션위크에서는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이 선보이는 컬렉션에 대한 관심으로 뜨거웠다. 디올의 조나단 앤더슨과 샤넬의 마티유 블라지는 그중 가장 뜨거운 이슈메이커였다. 그리고 이 두 디자이너들은 올해 1월에 이어진 파리 패션위크에서도 어김없이 화제의 중심에 서며 업계와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렇게 2026년을 시작하는 패션위크에서는 이전과 분명히 다른 새로운 흐름과 가능성으로 가득한 모습이 있었다.

이처럼 쉴 새 없이 변화와 전환을 거듭해오고 있는 패션계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디렉터들이 있다. 그중 에르메스의 남성복 아티스틱 디렉터인 ‘베로니크 니샤니앙(Véronique Nichanian)’은 무려 37년간 한결같이 브랜드의 정체성을 이끌어온 인물로 유명하다. 그와 더불어 주요 명품 패션 하우스에서 남성복 부서를 이끄는 몇 안 되는 여성 중 한 명이기도 하다.
1954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베로니크 니샤니앙은 ‘패션계의 하버드’라 불리는 ‘파리의상조합학교(École de la Chambre Syndicale de la Couture Parisienne)’에서 패션을 배웠다. 현재는 프랑스 패션학교(Institut Français de la Mode)로 통합된 이 학교는 이브 생 로랑, 칼 라거펠트, 이자벨 마랑 등 수많은 거장을 배출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후 그녀의 패션 경력은 1976년 니노 세루티(Nino Cerruti)가 이끌던 세루티에서 남성복 디자이너로 일하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에르메스와의 인연은 1988년 당시 에르메스 회장인 장-루이 뒤마(Jean-Louis Dumas)의 선택에서 비롯되었다. 뒤마는 니샤니앙을 남성복 디렉터로 영입했고, 이후 디자이너는 2025년까지 특유의 재능과 신념으로 에르메스 남성복을 이끌며 견고한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에르메스는 니샤니앙에 대해 “늘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디자이너는 언제나 완벽한 균형감을 유지하며, 품질에 대한 엄격함과 에르메스 특유의 유머에 있어서 단 한 치의 타협도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니샤니앙이 에르메스에 남긴 유산은 그녀가 머문 시간만큼이나 깊고 풍성하다. 패션계의 여러 매체들은 그녀가 ‘절제된 우아함’을 추구하며 에르메스 남성복 라인을 하나의 독립적인 ‘우주’로 성장시켰다고 입을 모은다. 고급스러운 소재,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컬러 팔레트, 완성도 높은 마감과 섬세한 디테일은 그저 눈으로 보았을 때보다 입었을 때 그 진가를 드러내며 전 세계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니샤니앙은 즉각적으로 눈에 띄기보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드러나고 가까이에서 경험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미학인 ‘조용한 럭셔리(Quiet luxury)’ 그 자체의 디자인을 구현해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녀가 다져온 에르메스의 미학과 가치는 이제 브랜드를 이루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아 빛나고 있다. ‘언제 입어도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감싸며 고급스러움을 잃지 않는 디자인’이 바로 에르메스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니샤니앙의 디자인 비결에는 소재에 대한 치열하고 집요한 연구가 자리하고 있다. 소재 사용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양한 스타일을 넘나들 수 있는 디자인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장인들의 축적된 기술력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긴 디자이너는 에르메스 내부 태너리 및 텍스타일 아틀리에와 긴밀한 협업을 이어왔다. 이와 같은 협업을 통해 악어가죽, 실크, 캐시미어 등과 같은 에르메스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소재를 재정의하고 실험하며 혁신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기능과 미학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독특한 소재들이 탄생했다. 리버시블로 활용 가능한 가죽 소재를 비롯하여 방수 처리된 실크, 알루미늄 호일처럼 바스락거리며 광택이 인상적인 테크니컬 패브릭, 종잇장처럼 얇은 가죽 등, 모두 오랜 세월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디자이너의 노력의 흔적이다. 이와 같은 기술의 축적은 에르메스 남성복의 경쟁력을 높이는 핵심 기반으로 작용하며 ‘에르메스가 에르메스다울 수 있게’ 했다.
