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속 한지의 온기, 고소미 <다양체>
스페이스 톤에서 열리는 고소미 개인전
합정동 스페이스 톤에서 고소미 개인전 〈다양체〉가 열리고 있다. 노출 콘크리트 건축 안에 한지와 섬유라는 따뜻한 재료가 자리하며, 그 대비가 만들어내는 온기를 오롯이 보여준다.

비슷해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차이를 발견하는 일. 고소미 작가의 ‘다양체(Multiplicity)’는 거기서 출발한다. 한지 섬유가 겹겹이 쌓여 형태를 이루는 과정은 저마다 다른 기억과 관계가 한 사람의 고유한 결을 만들어가는 시간과 닮아 있다.

합정동 스페이스 톤에서 고소미 작가 개인전 〈다양체〉가 열린다. 작가는 한지 섬유의 물성을 바탕으로 조형과 공간을 넘나드는 설치 작업을 이어왔다. 6개월에 걸친 이번 전시에서 ‘다양체’ 연작은 공간 전체에 채운다. 차갑고 견고한 노출 콘크리트 안에 한지와 섬유라는 따뜻한 재료가 자리하며, 그 대비가 만들어내는 온기를 오롯이 보여준다.

불완전함이 전하는 존엄의 형태
‘다양체’는 철사 프레임 위에 작가가 직접 물레로 꼰 한지실 ‘소미사(小魅絲)’를 감아올린 뒤 입체 초지 기법으로 마무리한 작업이다. 한지 뜨는 물에 작품을 통째로 담갔다 꺼내는 이 기법을 통해 어떤 부분은 두텁게 입혀지고 어떤 부분은 얇게 남는다. 완성된 형태에는 빈틈과 구멍이 고스란히 존재한다.

일반적인 한지 조명이 표면을 고르게 메우는 것과 달리, 이 작품들은 채워지지 않은 부분과 모자란 부분까지 그대로 드러낸다. 불완전한 형태는 오히려 인간을 닮아 있다. 외관상 비슷해 보여도 타자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 고유함 자체가 곧 존엄이라는 메시지다. 전시장 내 다양체들은 크기 주름의 깊이, 한지의 농도가 제각각이다.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으나 똑같은 결과물은 단 하나도 없다.
“모든 존재자는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실존’하며, 각 존재자 고유의 기억과 인연에 의해 생긴 습곡 때문에 다른 존재자와 구별되는 개별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존재자는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운동하며, 성장하고 사멸하는, 다시 말해 생성의 과정에 있는 <다양체>이다.”
전시 리플렛에서
층마다 달라지는 빛의 밀도
스페이스 톤은 지하 1층부터 2층까지 수직으로 관통하는 구조를 가진다. 고소미 작가는 이 구조를 활용해 층마다 고유한 장면을 설계했다.



1층, 화려한 발산과 소통
천장에 매달린 다양체 연작이 조명을 품고 공간을 점유한다. 빛 덩어리들이 서로 다른 높이에서 떠 있는 풍경은 조명이 꺼진 상태에서도 한지 고유의 질감으로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지닌다. 특히 쇼윈도는 상시로 조명을 켜두어 거리를 지나는 이들에게도 작품의 온기가 닿도록 했다.



지하 1층, 응축된 에너지와 겸손
작품이 바닥에서 피어나거나 위에서 떨어져 자연스럽게 퍼진 형태를 띤다. 이곳엔 좁은 통로 공간에 맞춰 제작된 특별한 작품이 있다. 관람자는 고개를 숙여야만 통과할 수 있는데 이는 타인에 대한 존경심을 상징한다. 통로를 빠져나와 고개를 드는 순간, 양옆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1층과 이어지는 빈 벽면에는 작가의 작업 과정이 담긴 영상이 재생된다.


2층, 자연으로의 귀결
유리 천장으로 쏟아지는 자연광만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고요한 종착점이다. 인공조명을 배제하고 여백을 극대화하여 남은 하나의 작품에 자연광이 온전히 집중되도록 했다. 이곳에 흐르는 물레 밟는 소리와 미싱 소리는 작가가 쏟아부은 노동의 시간과 부재하는 존재를 증명하며 마음의 평온을 선사한다.

Interview
고소미 작가
이번 전시는 ‘다양체’ 연작만으로 공간을 채우셨습니다. 작가님께도 새로운 시도였을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그동안 설치 미술과 공예 사이를 오가는 작업을 해왔는데요. 항상 여러 작업을 함께 선보이곤 했어요. 이번 전시만큼은 ‘다양체’라는 주제에만 온전히 집중해 보고 싶었습니다.

화이트 큐브 갤러리와 달리, 스페이스 톤은 노출 콘크리트의 질감이 인상적인 공간입니다. 처음 전시 제안을 받으셨을 때 어떠셨나요?
공간 특유의 결이 제 작품의 질감과 잘 어우러진다고 생각해 주저 없이 결정했습니다. 평소 무척 신중한 편인데 이곳은 예외였죠. 그동안 작은 크기의 다양체에 전구를 넣어 조명으로 만든 적은 있지만, 이렇게 대형 조명 설치로 선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지하의 좁은 통로에 배치된 작품도 특별히 만드셨다고요. 고개를 숙여야만 지나갈 수 있는 설치에 담긴 의미가 궁금합니다.
‘다양체’는 결국 고유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고개를 숙여서 통로를 지나는 그 낮은 자세 자체가 타인에 대한 존경심을 전달하는 방법이라 생각했어요. 겸손하게 몸을 낮춰 지나온 뒤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할 때, 그 모습이 제일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했죠.

전시장 곳곳에 음악 대신 기계적인 작업 소리들이 흐릅니다. 특별히 의도한 연출인가요?
네. 작업할 때 실제로 사용하는 미싱 소리, 물레 밟는 소리, 실 감는 소리입니다. 짧은 실이 긴 실이 되고, 조각난 원단이 하나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제가 쏟아부은 노동의 시간이 저 소리로 연결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아름다운 음악보다 나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6개월이라는 긴 전시 기간이 작가님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전시를 통해 관람자가 어떤 경험을 하길 원하시나요?
작가들이 최선을 다해 준비해도 보통의 전시는 일주일, 이주일이면 끝나버리곤 하잖아요. 특히 설치 작업은 반입과 반출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요. 한 장소에서 오랜 시간 작품을 보여드릴 수 있다는 점이 감사해요. 또 보통 갤러리는 관람 시간이 한정되어 있지만, 스페이스 톤은 쇼윈도가 있어요. 불을 켜두면 밤늦게 길을 지나는 분들도 창 너머로 작품을 만날 수 있죠. 그 또한 제가 작품을 전달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여러 시간대의 빛 속에서 변해가는 작품의 모습을 천천히 관찰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소미 개인전 <다양체>
기간 2026년 2월 21일 – 8월 20일
주소 스페이스 톤 (서울시 마포구 토정로 43-2)
운영 시간 13:00 – 18:00 (화-토)
웹사이트 홈페이지, 인스타그램