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에서 시작하는 세계, 정구호

구호, 르베이지, 휠라, 빈폴, 호암·리움미술관…. 수많은 브랜드가 그의 손에서 탄생하거나 재정비됐다. 정구호는 언제나 세계관을 먼저 설정하고 그 위에 내러티브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브랜드를 다뤘다. 이 과정은 단순한 이미지의 변화를 넘어 브랜드를 해석하고 소비하는 방식을 근본부터 재설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제 그는 무대를 옮겨 공연에서도 새로운 세계관을 선보이고 있다. 그가 구축 중인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뿌리에서 시작하는 세계, 정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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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호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공부한 뒤 귀국해 여성복 브랜드 구호를 선보였다. 2003년부터 제일모직에 합류해 여성복 디자인을 총괄하며 르베이지, 데레쿠니, 헥사 바이 구호 뉴욕 컬렉션 등을 론칭했다. 이후 쌈지 대표, 휠라코리아와 제이에스티나 부사장 등을 역임했고, 서울패션위크와 공예트렌드페어 총감독을 맡기도 했다. 현재 리움미술관, 인디에프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그는 영화 〈정사〉 〈텔미썸딩〉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황진이〉 등의 아트 디렉터를 맡았고, 국립무용단과 함께 〈묵향〉 〈향연〉 〈산조〉 등을 창작하는 등 폭넓은 창작 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가 연출한 〈단심〉은 지난해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에서 특별 공연으로 선보였고, 서울시무용단과 협업한 〈일무〉를 뉴욕 링컨 센터에 올려 전석 매진을 이루기도 했다. @jung_kuho

정구호의 브랜딩 커리어를 이야기할 때 시작점인 ‘KUHO(구호)’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어떤 세계관과 내러티브를 그리고자 했나?

내 이름을 건 브랜드인 만큼 출발점은 나 자신이었다. 패션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패션 브랜드를 론칭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디테일이나 색보다는 옷의 기본 구조, 형태와 실루엣에 집중했다. 그래서 컬러도 검정, 회색, 곤색, 흰색 네 가지로 제한했고 소재도 울, 코튼, 실크 같은 내추럴한 것만 사용했다. 기본 콘텐츠를 최대한 압축한 뒤 밸런스와 구조를 통해 나만의 형태와 스트럭처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미니멀하고 구조적인 인상이 강해졌고, 여기에 ‘한국적 미니멀리즘’이라는 말이 뒤늦게 붙게 된 것 같다. 사실 구호를 론칭할 때는 타기팅도 하지 않았다. 나와 취향이 맞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입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감성 기준의 타깃은 브랜드로서 상당히 이상적인 형태이며, 해외에서는 이미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브랜드가 많다. 다만 한국은 시장 규모가 작다 보니 효율을 위해 타깃을 세분화하는 전략이 필요해 나 역시 부득이 전략을 수정하게 됐다. 하지만 문화와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한국도 점차 감성 중심 타깃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본다.

이후 르베이지 등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하고 휠라나 빈폴처럼 리브랜딩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신규 론칭과 리브랜딩의 비율은 어느 정도인가?

대략 5 대 5 정도이다. 의외로 신규 브랜드를 만드는 쪽이 더 쉽다. 새로운 세계관과 내러티브를 설정하고 타깃과 포지셔닝을 정한 뒤 새로운 소비자와 커뮤니케이션을 만들어가면 되기 때문이다. 아모레퍼시픽의 탈모 샴푸 ‘려’가 그렇다. 경옥고라는 약재를 브랜드의 핵심 세계관으로 설정했다. 조선 시대 왕으로부터 하사받아 대대로 전해 내려온 이 가보를 집안 여인들이 물에 희석해 머리를 감아 풍성한 머릿결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를 커뮤니케이션의 틀로 구성한 것이다. 탈모 샴푸는 대개 한방 이미지를 떠올리기 때문에 갈색 계열 패키지가 일반적인데, 보라색을 제안하며 또 하나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기도 했다. 반면 리브랜딩은 기존 타깃의 일부를 내려놓아야 하고, 동시에 새로운 타깃에 브랜드가 달라졌다는 점을 이해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만큼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더 많이 든다. 그래서 리브랜딩을 요청받을 때면 차라리 신규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되묻기도 한다.

