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분화구부터 미술관 돔까지, 제임스 터렐이 빚어낸 감각의 파노라마
빛과 공간의 거장, 제임스 터렐의 예술 세계
빛의 거장 제임스 터렐의 60년 여정이 덴마크 오르후스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실내 신작으로 새로운 정점을 맞이했다. 최근 베일을 벗은 ‘As Seen Below’는 높이 16미터의 거대 돔 안에서 빛과 하늘을 집약해낸 거장의 마스터피스다. 사막의 로덴 분화구에 버금가는 압도적 규모로 ‘넥스트 레벨’이라 불리는 이번 신작은 오는 6월 19일에 대중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강원도 원주의 산자락에 자리한 ‘뮤지엄 산’은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설계로 완성된 미술관이다. 대지와 하늘, 그리고 사람을 잇고자 한 건축가의 철학이 고스란히 스며든 이곳은 ‘소통을 위한 단절(Disconnect to connect)’이라는 슬로건 아래 자연과 예술, 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휴식을 선사한다. 덕분에 분주한 일상 속에서 잊고 지냈던 삶의 여유를 다시금 되찾게 하는 곳으로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고 있다.
이곳의 정점은 ‘빛과 공간의 예술가’로 불리는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의 대표작 다섯 점이 설치되어 있는 ‘제임스 터렐관’이라고 할 수 있다. 치밀하게 계산된 빛의 흐름 속에서 색과 공간의 변주가 이루어지는 작품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작품들 속에서 명상하듯 거닐다 보면 어느덧 미술관에서의 여정이 마무리된다.
제임스 터렐의 예술 여정, 그 시작은?
이토록 경이로운 빛의 공간을 설계한 제임스 터렐은 어떻게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된 걸까. 그의 예술적 뿌리는 1943년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그가 마주했던 유년의 풍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항공 엔지니어였던 아버지와 평화봉사단에서 일했던 어머니는 모두 독실한 퀘이커 신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파일럿을 꿈꾸며 비행기 조종 자격증을 갖춘 것도, 명상과 침묵을 중시하는 종교적 철학을 작품에 녹여낸 것도 모두 부모님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저는 꿈의 빛을 만져 현실로 가져와 생생한 꿈처럼 강렬한 새로운 빛의 세계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제임스 터렐
터렐은 포모나 대학(Pomona College)에서 인지심리학을 전공하며 동시에 수학, 지질학, 천문학 등 다양한 학문을 넘나들었다. 그런 그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예술’이었다. 그는 15살 때 접한 토머스 윌프레드(Thomas Wilfred)의 빛을 활용한 전시회에 감명을 받았고, 빛을 매개로 한 예술을 하기로 결심한다.

1966년부터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UC Irvine)에서 스튜디오 아트를 공부하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터렐은 ‘프로젝션 피스(Projection Pieces)’를 비롯하여 빛, 공간, 지각의 관계를 주제로 한 다양한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1973년에 클레어몬트 대학원(Claremont Graduate School)에서 예술 석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1974년에는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s)’를, 1976년에는 ‘간츠펠트(Ganzfelds)’ 시리즈를 발표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업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터렐의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빛과 공간을 기반으로 단순히 ‘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관람자가 ‘보고 있다는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게 만드는 경험’을 핵심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미술 감상 방식과 결을 달리하는 이 몰입형 경험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감각과 인식의 경계에 대해 새롭게 질문하게 만든다. 자연환경을 토대로 작업을 이어오던 그는 2000년대에 접어들며 네온과 LED를 활용하여 빛에서 나올 수 있는 다채로운 색채의 스펙트럼을 탐구하며 작업 세계의 새로운 챕터를 열었다.

이처럼 독보적인 작품들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온 작가는 전시의 무대를 미국에서 전 세계로 확장하며 빛과 공간이 선사하는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중이다. 국내에서는 뮤지엄 산 외에도 여러 차례 개인전이 열리며 공감각의 새로운 경험을 누릴 수 있는 순간이 마련되었다. 지난해에는 서울 한남동 페이스갤러리에서 개인전〈더 리턴(The Return)〉을 선보였으며 올해에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개관 40주년을 기념하는 대형 프로젝트 계획에 그의 작품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져 팬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사막에 새긴 예술 세계
작품이 전시되는 곳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터렐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작업은 ‘로덴 분화구 프로젝트(Roden Crater project)’다. 이는 애리조나 사막 한가운데 있는 약 40만 년 된 사화산 분화구를 거대한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이다. 광활한 하늘을 배경으로 달, 별, 태양의 움직임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천문학적 공간을 구현하기 위해 작가는 분화구 내부에 6개의 터널과 24개의 관측 공간을 설계했다. 인공적 요소를 최소화하며 사막과 하늘, 빛을 매체로 한 작품은 1977년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진행 중에 있다.

