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선의 규칙으로 다시 쓰는, 소피 타우버-아르프의 추상 언어

The Rule of Curves

하우저 앤 워스 파리의 <곡선의 규칙> 전은 소피 타우버-아르프를 미술사적 관점에서 재정립한다. 남편의 그늘을 벗어나 다다와 추상, 공예와 순수미술을 가로지른 그의 독창성을 조명한다. 직선의 시대에 유연한 ‘곡선’으로 현대미술의 새 계보를 그린 작가의 40년 궤적을 45점의 작품으로 압축해 보여준다.

곡선의 규칙으로 다시 쓰는, 소피 타우버-아르프의 추상 언어

하우저 앤 워스 파리(Hauser & Wirth Paris)에서는 20세기 아방가르드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소피 타우버-아르프(Sophie Taeuber-Arp)의 개인전 <곡선의 규칙La règle des courbes(The Rule of Curves)>이 열리고 있다. 1916년부터 1943년까지 약 40년에 걸친 회화, 드로잉, 구아슈, 목조 릴리프, 그리고 다다 헤드(Dada Head)를 포함해 45점 이상의 작품을 선보이며, 작가의 조형 언어를 ‘곡선’이라는 핵심 개념을 통해 체계적으로 조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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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내부 ‘Sophie Taeuber-Arp. La règle des courbes / The Rule of Curves,’ Hauser & Wirth Paris, 2026. ©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Courtesy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and Hauser & Wirth. Photo: Nicolas Brasseur

미술사학자 브리오니 퍼(Briony Fer)가 큐레이션을 맡은 이번 전시는 작품 판매를 전제로 한 일반적인 상업 갤러리 전시의 형식과 구별된다. 출품작 상당수가 독일 아르프 재단(Stiftung Hans Arp und Sophie-Taeuber-Arp e.V.)을 비롯한 공공 및 주요 컬렉션에서 대여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가의 작업 세계를 시장 논리가 아닌 미술사적 맥락 속에서 재조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상업 갤러리에서 이러한 전시를 구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판매와 직결되지 않는 대규모 대여, 학술적 큐레이션, 장기간의 연구를 필요로 하는 전시는 수익 구조와 효율을 중시하는 갤러리 시스템과 긴장 관계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우저 앤 워스는 이를 통해 소피 타우버-아르프를 ‘거래되는 작가’ 보다 20세기 모더니즘의 핵심 인물로 재위치시키는 데 주력한다. 이는 갤러리가 시장의 중개자를 넘어 미술사적 서술을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름을 되찾은 다다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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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앉아있는 소피 타우버-아르프, Strasbourg, France, 1927 ©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Courtesy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and Hauser & Wirth

제1차 세계대전 중 취리히에서 시작된 다다이즘은 이성, 질서, 합리성을 신봉하던 근대 문명에 대한 급진적인 거부가 출발점이었다. 다다는 양식이나 스타일이라기보다 예술의 의미와 목적 자체를 의심하는 반예술적 실천으로 우연, 놀이, 비논리, 파편화된 형식은 다다이즘의 핵심 어휘였고, 이는 회화와 시, 퍼포먼스, 무대, 음악을 넘나들며 기존 예술 제도의 권위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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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아르프와 소피 타우버-아르프, Arosa, 1918 ©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Courtesy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and Hauser & Wirth

타우버-아르프는 이러한 다다 정신을 이론이 아닌 실천을 통해 구현한 20세기 전위미술의 핵심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남편이자 동시대 조각가 한스 아르프(Hans Arp)의 명성에 가려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어 왔다. 그녀는 종종 아르프의 아내 혹은 다다이즘 주변부의 인물로 언급되었고, 텍스타일, 무대, 인테리어 등 응용미술 영역에서의 활동은 순수미술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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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 헤드와 소피 타우버-아르프, 1920. Photo: Nic Aluf ©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Courtesy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and Hauser & Wirth

이러한 인식은 20세기 미술사가 회화와 조각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구조적 한계, 그리고 여성 예술가의 작업을 장식이나 공예로 분류해온 오랜 관행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타우버-아르프의 작업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녀는 다다와 기하학적 추상, 응용미술과 순수미술 사이의 경계를 누구보다 급진적으로 가로질렀다. 오히려 남편 한스 아르프보다 일찍 비구상적 언어를 체계화했으며, 회화, 조형, 공간, 신체를 포괄하는 여러 실천을 통해 모더니즘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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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Sophie Taeuber-Arp. La règle des courbes / The Rule of Curves,’ Hauser & Wirth Paris, 2026. ©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Courtesy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and Hauser & Wirth. Photo: Nicolas Brasseur

소피 타우버-아르프의 다다이즘적 작업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1918년 제작된 ‘다다 헤드(Dada Head)’이다. 나무로 제작된 이 조형물은 인체를 연상시키는 형태를 띠고 있으나 얼굴의 표정이나 개성은 철저히 제거되어 있으며, 대신 기하학적 요소와 장식적 패턴이 결합되어 있다. 이는 초상이라는 장르 자체를 무력화하는 동시에, 인간 주체에 대한 근대적 개념을 해체하는 다다이즘의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또한 취리히의 카바레 볼테르와 갤러리 다다에서 선보였던 그녀의 무용 퍼포먼스와 인형극, 무대 인형 작업 역시 신체와 사물, 예술과 놀이의 경계를 흐리는 다다적 실천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타우버-아르프에게 다다는 기하학적 추상과 결합하며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직선의 시대를 휘어잡은 곡선의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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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내부, ‘Sophie Taeuber-Arp. La règle des courbes / The Rule of Curves,’ Hauser & Wirth Paris, 2026. ©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Courtesy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and Hauser & Wirth. Photo: Nicolas Brasseur