그럼에도 리브랜딩을 통해 다시 안착시킨 브랜드가 적지 않다. 접근 방식이 궁금하다.

가장 먼저 브랜드의 뿌리, 즉 세계관과 철학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휠라를 리뉴얼할 때 그랬다. 휠라는 원래부터 완벽한 기능성을 강조한 스포츠웨어 라인과 스트리트웨어 성격의 라인을 모두 갖고 있었다. 당시에는 스트리트 패션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고 판단해 그런 성격을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힙합 무드를 입히며 로고 플레이를 다양하게 전개했는데 시장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리움미술관도 접근이 비슷했다. 세계적 건축가들이 만든 공간이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새로 더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구조와 요소들을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조명, 동선 및 공간 안의 여러 요소를 구조 안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중요한 것은 새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뿌리 중 무엇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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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호가 총괄한 리움미술관 리노베이션.
그 포인트가 가장 어렵다. 무엇을 살리고 버릴지는 어떻게 정하는가?

일단 타성을 없애야 한다. 가령 어떤 브랜드의 투버튼 재킷이 베스트셀러라고 하자. 그런데 이를 10년, 20년 동안 계속 유지하고 있다면 리뉴얼이 필요하다고 느낄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과연 투버튼이 코어, 즉 뿌리인가 하는 점이다. 투버튼은 절대 코어가 아니다. 뿌리는 철학이고, 세계관이고, 콘셉트이다. 이것만 명확하다면 원버튼이든 투버튼이든 등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풀 수 있다. 하지만 많은 브랜드가 MD, 세일즈 기준만 따라가다 보니 결국 브랜드가 노쇠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1등일 때 리뉴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주기적으로 조금씩 변화를 주면서 소비자들이 변화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소비자와 기존 소비자가 자연스럽게 섞인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뿌리, 즉 세계관이라는 말로 들린다.

맞다. 세계관은 룰이자 바이블이다. 브랜드를 기획하고 관리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포인트를 정리해 놓은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어떤 담당자로 바뀌느냐에 따라 브랜드는 언제든지 개인 취향대로 흔들릴 수 있다. 그래서 브랜드 북이 중요하다. 브랜드의 철학과 뿌리를 정리해두고, 그것을 다음 담당자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계관이 탄탄하게 잡히면 내러티브는 얼마든지 더할 수 있다. 레트로가 트렌드라면 레트로의 언어로, 퓨처리스틱한 감성이 유행이라면 또 그 방향으로 풀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의 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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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푸드홀의 리뉴얼 작업, ‘가스트로테이블’도 정구호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았다.
그렇다면 세계관을 가장 잘 만들고, 또 지켜나가고 있는 브랜드는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무인양품. 처음부터 세계관을 매우 포용적으로 설계했기 때문에 어떤 장르의 상품이라도 전혀 이질감이 없다. 그래서 사탕도, 라면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인양품 같은 브랜드를 만드는 일은 그 어떤 브랜드를 기획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아쉬운 사례는 애플이다. 스티브 잡스 시절 애플은 분명한 세계관이 있었고, 그 세계관이 제품과 공간, 커뮤니케이션 전반을 관통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세계관이 많이 흐려졌다고 여긴다. 기능과 스펙은 남아 있지만 브랜드가 어떤 삶의 태도를 제안하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세계관이 약해지면 내러티브는 결국 기술 설명이나 캠페인 문구로만 남게 된다.

최근에는 연출가로서 다양한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공연을 기획할 때도 비슷하게 접근하나?