로덴 크레이터에서 저는 예술이라는 문화적 인공물을 자연환경 속으로 가져오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작품이 자연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태양, 달, 별빛이 가득 채워지며 자연 속에 녹아들기를 바랐습니다. 마치 지구 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제임스 터렐

이처럼 전례 없는 규모의 작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은 물론이고 막대한 자금 투자는 필수적이었다. 이에 터렐은 분화구 주변에 창의적이면서도 과학적인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동시에 애리조나 주립대와 제휴를 통해 약 2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조성하며 프로젝트의 기반을 다졌다. 이러한 그의 비전과 집요한 실천은 예술계를 넘어 다양한 인물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19년에는 세계적인 래퍼이자 디자이너인 예(ye, 카니예 웨스트)가 직접 로덴 분화구 프로젝트를 감상하고 1천만 달러를 후원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빛 그 자체를 물질적인 존재로 경험하게 하며, 하늘과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일깨우게 만드는 작업은 터렐의 예술 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궁극의 프로젝트로 평가받고 있다. 이 프로젝트가 언제 완성될지는 미지수이지만, 현재 진행형인 지금에도 놀라움과 경외감을 주는 작품임은 분명하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세계적인 명성을 이어나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로덴 분화구 프로젝트만큼이나 거대한 규모로 진행 중인 작업은 또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알울라(AlUla) 지역에서 예술과 자연의 독특한 융합을 보여주는 대규모 야외 예술 프로젝트 ‘와디 알판(Wadi AlFann)’에서 선보일 새로운 스카이스페이스 작업이다. 작가는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거대한 협곡 바닥에 터널과 계단으로 연결된 하나의 방을 조성할 예정이다. 관람객들은 이 공간을 직접 탐험하며 빛이 공간과 자연 속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변화하는지를 직접 체험하게 된다.
터렐은 자신이 성장한 애리조나의 사막 지형과 알울라의 풍경이 유사하다고 느꼈고, 알울라가 마치 집처럼 느껴졌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습기가 거의 없는 알울라의 건조한 공기가 만들어내는 선명하고 투명한 빛은 그의 작업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예정이다. 해당 대지 예술 프로젝트의 설계 도면과 렌더링 이미지, 별자리 지도 등은 지난해 알울라 아트 페스티벌(AlUla Arts Festival)을 통해 공개되었으며, 프로젝트의 완공은 올해로 예정되어 있다.
오르후스 미술관에서 만날 신작 미리보기

Smidstrup © ARoS, 2025. From James Turrells visit in As Seen Below, June 2025.
이러한 대지적 프로젝트와 더불어, 지난 1월 19일에는 그의 작품 세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실내 전시관 소식이 공개되며 화제를 모았다. 덴마크의 오르후스 ARoS 미술관에 설치될 새로운 스카이스페이스 작품 ‘As Seen Below(아래에서 볼 수 있듯이)’는 미술관 내부에 조성된 터렐의 작업 중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미술관 측은 작품 공개와 함께 역사적인 ‘넥스트 레벨’을 완성했다고 소감을 전하며 이번 프로젝트의 의미를 강조했다.

Smidstrup © ARoS, 2025. From James Turrells visit in As Seen Below, June 2025.

Smidstrup © ARoS, 2025. From James Turrells visit in As Seen Below, June 2025.
높이 16미터, 지름 4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돔 형태의 공간 안에서 터렐이 정교하게 설계한 빛은 내부를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인다. 하늘을 향해 열린 원형의 개구부는 끝없이 펼쳐지듯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는 듯한 시각적인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색과 빛이 우리 감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관찰할 수 있는 이 작품은 특히 일출과 일몰 시간에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선사한다. 이 시간대에 맞춰 진행되는 조명 연출은 자연의 리듬과 계절의 흐름에 깊이 몰입하게 하며, 자연과 하늘,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인간과 지구의 관계를 사유하게 만든다.

Smidstrup © ARoS, 2025.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빛과 공간을 매개로 감각과 인식의 경계를 끊임없이 탐구해온 제임스 터렐은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가 특별히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로덴 분화구 프로젝트를 비롯해 올해 공개될 여러 작업들 역시 이전과 다르지 않게 우리를 또 하나의 새로운 예술적 차원으로 이끌 것이다.
터렐의 작품 속에서 마주하는 빛은 시각적 아름다움을 넘어, 사유와 명상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매개체가 된다. 그리고 그 고요하고도 숭고한 경험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늘 새롭게 다가온다. 빛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여정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기를,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스스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