최근 10여 년간 소피 타우버-아르프에 대한 국제적 재평가는 미술사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조적 변화의 연장선으로 읽힌다. 여성 예술가의 역할을 재조명하려는 흐름, 장식, 텍스타일, 공예를 모더니즘의 핵심 언어로 다시 읽으려는 시도, 그리고 회화 중심의 근대 미술 서사를 확장하려는 학문적 움직임이 그것이다. 특히 그녀가 곡선과 원을 통해 구축한 조형 언어는 직선과 그리드가 지배하던 근대 추상의 또 다른 계보를 제시한다. 이는 기계적 합리성과 기능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추상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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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내부, ‘Sophie Taeuber-Arp. La règle des courbes / The Rule of Curves,’ Hauser & Wirth Paris, 2026. ©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Courtesy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and Hauser & Wirth. Photo: Nicolas Brasseur

전시 제목인 ‘곡선의 규칙(The Rule of Curves)’에는 규칙(rule)과 자(ruler)라는 중의적 의미가 담겨있다. 이는 곡선을 공간과 형태를 조직하는 원리이자 창작 세계를 측정하는 도구로 이해했던 타우버-아르프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데, 그녀는 프렌치 커브, 직선자, 컴퍼스 등 다양한 제도용 도구를 직접 연장처럼 사용하며 곡선과 원을 통해 기하학적 질서를 유연하게 변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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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osition with “U” Form, 1918 Gouache and pencil on cut-and-pasted paper on metallic foil on colored board 24.8 x 25.8 cm / 9 3/4 x 10 1/8 in ©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Courtesy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and Hauser & Wirth Photo: Alex Delfanne

1918년작 ‘U자 형태의 구성(Composition with “U” Form)’에서 볼 수 있듯, 초기 작업에서 이미 곡선은 화면의 구조를 지탱하는 핵심 요소로 등장한다. 이는 1930년대에 접어들며 더욱 유기적인 형태로 발전하며, 장식적 스크롤과 아라베스크가 단순한 기하학적 단위로 환원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접근은 당시 엄격한 직선과 각을 중시하던 구성주의적 추상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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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Sophie Taeuber-Arp. La règle des courbes / The Rule of Curves,’ Hauser & Wirth Paris, 2026. ©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Courtesy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and Hauser & Wirth. Photo: Nicolas Brasseur

1934년부터 시작된 ‘에슐로느망(Echelonnements)’ 연작은 곡선과 직선, 긍정과 부정의 공간이 공존하는 타우버-아르프의 조형 실험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에슐로느망’은 프랑스어로 ‘단계적 배열’ 혹은 ‘점층’을 뜻하는데, 형태들이 규칙적으로 정렬되기보다 서로 어긋나며 층층이 배치되는 구성을 특징으로 한다. 타우버-아르프는 이를 통해 곡선과 직선, 긍정과 부정의 공간이 리듬감 있게 전개되는 화면 구조를 만들어냈다.이 작품들에서 흰 형태는 색면 위에 놓인 오브제가 아니라, 마치 배경에서 도려낸 흔적처럼 보인다. 이러한 네거티브 공간의 활용은 형태와 바탕의 관계를 전복하며, 화면 전체를 하나의 리듬 있는 구조로 인식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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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chelonnement 1934 Gouache and pencil on paper 27.1 x 20.8 cm / 10 5/8 x 8 1/4 in
©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Courtesy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and Hauser & Wirth Photo: Alex Delfanne

말년인 1942년에 제작된 ‘기하학적 구성(Geometric Constructions)’ 드로잉들은 작가가 도달한 또 하나의 정점을 보여준다. 잉크와 종이, 자와 컴퍼스를 사용해 제작된 이 작품들에서 작가는 일부 영역을 흰색으로 덧칠하거나, 종이를 잘라 회전시키는 방식을 통해 원형의 운동감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요소들의 결합임에도 불구하고, 레이어링과 절단, 회전이라는 행위는 형태에 끊임없는 변주를 부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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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Sophie Taeuber-Arp. La règle des courbes / The Rule of Curves,’ Hauser & Wirth Paris, 2026. ©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Courtesy Stiftung Arp e.V., Berlin/Rolandswerth and Hauser & Wirth. Photo: Nicolas Brasseur

‘곡선의 규칙’전은 소피 타우버-아르프의 조형 언어를 체계적으로 제시하며, 그녀를 20세기 모더니즘의 주변이 아닌 중심으로 되돌려 놓았다. 또한 한스 아르프의 주변 인물이 아닌 하나의 독립적인 중심으로 재위치시키는 동시에, 오늘날 전시 공간이 미술사를 어떻게 다시 서술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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