조금 다르다. 공연, 특히 한국무용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옷보다도 먼저였다. 처음 〈묵향〉을 기획했을 때는 한국무용의 기본 동작과 구조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보이게 할 것인가에 포인트를 두었다. 다만 공연은 관객이 있어야 성립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내러티브는 필요했다. 그래서 ‘매난국죽’이라는 비교적 익숙한 프레임으로 관객이 따라올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다음에 선보인 〈향연〉에서는 서사를 조금 더 느슨하게 하고, 한국무용의 여러 형식과 움직임 자체를 보여주는 데 비중을 두었다. 〈일무〉에서는 이야기의 장치를 더 줄이고 군무의 구조와 움직임, 리듬 같은 무용 자체의 언어를 전면에 내세우는 쪽으로 기획했다. 작품 안의 서사는 점점 줄어들었지만, 대신 내가 어떤 방식으로 무용을 바라보고 무엇을 강조하고 싶은지는 더 분명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각각의 공연은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나’라는 세계를 조금씩 쌓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최종적으로는 이야기보다 움직임과 구조 자체로 성립하는, 보다 아방가르드하고 실험적인 형태의 공연을 선보이는 것이 목표다. 그럼에도 관객이 내가 쌓아온 세계를 믿고 극장에 와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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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의 신태평무 공연 장면.
〈일무〉가 한국을 넘어 세계적 찬사를 받으며 상까지 수상한 걸 보면 그 목표에 가까워진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한국의 정서처럼 특정한 문화적 맥락에서 출발한 세계관을 더 넓은 세계에 전할 때 ‘번역’의 문제는 없었나?

고민이 많았다. 전통과 현대의 비율이 7 대 3이었던 한국에서와 달리 미국에서는 5 대 5 정도로 조정했다. 사실 해외에서 전통 공연을 하면서 그냥 ‘이해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왜 이 공연을 봐야 하느냐는 질문에 “요즘 K-팝과 K-컬처가 큰 관심을 받고 있는데, 어디에서 왔는지 그 뿌리가 궁금하다면 이 공연을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이 작업이 한국적 맥락을 넘어 하나의 독립적인 무용 언어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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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무〉. 종묘제례악의 의식무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대규모 군무 작품이다. 최근 무용계의 오스카라 불리는 베시 어워드에서 최우수 안무가·창작자상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런던 슬래드모어 갤러리에서 한국 고유의 전통 가구인 ‘반닫이’ 시리즈를 선보이기도 했다.

계기는 영화 〈황진이〉 작업이었다. 당시 자료를 조사하다가, 병풍이 아니라 장(欌)을 쌓아두고 그 앞에 앉아 있는 사진을 보았는데, 그중에서도 개성 반닫이의 장식성과 구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흔히 한국의 미감을 미니멀리즘으로만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맥시멀한 전통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문제는 이런 가치 있는 공예가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활용도가 떨어지면서 박물관의 유물처럼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그래서 반닫이를 단순히 재현하는 대신 지금의 재료와 구조로 다시 해석해 ‘쓰일 수 있는 오브제’로 만들고 싶었다. 전통의 형태와 장석의 논리를 살리되 현대적인 재료와 방식으로 재구성한 것도 그 때문이다.

최전선에서 한국을 브랜딩하는 주인공이란 생각마저 든다. 그런 입장에서 지금 한국이라는 브랜드를 평가한다면?

지금 한국이라는 브랜드에는 정말 많은 기회가 있다. K-팝, K-드라마, K-푸드처럼 이미 세계적으로 작동하는 키워드들이 생겼고, 관심도 굉장히 높다. 문제는 그 관심이 대부분 트렌드와 이슈에만 반응하는 방식으로 소비된다는 점이다. 물론 가벼움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밑단에 있는 깊숙한 이야기까지 함께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계기로 호작도가 유행을 한다면, 그것을 캐릭터로만 소비할 것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로도 만들고, 여러 방식으로 더 깊게 파고드는 콘텐츠도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해외에서는 하나의 문화에 빠지면 그 배경과 맥락까지 알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수요에 비해 우리는 아직 그 깊이를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것 같다. 가벼움과 깊이가 균형을 이룰 때 한국이라는 브랜드도 지금보다 더 단단해진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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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호의 작품 ‘Chrysanthemum-Patterned Bandaji’. 런던 슬래드모어 갤러리 연례전에서 선보였다. 사진 Grid ⓒ더페이지갤러리
브랜딩부터 공연, 공예 등 정말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을 관통하는 ‘정구호 유니버스’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내가 다양한 일을 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나는 한 가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고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해내는 일이다. 언젠가 내가 이 세상에 없어진 뒤에 누군가 나를 연구한다면 나는 특정한 타이틀이나 장르로 규정되기보다는 내가 중요하다고 믿었던 가치들을 여러 방식으로 풀어낸 흔적의 집합으로 읽히면 좋겠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그 흔적을 하나씩 더 쌓아가는 과정이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73호(2026.03)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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