이와 같이 브랜드의 기반을 만들며 패션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해온 그녀의 기록은 아쉽게도 이번 패션위크를 끝으로 마침내 막을 내렸다. 이 결정은 2년간의 논의 끝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디자이너는 매체와 인터뷰를 통해 퇴임에 관하여 에르메스 CEO 악셀 뒤마(Axel Dumas)와 총괄 아티스틱 디렉터 피에르 알렉시 뒤마(Pierre-Alexis Dumas)와 함께 논의해왔다고 말하며, “이제 바통을 넘길 때가 되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한 사람이 태어나 성인이 되고도 남을 시간 동안 단 한 브랜드에서 흔들림 없이 디자인 철학과 색을 유지했던 디자이너의 마지막 컬렉션은 지난 1월 22일, 파리 증권거래소였던 브롱니아르 궁전(Place de la Bourse)에서 진행되었다. 에르메스의 2026년 F/W 멘즈 컬렉션에서는 니샤니앙이 늘 그러했듯 편안함을 중심에 둔 룩들로 채워졌다. 구조적이면서도 섬세하게 조율된 그녀의 마지막 에르메스 컬렉션은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니샤니앙다운 컬렉션’이라는 평을 얻었다.





몸의 선을 절제되게 드러내는 슈트들 사이로 가죽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디자인이 이어지며 컬렉션의 흐름을 완성했다. 스티치 디테일이 돋보이는 가죽 슈트, 악어가죽의 질감을 살린 코트와 팬츠는 에르메스만의 장인 정신을 분명히 드러내는 요소들이었다. 여기에 걸을 때마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스웨터와 머플러, 은은한 핀스트라이프, 잔잔한 톤의 체크 패턴 등이 어우러지며 가을·겨울 시즌 특유의 따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자칫 담백하게만 느껴질 수 있는 컬렉션에 노란색, 핑크색과 같은 컬러들이 포인트로 더해지면서 절제 속에서도 유연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흐트러짐 없는 통일성과 그 안의 미묘한 변주가 담겨있는 쇼에서 37년 동안 한 브랜드의 미학을 다져온 디렉터의 깊은 내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모델의 피날레가 끝난 후, 니샤니앙이 그동안 보낸 수많은 런웨이 무대 영상이 쇼장 곳곳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상영되면서 디자이너의 등장을 알렸다. 쇼를 찾은 수많은 관객들이 기립 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화이트 셔츠와 블랙 팬츠로 차분한 룩을 연출한 디자이너가 런웨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쏟아지는 환호 속에 인사를 건네는 디자이너의 얼굴에는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한, 혹은 쇼의 마지막 순간에 감격한 듯한 환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에릭 클랩튼의 〈포에버 맨(Forever Man)〉이 배경으로 흐르는 가운데, 과거 런웨이 인사 장면들이 현재와 교차하는 풍경은 디자이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데 있어 오래도록 기억될 결정적인 한 장면으로 남을 듯하다. 후련한 듯한 얼굴로 패션쇼장을 떠나는 디자이너의 모습에서, ‘박수 칠 때 떠나는 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에르메스는 니샤니앙의 후임으로 ‘웨일스 보너(Wales Bonner)’를 임명했다. 2014년에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론칭한 이후 LVMH 영 디자이너상, CFDA 국제 남성복 디자이너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아온 보너는 패션에 대한 공로로 대영 제국 훈장(MBE)을 수여받은 바 있다. 우리에게는 아디다스와 협업을 통해 익숙해진 이름이기도 하다.그런 그녀가 에르메스의 남성복 디렉터로 부임한다는 소식은 다시 한번 업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특히 주요 명품 패션 하우스를 이끄는 최초의 흑인 여성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더욱 크다. 스포츠웨어, 테일러링, 폭넓은 문화적 연구를 패션에 녹여내는 디자이너가 에르메스라는 하우스 안에서 어떤 해석을 보여줄지에 대한 기대와 관측이 이어지고 있다. 보너의 데뷔 컬렉션은 2027년 1월에 공개될 예정으로, 니샤니앙이라는 거대한 과거를 넘어서 보너가 펼쳐 보일 새로운 에르메스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